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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7)화 (51/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2)

그는 실력이 출중한 검사이지, 그녀의 화풀이 상대가 아니었다.

이렇게 대련하는 건 상대에게도 실례였다.

감정이 머리를 앞설 땐 부상을 입기도 쉽다.

그러나 케이는 왕족이 사과를 건네자 더욱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몹시도 불편해서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걸 느꼈다면 이제 그만 괴롭히고 보내 줘야 할 텐데. 타티아나는 그를 떠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작의 말을 거론해 가며 물었다.

“사람 죽이는 기술이라는데…….”

“…….”

“나와 비슷한 기술을 구사하는 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자 케이는 한숨을 쉬었고, 타티아나는 그 별것도 아닌 반응에 확신했다.

들었네, 들었어. 얘, 내가 공작이랑 말한 거 엿들었어.

귀가 밝아서 멀리서도 들은 걸까, 아니면 은신술이 그만큼 뛰어난 걸까.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가도 또 느껴지지 않아서 긴가민가했는데 여러모로 물건이었다.

타티아나는 내심 감탄했으나 케이는 왕자비의 사소한 질문 하나도 흘려 넘길 수 없는 위치였다.

그는 꽤 오랜 시간 고민하더니 나직하게 대답했다.

“비전하께서 마음에 담아 두실 만한 소리가 아닙니다.”

“…….”

“기사도 아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사는 백정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전하.”

“……그런가.”

타티아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녀도 케이처럼 생각했다.

고마운 말이었고 그녀가 타인의 입으로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게 위로가 되거나 힘이 불끈 솟지는 않았다.

어딘가 상황이 이상하고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였다.

타티아나는 그만 가 보라며 케이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연무장에 홀로 남아 공작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지는 해를 등지고 앉은 모습이 평소와 달리 울적하고 쓸쓸해 보였다.

* * *

신혼부부는 오늘 밤 양쪽 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드언은 저녁 무렵 수하들로부터 몇 가지를 보고받았다.

그중 하나는 뮐러 공작이 사병을 증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로?’

‘…….’

‘아직 그것도 파악 못 했어? 혹시 지금 나랑 장난을 하고 싶은 건가?’

기드언은 수하들을 바라보며 이 쓰레기들은 대체 어디까지 쓸모없어질 셈인가, 고쳐서 쓸 수 있나, 사람도 재활용이 가능한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호위 목적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공작은 얼마 전 불미스러운 사고까지 당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사람이 호위 인원을 확충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대처였다.

기드언은 그저 이걸 어떻게 하면 문제 삼을 수 있을까, 궁리했을 뿐이다.

아우와 엮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 부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그의 기분은 그 뒤로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케이의 보고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건 도화선 중 하나일 뿐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연무장에 멀거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충분히 예민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살기와 함께 주변 기온이 뚝뚝 떨어지자, 부관들은 눈치를 살폈다.

‘공작 말이야.’

‘예, 전하.’

‘그동안 내 비한테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지껄인 걸까.’

‘…….’

‘왜 내 비가 그딴 소리를 듣고도 반박 한 번 제대로 못 하냐는 거야. 비도 강단이 있는데.’

기드언은 공작이 타티아나의 검술을 은근히 후려쳤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한 번씩 짜증이 났다.

타티아나가 테이블 앞에 앉아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걸 떠올리면 부아마저 치밀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죽이는 기술이라니.

공작이야말로 죽고 싶어서 어지간히 안달이 났구나, 싶을 뿐이었다.

기드언은 공작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대해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왕자인 그도 비 앞에서는 언제나 말을 가리고 조심하는데, 공작 따위가 대체 뭐라고 되는대로 내뱉냐는 거다.

평생 검을 목표로 살아온 내 비 앞에서, 제깟 게 뭐라고.

기드언은 불쾌한 속내를 삭이지 못했다.

어찌나 불쾌해했는지 그는 저녁 내내 진흙 묻은 옷을 주워 입은 결벽증 환자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일과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왔을 땐, 타티아나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고, 또 나란히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데 참 이상하지.

기드언은 ‘하, 짜증 나네’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으로 타티아나의 머리칼을 꼬고 있었다.

그 손길은 엉망진창이 된 기분과는 달리 참 부드럽고 다정했다.

타티아나도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면서 기드언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꼭 무심결에 그를 간지럽히려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다음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입술을 겹쳐 온 건 기드언이었으나, 타티아나도 누가 시켜서 그의 목에 매달린 게 아니었으니 한 사람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어느새 기드언의 위에 올라타 있는 그녀는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구나, 생각했다.

기드언은 그녀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더니 아래에서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하아, 또 병영에 갔었다면서요?”

“응…….”

“거길 왜 자꾸 가지. 혹시 심심했어요? 내가 붙여 준 놀잇감으론 부족한가?”

놀잇감? 무슨 놀잇감?

한참을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설마, 하며 눈을 찌푸렸다.

“케이?”

말을 꺼낸 건 기드언이 먼저였다.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며 고약한 언사를 뽐낸 것도 그였다.

하지만 기드언은 그녀의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부드럽던 움직임에도 힘이 실렸다.

“침대에서 다른 남자 이름이 너무 쉽게 나오네요. 지금 듣는 사람 생각 안 하죠.”

“…….”

“적당히 데리고만 놀아요. 나 거슬리게 하지 말고.”

타티아나는 아앗, 하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그의 몸짓에 심술이 실렸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갑자기 못되게 구는 걸까.

너무 억울한 나머지 서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항의라도 하듯 아래에 힘을 콱 줘 버렸다.

그러자 기드언은 윽, 하며 치미는 감각을 간신히 참아 내더니 이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하아, 잠자리로도 공격하는 법을 터득했네?”

“전하가…… 먼저 나한테……. 이이, 화낼 거야, 진짜.”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으니까 노려보지 마요.”

“왜요. 무서워요?”

“고양이 같으니까. 야옹야옹 해 줄 거 아니면 그만 노려봐요.”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달래고 어르듯 팔을 쓰다듬고는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겨우 그 정도에 안심한 걸까. 아니면 기왕 말이 나왔으니, 조금 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생각이었을까.

타티아나는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를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다.

“아버지가 다치셨대서…… 읏, 그래서 간 거예요.”

“누가, 하, 네 아버지야.”

내 장인은 지금 순국선열의 묘에 묻혀 계시는데.

기드언은 조소했으나 타티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근데 거기서 바이칼, 읏, 전하를 만났어요.”

“……이제 딴 이름도 나오네. 그 어린놈한테 시집갈 뻔한 건 알고 하는 얘기예요?”

타티아나는 정말 왜 이러냐는 듯, 적당히 하라며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때렸다.

기드언은 너야말로 적당히 하라는 듯 웃음을 흘리며 입술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교묘하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에게 집중하라 종용했다.

참 이상한 상황이었다.

몸은 지나치게 서로를 갈구하는데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들이 부유한다.

그녀는 이 행위를 통해 그 잡념을 털어 버리고 싶었지만, 또 이를 빌미로 그 껄끄러운 얘기를 꺼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둘 중 그 어느 쪽에도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 와중에도 몸은 정직하게 반응하여, 두 사람은 겹쳐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먼저 마무리 지은 건 기드언 쪽이었다.

“당신 양부는……. 아니,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제부턴 호칭도 분명히 합시다.”

“…….”

“뮐러 공작은 왕후 편에 설 거예요. 이미 그래 왔고요. 기사 서약은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 중에 일부에 불과해요.”

“…….”

“당분간 많이 시끄러울 겁니다. 이제는 티티도 그쪽과 거리를 둬야 해요.”

타티아나는 오늘 내내 느꼈던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그녀는 남편의 손등을 감싸며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다시 한번 양부께 잘 얘기해 보는 건…….”

그러자 그는 핫,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

“비. 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거리를 두라고.”

기드언은 더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일거에 잘라 버렸다.

그 태도가 너무 확고한 나머지 일방적이기까지 했다.

사실 타티아나는 지금 그가 좀 강압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이제껏 남편과 그럭저럭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훌륭한 인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말에는 항상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떨떨함과 당혹감에 젖어 있던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나는 앞으로 이 문제에 나서지 말란 뜻이에요? 뒤로 빠지라고?”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굳이 결론만 얘기하라면.”

“……왜?”

“…….”

“가만히 있는 게 전하를 도와주는 거라고,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타티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흡사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 얘기하고 말았다.

본인 입으로 하는 질문에 스스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드언은 그녀의 말투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럴 리가. 이건 날 돕는 게 아니라 티티를 위한 겁니다. 난 뮐러 가의 일로 사람들 입에 당신이 오르내리는 걸 바라지 않아요.”

“…….”

“그리고 당신은 애초에 날 도울 필요가 없어요. 난 당신 남편이 되고 싶었던 거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청혼한 게 아니니까.”

타티아나는 이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 건지 참 고민스러웠다.

아내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 없다니, 참 잘나셨어요, 해야 하나?

아니면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 준다니 참 고맙네요, 해야 하나?

사실 그녀는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남편과 양부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겠다는데, 뒷짐만 지고 있는 게 가능할까?

그는 정말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정도로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냉혈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어떠한 항변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드언이 ‘그만 쉬어요’ 하더니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정말로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기드언은 그녀더러 쉬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대화를 이쯤에서 그만하고 싶은 거다.

더 자세한 설명을 할 의사도, 그녀를 설득할 의지도 현재로선 없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한참 동안 넋 놓고 남편을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이 남자는 방금 전까지 함께 몸을 섞은 그 남자가 맞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기드언에게서 갑자기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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