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3)
* * *
운동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타티아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며칠 전 밤을 회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싸운 건가?’
글쎄. 정확하지 않다.
중간중간 비꼬는 말이 오갔던 것 같기는 하다.
그간 신혼이라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지, 기드언은 절대로 온순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 정도는 타티아나도 코흘리개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끝까지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관계가 평소보다 거칠고 산만했다는 점은 인정하나, 타티아나는 거기에도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고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를 가지고 부부 싸움을 했다고 말한다면 ‘쟤넨 뭐야, 언제부터 저런 게 싸움이 됐어? 아주, 세상이 만만하지?’ 하며 아니꼽게 여길 위기의 부부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다.
‘그럼 서운한 건가?’
그건 확실히 맞는 것 같다.
타티아나도 그가 자신의 기분을 하나하나 맞춰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린아이도, 공주님도 아니었다.
그녀는 기드언에게 떼쓰는 애처럼 보이는 게 제일 싫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이 문제에 완전히 관심을 끊고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기드언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설령 두 사람이 끝내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부부라면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논쟁을 감정 소모와 시간 낭비로 치부하며 대화를 끝내서는 안 되지 않냐는 거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기드언은 며칠째 외박 중이었다.
진짜 성 밖에서 숙박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고, 집무실에서 먹고 자는 듯했다.
묘하게 날 선 대화가 오가던 그 밤, 그의 부관이 침실 문을 두드린 이후 벌어진 일이었다.
꽤 급한 일이었는지 기드언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침소를 나서려 했다.
좀 삐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남편이라고 타티아나는 그의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어 줬다.
이 정도면 마냥 감정적으로 군 건 아니지 않냐고 항변하고 싶다.
‘근데 집에는 들어와야 나도 생색을 내든, 따져 묻든 뭐라도 하지. 남편이 옆에 없는데 이걸 누구한테 얘기하냐고.’
타티아나는 몹시도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며칠째 계속 기분이 저조하다. 그리고 이럴 때면 그녀가 몰두하는 취미 생활이 하나 있다.
마법서 탐독이었다.
우리 발터의 위대한 대마법사께서는 한때 딸에게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남들에게 박수받고 우쭐한 건 잠깐이라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어른한테도 힘든 것이니, 그 잠깐을 위해 네 평생을 바칠 생각이면 그딴 건 시작도 하지 말라고.
아니, 뭐 애한테 그렇게까지 가혹한 얘기를 했지? 싶을 때도 많으나 타티아나는 어머니의 말에 이제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녀는 여전히 검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가끔은 검을 잡는 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도 까마득하다.
순간순간을 즐기기보단 목표를 넘기 위해 발버둥 치며 그 무게감에 짓눌리는 날이 부지기수다.
언제부턴가 검이 그녀에게 일처럼 되어 버려서.
그럴 때마다 마법은 타티아나에게 아주 좋은 도피처가 되어 주곤 했다.
이제는 기대를 거는 사람도 없으니, 이 얼마나 속 편한 취미인가?
그리고 사람이란 때로 부담감을 떨쳐 냈을 때 도리어 눈부신 성과를 내기 마련이다.
타티아나는 어머니가 남긴 마법서는 물론이거니와 발터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마법 주문과 수식을 외울 수 있었다.
어디에서 마력을 응축해야 하는지, 그 마력이 몸의 어느 곳을 통과해야 하는지 이론으로는 다 꿰고 있었다.
이건 아마 마탑주도 새파랗게 어린 이십 대 때는 도달하지 못한 경지일 것이다.
그러니 타티아나는 확실히 수재는 수재였다. 그냥 마력이 없을 뿐이었다.
누구보다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나, 체격 조건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참 서글프지만 재미있는 인생이 아닌가?
혹시 이런 비운의 천재를 본 적이 있나?
만약 있다면 타티아나는 이리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속상했지? 하며 꽉 한 번 안아 주게.
타티아나는 흠, 웃으며 희한한 문자들로 가득한 마법서를 한 권 꺼내 들었다.
[기억의 보존과 재생]
사람들은 블룸 부인을 환영 마법의 대가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분야는 환영 마법이 아니라, 사람의 추억을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환영이라는 것도 결국엔 그 토대가 기억력에 있다. 눈으로 보았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니까.
사람의 상상력도 경험을 자양분 삼아 나래를 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픈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훨씬 많았나 보다. 과거를 잊기보단 추억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얼마나 추억하고 싶은 게 많았으면, 자신의 평생을 여기에 쏟아부었을까.
타티아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지난 삶이 행복했다는 뜻일 테니 딸도 행복해질 자신이 있다.
타티아나는 눈을 감고 몸 안으로 마력을 순환시키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주문 일부를 자그맣게 읊조렸다.
“노여움과 슬픔은 깊은 곳에 잠들라. 함부로 깨우지 말라. 오직 빛바랜 추억들만이 물 위로 떠올라 고요를 깰지어다. 지나온 나날을 사랑하라. 그들과 악수하며 다시 물 아래를 바라보라. 이제 너의 슬픔에서도 빛이 난다.”
타티아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다음을 고민했다.
주문의 원형은 블룸 부인이 고안했지만, 이 끝은 언제나 시전자가 완성하게 되어 있다.
뭘 다시 보고 싶은지는 사람마다 다를 게 아닌가.
타티아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미리 사과했다.
엄마, 멋진 주문을 망쳐서 미안해요. 그런데 엄마 아빠가 어릴 때 나한테 보여 준 게 결국 이런 거 아닌가요?
“아빠가 몰래 숨긴 건포도. 엄마가 만든 예쁜 과자 집. 불타는 지붕. 우리 집 정원에 사는 알록달록 개구리! 독 개구리이!”
마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간절함을 담아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어찌나 최선을 다했는지 나중에는 거의 외치고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덕분에 심란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며 안정을 찾았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딴 게 마법이 아니었다. 이런 게 바로 마법이었다.
한참 동안 마법서를 들추며 킥킥거리던 타티아나는 오후 무렵엔 서재 밖으로 나왔다.
스칼렛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자선 파티 이후 거의 한패가 되어 붙어 다녔다.
그 모습이 가끔은 작당 모의를 하는 사고뭉치들처럼 보여 이자벨은 남몰래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자신이 얼마나 복받은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머리가 차면 그때부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 시댁 식구들과 그런 사이가 되기는 훨씬 더 어렵다.
타티아나는 시누이와 이 정도로 사이가 좋은 기혼자들을 파티에서는 보지 못했다.
‘스칼렛 전하.’
‘으응?’
‘제가 자의식이 비대한 편은 아닌데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는 매사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원래 운동을 오래 할수록 자존감, 자부심, 자만심, 이 차이들을 잘 구분해야 해요.’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솔직히 전하는 기드언 전하보다 저를 훨씬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요. ……맞죠?’
그때 스칼렛 공주는 정말로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타티아나는 아닌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역시 시댁의 벽은 극복하기 힘든 것인가? 생각하며 무안해질 뻔했다.
그러나 공주는 그래서 떫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으음, 타티아나는 외동딸이라 이런 심정을 잘 모르겠구나.’
‘뭘요?’
‘나한테 기드언은 그냥 내 모친의 아들일 뿐이야. 당연히 타티아나가 더 좋지. 아니, 타티아나만 좋은 거지. 징그러우니까 내가 엄마 아들을 좋아한다느니, 그딴 말은 하지 말아 줄래?’
‘…….’
‘나 진짜 토할 것 같아.’
‘아니, 뭘 그렇게까지…….’
타티아나는 새로 사귄 친구가 정말로 좋았다.
스칼렛은 그녀와 어느 하나 비슷한 게 없었지만, 타티아나는 거기에 이질감보다는 흥미를 느꼈다.
이미 한 번 호감이 생긴 터라 그냥 뭘 해도 다 좋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 스칼렛 또한 타티아나에게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올케는 나와 전혀 다른 유형의 미인이야. 경쟁심 같은 건 안 들고, 보고 있으면 그냥 눈이 즐거워. 예쁜 걸 보고 있으면 언젠가 질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절대 아니야. 늘 새로워.’
‘…….’
‘그러니까 부디 영원해 줘.’
타티아나는 귀여운 시누이를 마중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 외문 밖까지 행차했다.
그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하기만 했다.
머지않아 공주와 그녀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스칼렛은 오늘도 어느 누구보다 화려한 의상을 뽐내고 있었다.
한데 외문 부근은 몹시도 소란스러웠다.
스칼렛 때문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위대 부대장이자 타티아나의 동네 삼촌, 사무엘 샘슨 경이었다.
“난 왕실 친위대 소속이오. 부대장이란 말이오. 성에서 이보다 확실한 신원이 어디 있소?”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비전하와 사전에 일정을 조율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우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습니다.”
타티아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아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됐어?’
물론 무턱대고 찾아온다 해서 아무나 다 만나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친위대 간부는 아무나가 아니지 않나. 꼭 어릴 적 인연이 아니라 해도.
“샘슨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비전하!”
샘슨 경은 무슨 구명줄을 만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는지 잠시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타티아나는 그의 팔뚝을 다독이듯 툭, 하고 쳐 주었다.
뚝 그치고. 보고는 간단명료하게.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국경 다 무너지고, 성에 불나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타티아나는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그리 심각한 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슨이 갑자기 각을 잡고 부대장으로서 말을 꺼내자 그녀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비전하. 지금 감찰대원들이 친위대 관사를 뒤지고 있습니다.”
“……어?”
“연유를 물어도 대답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부대장으로서 경위는 알아야겠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타티아나는 한참 동안 굳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병영에 어떤 난리가 났는지, 그가 왜 여기까지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해했다.
한데 그렇다면 그 위의 대장은 무얼 하고 있나?
“양부께서는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시는데?”
“……현장에서 체포되셨습니다.”
“…….”
타티아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얼어붙어서 눈을 깜빡깜빡했다. 그리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묻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스칼렛은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곤란해할 뿐이지, 이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그건 타티아나를 뒤따라온 이자벨과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타티아나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얼마 전 파티장과 양부의 관사 앞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또 나만 몰라? 왜 나 빼고 다 알아?’
일의 경중으로 보았을 때, 지금은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 양부의 신변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자신의 눈을 피하는 스칼렛을 꽤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의도적으로 뭔가를 숨겨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아주 솔직하게도, 배신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