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9)화 (53/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4)

* * *

기드언은 참 꼼꼼하고 친절한 남자다.

어찌나 친절하신지 일이 생기기 전엔 꼬박꼬박 경고도 해 준다.

그는 얼마 전 침대 위에서 타티아나에게 한동안 성이 시끄러울 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랬더니 세상에? 정말로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얼굴에 대고 이렇게 빈정빈정 묻고 싶었다.

‘내 남편, 혹시 예언자신가?’

친위대도 난리를 겪고 있었지만, 뮐러 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에는 영지민과 병사들이 보냈다는 익명의 고발장과 투서가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거국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쯤 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이 소란의 타깃은 친위대가 아니었다. 뮐러 공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위에 있는 왕후와 바이칼 왕자일지도 모르겠다.

국무 회의에서는 뮐러 공작가의 사병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기드언은 회의석상에서 그걸 가지고 왕후와도 크게 한바탕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켕기는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 왕후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었다.

그 우아하기 그지없는 언변을 제대로 한번 펼쳐 보지도 못하고.

기드언은 이 기세를 몰아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꾸준히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한때 타티아나는 파티에서 남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기라도 한 양 으스대는 또래 귀족을 보며 참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넉넉한 마음을 갖고 바라보자면, 그건 어떤 면에서는 부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라서가 아니다. 배우자도 냉정하게 말하면 남이었다.

한데 사람이 타인의 성공에 그토록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일이 흔할 것 같은가?

결혼은 때때로 그걸 너무 쉽게 가능한 일로 만든다.

그러니 타티아나도 배우자가 정적을 궁지로 몰고 있다면 축하와 격려를 보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 제물이 하필 내 양부라니.’

하지만 타티아나가 요즘 정말로 열이 받는 건 따로 있었다.

그녀가 이 모든 진행 상황을 어디서 주워듣고 있다는 거였다.

기드언이 아니라, 타인의 입으로.

그는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타티아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계속 집무실과 본인 침실을 오가며 각방 생활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또 때로는 울화통이 치밀어서 집무실로 찾아가도 만나기가 어려웠다.

이쯤 되니 타티아나도 이러한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없다.

‘바쁜 게 아니라 날 일부러 피하는 거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겨우 이 정도 합리적 의심조차 갖지 못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곰이다.

하지만 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

그녀가 아무 제약 없이 외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가끔은 이러한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게 왜 다행인 거지? 당연한 건데? 나 죄수인가? 겨우 이딴 거에 만족하게?’

그럴 때면 또 울화통이 치밀었으나, 아무 때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답답한 기분을 환기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했다.

만약 이것마저 못 하게 했다면 그녀는 기드언이 오가는 복도에 날 밟고 가라며 드러누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진상 짓은 아직 해 본 적이 없지만, 사람이 머리가 팽 돌면 뭔들 못 할까.

타티아나는 앞서 방문한 또래 친구들을 배웅한 뒤 소파에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친구들이 수다를 떤답시고 병아리들처럼 삐악삐악 떠들어서 귀가 아프긴 했지만, 모처럼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다음 상대는 타티아나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뮐러 부인이 제발 시간을 내주십사 청해 왔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피하거나 미루고 싶은 게 사실이다.

공작 부인이 무슨 말을 할지도 너무 뻔하고, 타티아나는 그걸 해결해 줄 수가 없고, 속은 시끄럽고.

하지만 그녀보다 지금 훨씬 더 속이 시끄러울 사람은 공작 부인이었기에 타티아나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비전하!”

“어머니.”

늘 기품이 넘치던 뮐러 부인은 방에 들어오더니 거의 넘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타티아나는 양어머니를 얼른 일으켜 세우며 시녀들에게 나가 있으라 눈짓했다.

이자벨이 난처한 듯 머뭇거렸지만, 타티아나는 요즘 스칼렛은 물론이거니와 시녀들과도 아주 소원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보를 그녀들 선에서 의도적으로 걸러 낸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타티아나가 뾰족한 눈빛을 보내자 이자벨은 결국 고개를 조아리며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일단 좀 앉으세요.”

“비전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

“제 아들…… 비전하의 오라비도 엊그제 감찰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오라버니도요?”

뮐러 부인은 펑펑 울며 하소연을 쏟아 내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상황은 타티아나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기드언은 현재 공작을 성 어딘가에 투옥한 뒤 친국 중이었다.

친국이란 본래 국왕의 권한이나, 병세가 완연하니 1왕자가 그를 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왕족이 피의자를 직접 심문한다는 건 사안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없는 죄와 증거라도 만들어서 반드시 혐의를 입증하겠다는 왕실의 의지 표명이었다.

“차라리 정식 재판에라도 회부해 주십시오. 그이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세요. 분명히 오해가 있을, 아니,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약조하겠습니다.”

“…….”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착잡한 상황에 타티아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뮐러 부인은 다시 소파 아래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다리를 잡고 매달리더니 나중에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타티아나, 내가 널 서운하게 한 게 있다면 전부 다 사과하마. 이렇게 무릎 꿇고 빌게. 응?”

타티아나는 고개를 몇 번이나 저었다.

그녀는 공작 부인에게 서운한 거 하나 없었다.

피를 나눈 가족끼리도 싸우는 마당에 객식구를 들이는 게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쉬웠을까?

물론 그녀들도 불협화음을 낼 때가 있었다.

공작 부인은 친위대장인 남편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곱디고운 아가씨가 검을 잡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검술을 한때의 치기와 반항으로 치부하는 말 때문에 속상했던 적도 있다.

내키지 않는 파티 초대장을 받아 와 등을 떠민 적은 훨씬 더 많았다.

그때마다 귀찮은 기색을 완전히 감추진 못했지만, 타티아나는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과 성향이 완전히 다른 공작 부인의 강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할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까. 아마 그럴 필요성도, 동기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왕실 생활에 적응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을 테지.

타티아나는 공작 부인을 일으켜 소파에 다시금 앉히며 말했다.

“제가 서운한 게 어디 있어요. 사과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정말이니?”

“그렇다니까요.”

“그럼 한 번만 도와다오. 우리 가문 좀 살려 줘. 목숨만, 응? 우리 그렇게 나쁘게 지내지 않았잖니.”

“…….”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타티아나는 여러 번 한숨을 쉬었다.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은 사실 그녀에게도 있다.

기드언이 아무 혐의점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을 너무 밑도 끝도 없이 신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이 문제에 말 한 마디 얹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신 청, 전하께 그대로 전해 드릴 거예요.”

“…….”

“근데 장담은 못 드려요. 제가 있었던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타티아나.”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서로가 덜 다치는 방향은 없는지 조금만 더 고민해 달라고, 그 정도는 부탁해 볼 수 있잖아요.”

공작 부인은 타티아나의 말에 안도했을까. 아니면 이 약속의 범위가 부족하게 느껴졌을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아주 미약한 희망일지라도, 지금 붙잡을 지푸라기는 타티아나 하나뿐일 것이다.

공작 부인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통곡하기 시작했고, 타티아나는 아무리 달래도 부인이 그치지 않아 나중에는 이런 말까지 해야 했다.

이제 청을 올리려면 전하께 가 봐야 하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겠냐고.

다소 영악한 방법이었으나 눈물바다를 그치게 하는 데는 또 이만한 게 없었다.

뮐러 부인을 공작 저로 돌려보낸 타티아나는 그길로 기드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난관이었다.

예상은 하였지만, 경비병들의 태도부터가 비협조적이었던 것이다.

“전하 안에 계셔?”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어디 가셨는데?”

“그…….”

경비병은 문 앞을 틀어막고 우물쭈물했다.

타티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설마 지금 모른다는 그딴 뻔한 변명을 내 앞에서 하려는 거 아니지?

“안에 없는 건 맞아?”

“예…….”

“진짜야?”

“……문 열어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전하가 여기 안 계신다는 데에 네 목이든 손목이든 아무거나 하나만 걸어.”

타티아나는 경비병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드언은 확실히 이 안에 없다.

“그럼 뮐러 공작님께 갔어? ……거기가 어딘데?”

“비전하, 죄송합니다. 그건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비전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습니다.”

“…….”

“일단 처소에 가 계시지요.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연통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말을 믿었던 적도 없지만, 듣는 척이라도 하며 물러났다가 오지 않는 연통에 날밤을 지새운 게 벌써 여러 번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기드언의 상의 앞섶을 움켜쥐며 묻고 싶어진다.

부인을 이렇게 문전박대하고, 바람까지 맞혀 놓고 과연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평탄할 것 같으냐고.

타티아나는 경비병들과 한참 동안 무언의 대치 상태를 벌였다.

그러고는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며 툭 내뱉었다.

“이불 좀 갖다줘.”

“……예?”

“나 오늘 여기에서 자야겠다. 아직 복도에서 자 본 적은 없지만 한번 해 보지, 뭐.”

“…….”

“남편 오면 깨워 줘.”

다들 내가 우습지?

이래도 흐응, 저래도 흐응, 하니까 속으론 얼마나 만만했을 거야.

배우자가 내 존재를 무시하는데 이 사람들이라고 내가 안 우습겠나 싶다.

타티아나는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벽에 기대앉으며 팔짱을 꼈다.

진짜 여기서 이불을 덮고 자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드언이 올 때까지는 기필코 기다리겠다는 심산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