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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0)화 (54/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5)

* * *

같은 시각.

기드언은 부관들과 함께 어두운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미 수감자 대부분에 대하여 조사를 끝마친 그들의 얼굴은 무뚝뚝했다.

그러나 어떤 이의 옷소매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튀어 있다.

뮐러 공작이 현장에서 체포된 건, 묵과할 수 없는 혐의가 새롭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공작은 호위 외의 목적으로 사병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의 사병들은 북부 민란의 주도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다 기드언의 정보원들에게 꼬리가 잡혔다.

공작이 왜 그랬을까?

왕자 측은 며칠째 강도 높은 심문을 벌이고 있었으나 기드언은 시시할 정도로 답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기드언은 얼마 전 북부에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며, 그들에게 군사를 지원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한데 공국에서 민란이 일어나 발터 신민들까지 수탈을 당한다면, 기드언은 곤란한 입장에 처하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회의에서 북부인들은 역시 상종 못 할 종자들이라며 목소리를 높일 게 분명하다.

이는 기드언의 정치적 판단력에 대한 의구심으로까지 이어지겠지.

이 모든 것은 공작이 혼자서 계획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공작의 뒤에는 분명 왕후라는 배후가 있다.

“장인어른.”

이제 호칭을 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냐고 자신의 비에게 말했던 기드언은 공작을 장인이라 불렀다.

물론 비아냥에 지나지 않았다.

“진술서는 잘 쓰고 계셨습니까?”

“…….”

“잘 썼냐고 묻잖아요. 안 들려?”

“저, 전하. 저는 왕후 폐하께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공무의 일환이었습니다.”

“공무? 친위대장이 친위대를 놔두고 왜 용병들이랑 공무를 하는데.”

기드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조소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기드언도 뒤로는 살수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케이는 공작 앞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어 기드언에게 내밀었다.

기드언은 한동안 종이에 적힌 내용을 꽤 유심히 읽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벅벅 찢어 버렸다.

“왕후의 이름이 두 번밖에 나오질 않는군. 너무 밋밋해. 다시 써라.”

기드언은 왕후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북부에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그 여파가 발터 민간에까지 이르렀다면, 왕후는 국무 회의에서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왕자, 그러게 이 어미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시기상조라 하였거늘. 매사 신중해야지요…….’

비록 왕후의 계략은 모의 단계에서 무위로 돌아갔으나, 기드언은 그녀가 가증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자 기분이 시궁에 처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추락하며 조소가 나왔다.

이 기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공작의 진술서는 왕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만 했다.

하나 부관들은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을 보며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전하, 저자가 거부하면…….”

그들은 과연 공작이 살아서 이 지하실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더 이상의 진술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실한 증거품일지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확보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기드언은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붙여. 그렇게 아쉬우면 다시 붙이면 되잖아.”

“훼손되면 신뢰성 또한 떨어지지 않습니까…….”

“위에 종이 대고 그대로 다시 쓰든가.”

겨우 그딴 것도 못 하냐는 듯 기드언은 얼음장 같은 눈을 부라렸다.

그의 심기는 평소보다 까칠했다.

벌써 며칠째 토막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운 결과였다.

그러자 케이가 나직이 말했다.

“필체를 흉내 낼 수 있는 놈들을 몇 데리고 있습니다. 간단한 문서 정도는 위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술서의 내용 따위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설령 공작이 기드언 측에게 협조하여 모든 책임을 왕후에게 돌린다 해도 왕후는 분명히 빠져나갈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이미 그러고 있었다.

‘글쎄요. 처음 듣는 일이군요. 간혹 충성심이 지나쳐 이성이 흐려지는 이들이 있지요. 아둔한 이들의 말로는 좋지 않답니다. 한데 공작도 그리할 줄은…….’

기드언이 언젠가 생각하지 않았던가. 왕후는 능력이 있으나, 그리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애초에 그녀에게 공작은 기드언의 심기를 긁고 승계 전쟁의 불씨를 키울 장작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쓰임을 다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였다.

하지만 기드언은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공작이라고 그걸 몰랐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기드언은 수하들에게 공작을 의자에 앉히라 턱짓으로 지시했다.

철제 다리가 지하 감옥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기드언은 공작의 맞은편에 앉아 한동안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죄인으로 전락한 타티아나의 양부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시선을 떨구자 기드언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난 네가 비의 후견인을 자처했을 때 내심 그 결정을 반겼다.”

왕실이 모든 순직 기사의 가족들에게 예우와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블룸 백작은 전쟁 영웅이었고, 왕자의 스승이었다.

그런 사람의 딸을 짐짝 떠넘기듯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

왕실의 고민이 깊어 갈 때쯤 뮐러 공작은 타티아나의 보호자로 나서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공작은 집안도 훌륭했고, 블룸 백작의 상관이자 친우였다.

풀만 전쟁 당시, 블룸 경의 부대를 휘하에 두었던 인연도 있다.

여러모로 타티아나의 후견인이 될 명분과 자격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드언이 이 결정을 반겼던 것에는 또 한 가지 남모를 이유가 있다.

그는 그때부터 이미 타티아나에게 청혼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백작가 여식인 것보다는 공작가 여식인 게 왕실 입성에는 수월하겠지.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배경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이다.

친위대장과 혼맥을 맺는다면 기드언으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왕실은 그때 너희 가문에 양육비까지 지급했지.”

보상안에 그런 세세한 조항까지 꾸역꾸역 집어넣은 건 기드언이었다.

스승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타티아나가 부족함 없이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뿐일까. 그는 타티아나가 집 밖으로 나설 때는 케이를 통해, 파티에 참석할 때는 스칼렛의 인맥을 통해 그녀에 대한 소문을 주워들었다.

공작을 눈여겨보게 된 것도 그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네가 좀 이상해지기 시작하더군. 1, 2년쯤 됐나. 왕후와 자꾸만 접촉하고, 내 눈치를 보는 거야. 난 네가 왕후에게 약점을 잡힌 게 있구나, 생각했지.”

“…….”

“그전까지만 해도 난 너에게 잘해 줄 생각이었거든. 내 비의 양부잖아. 그렇다면 언젠간 내 장인이 될 테니까.”

기드언은 그 말을 하며 참 재미있다는 듯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

그가 공작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 계기는 사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공작 앞에서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결정적인 패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아껴 놓는 것이다.

게다가 공작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기드언은 어차피 그를 살려 둘 수가 없었다.

바이칼과 자신을 두고 저울질한 것으로도 모자라, 왕후의 명을 수행했으니.

그런데도 기드언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네 팔을 그렇게 만든 거. 음…….”

“…….”

“사실 나야.”

기드언은 ‘알고 있었지?’ 물으며 피식 웃었다.

너무나 즐겁다는 기색인데, 주변 분위기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수척해진 공작은 물론이거니와 부관들도 왕자의 기에 눌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기드언은 그에 개의치 않는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다면 모든 게 참 편했겠지. 그럴까 말까 실제로도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물론 그리했다 해도 그의 비가 슬퍼하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친부에 이어 양부까지 잃고 비탄에 잠겼겠지.

하지만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지 않나?

아내가 덜 슬퍼하는 선택지와 더 슬퍼하는 선택지가 있다면, 당연히 덜 슬퍼하는 쪽으로 계략을 꾸미는 게 남편이 해야 할 일 아니겠냐고.

“그런데 말이야. 널 그냥 고이 보내 주려니까 나도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굳이 이걸 들쑤시고 파헤쳐야 할까.

그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이미 타티아나를 아내로 얻었고, 결혼 생활은 몹시 순조로웠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과거. 잃어버린 지난 3년.

그 기간을 싹둑 오려 내고, 어린 시절과 지금을 이어붙이면 안 되나?

한데 그러질 못하겠다.

그는 그녀 주변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모조리 다 알아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그녀에게는 진실을 감추고 손바닥으로 그 눈을 가릴지라도.

기드언은 공작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수하들은 왕자의 눈동자가 그 언젠가처럼 빙글 돌아 있다고 느꼈다.

그게 마치 광인처럼 보인다고 모두가 생각할 때, 기드언이 물었다.

“왜 죽였어?”

“…….”

“누구 말하는지 모르겠어?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나?”

“…….”

“블룸 백작 말이야.”

왕자가 심문하는 내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뮐러 공작의 눈빛은 희망을 잃고 명멸했다. 그러다 마치 오기가 생긴 사람처럼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샅샅이 들여다보던 기드언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너로군.”

“…….”

“……진짜 너였어.”

기드언은 상대를 궁지에 몰고 심리적인 덫을 놓기 위해서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광인인 것은 아니었다.

만면에 피어오르던 미소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고,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이제껏 수하들도 겪어 본 적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순수하고 깨끗한 살기였다.

서늘했던 지하 감옥이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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