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6)
* * *
결혼 생활에 있어 가장 큰 위기의 신호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티아나는 그중 하나가 대화의 단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상대가 대화를 피하는 이유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어쩌면 상대는 흔히들 얘기하듯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일 수 있다.
화가 났을 때는 일단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에야 대화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을 수도 있다.
단지 똑같은 싸움을 반복하는 게 지겹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고.
부부 간에는 져 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죄인이 되어 혼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변태가 아닌 이상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반복되는 패턴이 지겨워 싸움을 회피한다면 열심히 열을 내던 이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게 누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래? 누군 싸우는 게 좋아서 이래? 나도 지겨워.’
그러면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상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겠지.
응, 바로 이게 싫은 거라고.
사과한들 항변한들 남의 말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적인 분위기 자체가 싫은 거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시작한 침묵은 다소 답답하더라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사람은 또 궁금한 건 못 참는 종족이라서 냉전을 펼치다가도 은근슬쩍 말을 걸게 되는 것이다.
‘어제 어디서 잤어?’
물론 이건 상대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경우다.
문제는 얼굴을 마주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싫을 만큼 정이 떨어졌을 때다.
만약 상대가 그런 이유로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면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과는 정말로 아무것도 해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는 게, 적어도 그녀가 싫어졌기 때문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녀도 이렇게 체면 불고하고 남의 집무실에 쳐들어와 강짜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기드언은 결혼한 이후로 그녀에게 늘 잘해 주었다.
법적 아내이니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겠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본인 성격에 썩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맞추려고, 분명 노력이라는 것을 했다.
그걸 못 알아챌 정도로 눈치가 없다면 인간으로서 반성해야 한다.
영악한 것은 자랑이 아니지만, 타인의 감정에 너무 무딘 것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랑이 아닌 건 마찬가지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낄 때가 꽤 많았다. 언뜻언뜻 심술이 나올 때가 있긴 했으나, 그녀를 대할 때만큼은 태도에 항상 성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전제에 대해서도 한 번쯤 재고해 볼 때가 온 것인가?
그녀는 그간 가져온 확신이 아주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호위병들은 타티아나의 눈치를 보며 웅성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전하.”
“왜, 전하 오고 계셔?”
“그…… 아닙니다. 용무를 마치고 처소 쪽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합니다.”
“허어.”
타티아나는 그간 참아 왔던 답답함과 울화가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꾹 내리누르며 일단은 확인차 물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단 얘기는 안 했어?”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십니다.”
누굴까? 기드언의 태도에 성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
타티아나는 이리 잠깐 나와 보라고 하고 싶었다.
착각 좀 하지 말라고 호되게 꾸짖어 주게.
그러나 그것은 그녀 자신이었기에 타티아나는 비참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기드언이 침실로 들어가 버리기 전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기 위해서였다.
왜 이렇게까지 구차해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도 결국에는 기드언의 얼굴을 봐야만 따져 물을 수 있었다.
당신 배우자를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만들고, 아랫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니까 속이 시원하냐고 묻고 싶다.
타티아나는 풍성한 드레스를 손으로 모아 쥐며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러자 막 복도를 지나고 있는 사내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전하!”
타티아나는 그를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하게 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애가 타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얼른 기드언 앞으로 다가갔는데, 그러다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갑자기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감각의 정체는 뭘까 고민하던 초록 눈동자에 서서히 의혹이 깃들었다.
‘뭐야, 피 냄새가 나잖아…….’
타티아나는 왕자 일행을 다시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들 중에는 케이가 있다.
그는 왕자의 곁에서 위험한 일을 대신하는 이가 분명하니, 이 흥건한 피 냄새는 그에게서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기드언 또한 평소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한 살기를 느꼈다.
그가 경고의 의미로, 혹은 반쯤 장난으로 흘려보내곤 하던 기운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기드언은 미처 그 기운을 다 갈무리하지 못한 채였다.
그걸 본인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다소 무심했다.
“나중에 얘기하자고 한 것 같은데.”
의구심과 약간의 불안감에 젖어 있던 타티아나의 눈은 대번에 뾰족해졌다.
“나중에 언제요?”
“…….”
“이러다 계절이 바뀌겠어요.”
그러자 기드언은 몹시도 일상적인 태도로 ‘그럴 리가’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는 태연한 낯빛으로 이렇게 되묻기까지 했다.
“내가 티티를 그렇게 오래 혼자 둘 리 있습니까?”
그 뻔뻔함에 감탄한 것도 잠시, 급한 사람은 그녀인지라 타티아나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얼마 안 걸리니까 시간 좀 내줘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타티아나가 ‘잠깐’이라는 단서를 단 이유는 그가 실제로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입으로는 뻔뻔스러운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으나, 그에게서는 분명 지친 기색이 느껴졌다.
기드언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른 것은 타티아나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관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자, 타티아나는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하나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동선을 피하고자 했을 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처소로 온 게 아니었다.
그의 공무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했다.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자, 타티아나는 방을 넓게 한번 둘러보았다.
기드언의 개인 공간에는 서류 더미는 물론이고, 서적도 꽤 많았다.
그중에는 읽다가 잠시 엎어 둔 것으로 보이는 책도 있어 타티아나는 솔직히 조금 흥미로웠다.
결혼한 지 꽤 되었지만, 남편의 사적 공간에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이라서.
그는 부부 침실로는 이런 것들을 한 번도 가져온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는 이런 개인적인 감상에 오래 젖어 있을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곧바로 용건부터 꺼냈다.
“양부 말이에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그녀가 뭘 시작해 보기도 전에 기드언은 호칭부터 지적하며 말을 잘랐다.
타티아나는 속에서 뭐가 살짝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을 고쳤다.
“네, 뮐러 공작이요.”
“…….”
“정식 재판을 받게 해 주세요.”
타티아나도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기드언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정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그는 말했다.
“친국은 국왕의 권한입니다. 나는 그 권한을 폐하께 위임받았고. 이건 비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닙니다.”
“……공작이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요?”
현재까지 밝혀진 죄목만을 놓고 얘기한다면…… 타티아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간 뮐러 영지에서 바친 세수분과 친위대 운용 내역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청탁을 받고 기사를 임용한 정황도 속속들이 드러났다.
명백한 잘못이다.
그런데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털어서 그 정도 나오지 않는 귀족이란 발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민들은 얘기하곤 한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어떤 놈이 그 자리에 앉든 청렴결백을 기대하기는 힘든 세상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걸 빌미로 공작가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것일까?
이건 기드언에게도 정치적 무리수일 텐데.
타티아나는 미심쩍은 표정이었고, 기드언은 입을 열었다.
“비. 북부는 앞으로 내 군사적 거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난 그곳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군사적 지원도 약조한 겁니다.”
“…….”
“한데 공작은 사병을 고용해서 그곳에 장난질을 치려 했습니다. 나한테 타격을 주려고 그런 거겠죠. 왕후와 손을 잡고요.”
“…….”
“그런데도 비는 공작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 말하시겠습니까?”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격식을 차리면서도 차갑게 몰아붙인 탓에 타티아나는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실은 그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지하 감옥에서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고 온 건 그다.
그 내용을 타티아나에게 알려 줄 생각도 없다.
자신이야 뼈아픈 실책이었다며 속이 좀 쓰린 정도로 끝낼 수 있지만, 타티아나에게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닐 테니까.
그녀가 진실을 알고 무너져 내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기적이지.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공작을 두둔하려는 타티아나를 보며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원망이 생기려 했다.
뭐하러 그런 집구석에까지 마음을 줬냐는 거다. 바보같이.
“티티. 당신은 내 아내예요. 입장을 분명히 해야죠. 내 편에 서는 게 힘들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잠자코 물러나 있으란 겁니다.”
“…….”
“이게 내 나름대로의 배려인 건 잘 모르겠어요?”
기드언은 정말 피곤하다는 듯 손으로 이마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한데 그 순간 우물쭈물하고 있던 타티아나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기드언의 커다란 손바닥에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