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7)
친국은 왕족의 입회하에 심문을 한다는 것이지, 왕족이 직접 고문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오른손에 묻어 있는 검붉은 자국은 너무나 선명했다.
저건 어쩌다 튄 흔적이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손을 썼을 때만 남을 수 있는 자국이었다.
타티아나는 그 대상이 뮐러 공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죄인의 것일 수도 있지 않냐고?
아니, 기드언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깔끔한 성미라 본인 손을 쉽게 더럽히지 않았고, 그럴 만큼 흥분하는 일도 드물다.
아까 전, 처소 앞에서 느꼈던 살기.
애써 모른 척했던 위화감과 불안이 다시금 고개를 들자, 타티아나는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공작님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기드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하, 웃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얘기는 어디로 들은 겁니까?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타티아나의 태도는 강경했다.
“일부러 비꼬면서 초점 흐리지 말아요. 난 그런다고 흥분 안 하니까.”
“…….”
“혹시 서쪽 첨탑 지하에 있나요?”
타티아나는 어린 시절부터 병영을 드나든 간부의 딸이었다.
왕실이 중죄인을 어디에 처박아 놓고 조서를 꾸미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만약 서쪽 첨탑이 아니라면…….
타티아나는 머릿속으로 다른 후보지를 몇 추렸으나,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기드언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고, 타티아나는 그 찰나의 반응에서 답을 확인했다.
“가서 내 눈으로 봐야겠어요. 무사히 있는지 확인해야겠다고요.”
“아니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
“……공작님이 지금 살아 있는 건 맞나요?”
세상에. 왜 대답을 안 하는 걸까.
타티아나는 더욱 불안해져서 방을 나설 채비를 했고, 기드언은 결국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서 무슨 헛소리를 듣고 싶은 건데!”
“…….”
“그 새끼는 너한…….”
늘 차분했던 그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타오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기세에 타티아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방금 뭔가를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복잡한 눈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창밖으로 시선을 멀리했다.
한참 후, 그는 감정을 가라앉힌 듯 다시금 바로 섰다.
그러나 침착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 그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말했죠. 당신은 뮐러 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괜히 귀족들 입에 오르내릴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오르내릴 일 없어요. 그냥 가서 조용히 확인만 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것마저 못 하게 하세요? 요즘 되게 이상하신 거 알아요?”
“공작은 이미 혐의가 입증된 중죄인입니다.”
“…….”
“티티. 떼쓰지 말아요.”
내내 잘 참고 있던 타티아나는 그 말에 뭐가 확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떼를 쓴다고? 누가. 내가?
그녀는 이미 왕실에 복무하던 친아버지를 잃었다.
누굴 원망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서러움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 거라고 보나?
그런데 이제는 양부마저 지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뮐러 부인의 청이 있었지만, 타티아나는 무작정 공작을 풀어 달라 말하지는 않았다.
자비를 기대하는 마음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사면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는 기드언의 입장 또한 고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심으론 그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기도 했다. 한데, 그런데도…….
‘당신 눈에는 내가 지금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원망 섞인 눈으로 노려보다가 분한 듯 말했다.
“구명해 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그건 법대로 하시고, 전하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적어도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예요.”
“…….”
“중죄인이라고 하셨나요? 저는 그것까지는 모르지만, 전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하지만 전하, 흉악범이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해도 그 딸에겐 아비의 마지막 얼굴을 보게 해 줍니다. 목에 밧줄이…… 끔찍한 꼴을 당하기 전에요.”
“…….”
“그런데도 제가 전하께 고작 이 정도 부탁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제 청이 정말 그 정도로 잘못되었나요?!”
두 사람의 눈빛은 마치 불꽃을 튀기듯 허공에서 교차했다.
대치 상태는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한숨을 쉬며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기드언이었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그가 자신의 말에 수긍했다고 생각했다.
완벽히 납득하진 못했더라도 한 번쯤 굽혀 줄 의사가 있는 거라고,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타티아나가 지하 감옥으로 가기 위해 등을 돌렸을 때였다. 기드언은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비께서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시다. 방까지 모셔라.”
“……뭐라고요?”
타티아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명을 받은 부하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호위병들은 그녀 주위를 둘러쌌고, 케이는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녀의 한쪽 팔을 억류하듯 붙잡자, 옆에 있던 병사도 슬그머니 반대편에 다가섰다.
마치 죄인을 포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꼴을 당하고도 타티아나는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기드언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믿기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거예요?”
“…….”
기드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타티아나는 케이와 병사에게 말했다.
“놔.”
“…….”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하지만 그들 또한 묵묵부답이었다.
왕자가 명을 거두지 않는데, 부하들이 먼저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타티아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리다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몸을 비틀며 케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케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은 채 그녀의 팔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란을 틈타 다른 병사의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검 끝은 케이와 병사들을 겨누었고, 초록 눈동자는 다시금 기드언을 향했다.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타티아나는 몹시도 불쾌했다.
이건 왕족으로서도, 한 명의 검사로서도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눈을 활활 불태우고 있음에도 명을 거두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녀가 공작을 만나러 가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했다.
“비를 방으로 모시고, 그 앞을 지켜라. 개미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그렇게 가두면 내가 못 빠져나갈 것 같아요?”
감금하겠다는 말에 이를 악문 것도 잠시, 타티아나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냐고 물었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도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을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비록 그들 중에는 케이가 있었지만, 피를 볼 각오만 되어 있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나 기드언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태연했다.
“그럼 한번 해 보든가요.”
“…….”
“비 마음껏 하십시오. 참고로 다 죽여도 난 아무 상관 없습니다.”
타티아나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기드언은 이들의 목숨에 그리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책임을 느끼는 쪽은 그녀가 될 테지.
타티아나는 검을 쥔 채 시간을 끌었고, 그건 결국 망설이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자, 기드언은 수하들에게 턱짓했다.
그만 데리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떠밀려 나가며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노려보았다.
“지금 나한테 실수한 거예요.”
“…….”
“저는 오늘 일, 안 잊을 거고 용서도 안 해요.”
그러나 타티아나는 자신의 말이 참 볼품없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주인공에게 두고 보자, 말하며 퇴장하는 악당 같지 않은가.
서운함을 금치 못하고 널 미워할 거라 말하는 어린애 같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자신의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라도 기드언이 알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당신의 행동에 얼마만큼 실망했는지.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문턱을 나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타티아나와 언쟁을 펼칠 때와는 사뭇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조가 어려 있었으며 씁쓸하기만 했다.
그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타티아나의 말에 뒤늦게 대답했다.
“……그리하십시오.”
그 말을 들었을까, 듣지 못했을까. 타티아나의 등이 멈칫하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이내 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기드언은 그곳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천천히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에는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피로한 기색의 남자가 있다.
기드언은 자신의 얼굴을 무심하게 응시하다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뒤늦게 손바닥에 말라붙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국을 지워 내기 위해 손을 문질렀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 버린 탓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의치 않았다.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양손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다.
이튿날.
타티아나는 침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아침을 맞이했다.
이제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 오기가 앞선다. 기어코 이 감시를 뚫고 나가 첨탑 지하에 잠입하고야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오후 무렵이었다.
그녀는 이자벨로부터 비보를 전해 들어야만 했다.
‘비전하, 놀라지 마십시오.’
‘왜 그래. 무섭게.’
이자벨은 본인도 진정이 안 되는지 마른침부터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뮐러 공작이 심문 직후 자진하였다 합니다.’
‘이자벨? 그게 무슨 소리야…….’
‘유서 내용으로 보아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인 듯하옵니다. 죄는 부디 자신의 대에서 끝내고, 가문에는 용서를 베풀어 달라고…… 그리 적혀 있다 합니다.’
의혹이 많은 죽음이었다.
아직 형이 확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목숨 정도는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사교계는 잠시 술렁일 뿐 비교적 조용히 굴러갔다.
공작과 연결 고리를 의심받는 왕후마저 제 일이 아닌 양 물러나 있다.
감히 누가 의문을 제기할 텐가. 끈이 다 떨어진 채 몰락해 버린 가문을 위해 나서 줄 귀족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뮐러 가는 공작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가족장을 치를 예정이라 했다.
타티아나는 그곳에 찾아가려 했다.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잠행복을 입고.
하지만 그 또한 불가능했다. 기드언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조의를 표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뿐이 아니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방 안에서 상복을 입는 것마저 허락지 않았다.
완고하기만 한 그의 태도를 보며 타티아나는 한탄하듯 물었다.
‘제가 전하께 대체 어디까지 더 실망해야 하나요.’
‘…….’
뮐러 가 사건은 서서히 일단락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 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끝이 아니었다.
이는 한 부부에게는 마치 냉전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