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
* * *
타티아나는 자신이 세운 막사에서 포근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국방색 담요를 돌돌 말고 마법서를 읽고 있는 그녀는 남부러울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처음으로 독립할 땐 누구나 신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평화가 허락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막사를 빼곡히 에워싼 호위병들로부터 적정 거리를 보장받기 위해 싸워야 했다.
말이 아니라 칼로.
‘미안한데 좀 떨어져. 이러면 나보고 어떻게 쉬라는 거야.’
‘여긴 밖입니다, 비전하.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난 너무 안전해.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건 호위가 아니라 감시야.’
‘…….’
‘두 명씩, 아니, 세 명씩 덤벼. 한 명이라도 날 이기면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내가 이기면 저어기, 저 나무까지 떨어지기야.’
그녀도 검사라서 남의 자존심을 지르밟는 짓은 되도록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병들은 그녀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반대로 그녀는 경비병들의 전투복을 넝마로 만들었다.
병사들이 참 무안해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제 기사들도 아니고 병사들까지 상대해야겠냐고. 대련도 수준을 봐 가면서 해야지.
어찌 됐건 혼자만의 휴식은 달콤했다.
늦가을이라 쌀쌀했지만, 밤공기마저 상쾌했다.
이게 병사들과 가볍게 몸을 푼 대가로 주어진 보상이라면, 그녀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타티아나는 마법 주문을 이렇게도 외쳐 보고, 저렇게도 외쳐 보았다. 그러다 기분이 점점 좋아져 콧노래까지 나오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막사로 다가오는 인영을 주시했다.
낯선 침입자의 정체는 스칼렛 공주였다.
그녀는 타티아나가 왜 여기에 나와 있는지 아는 것처럼 시녀들을 다 떼어 놓은 채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호위병은 눈짓, 손짓으로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막을까요?’
타티아나는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뮐러 공작이 변을 당한 이후, 사이가 완전히 어색해져 버렸지만 여기까지 온 공주를 문전박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어어? 내 부비트랩……!’
기사들이야 그 정도는 우습게 피했지만, 스칼렛 공주는 아닐 터였다.
호위병도 타티아나와 같은 걸 떠올렸는지 눈이 커다래졌다.
달이 동그랗게 떠오른 밤.
넝마를 입은 병사들과 타티아나는 공주를 사이에 두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스칼렛은 이렇게 환영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의아하면서도 기쁜 기색이었다.
그녀가 총총걸음을 떼자, 타티아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오지 마! 그거 밟지 말라고!”
“응?”
하지만 스칼렛은 정강이로 반투명의 얇은 줄을 건드려 버렸고, 타티아나는 그대로 몸을 던져 날아오는 무기를 낚아챘다.
손도끼였다.
“허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병사들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타티아나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손도끼를 바닥에 던져 놓고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오직 스칼렛만이 본인이 죽을 뻔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공주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막사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였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귀신같이 기척을 감지하고는 공주를 제지했다.
“동작 그만. 거기 밟지 말아요.”
“어? 왜?”
“구덩이가 있으니까 아무 데나 발 딛지 말라고요!”
“……그런 걸 왜 파 놓은 거야?”
위기일발의 순간을 겪고 격양되어 있던 타티아나는 그 물음에 갑자기 차분해졌다.
본인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과거의 나, 대체 왜 그랬을까?’
타티아나는 구덩이는 놔두더라도 너무 위험한 덫들은 해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의도치 않게 왕족 살해죄를 저지르고 교수형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어차피 이 성에 그녀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상대라면 오히려 한 번쯤 붙어 보고 싶었다.
타티아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앞장을 섰고, 스칼렛은 눈치를 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휑한 막사 안에 들어선 뒤, 타티아나는 국방색 담요를 곱게 접어 스칼렛 쪽으로 내밀었다. 방석을 대신할 만한 게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칼렛이 주춤주춤 그 위에 앉자 타티아나는 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너무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을까? 스칼렛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우물쭈물하는 눈동자엔 민망함이 가득했고, 옅은 책망도 엿보였다.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구냐는 항의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직도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자벨이나 케이를 상대로는 금방 풀었지만, 스칼렛과는 그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미리 귀띔 한 번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타티아나가 용건을 말하라는 듯 무심하면서도 사무적인 눈빛을 보내자, 스칼렛은 시무룩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잠시 뒤,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어수룩한 척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물 한 잔만…….”
“…….”
타티아나는 애쓴다는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정말 더럽게 안 어울렸다.
그러나 그 노력이 가상하여 그냥 피식 웃어 주고 말았다.
스칼렛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화내지 말라며, 그런데 목은 진짜 마르다고, 여기 왜 이렇게 머냐고 말하며 타티아나의 팔에 찰싹 엉겨 붙었다.
“직접 떠다 드셔요, 공주님.”
“어디? 연못이라도 있어? 타티아나도 마실래? 내가 떠다 줄게.”
스칼렛은 진짜 막사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조금 걸어 나가면 연못이 있긴 했지만, 타티아나는 아직 해체하지 못한 일곱 개의 부비트랩을 떠올렸다.
하아, 왕족 살해죄. 그럴 순 없지.
그녀는 한숨을 쉬며 스칼렛에게 잡힌 팔을 흔들었다.
“……막사 뒤에 물통 있어요. 제가 갖다 드릴 테니까 이것 좀 놔줘요.”
타티아나가 물통을 가져와 컵에 따르는 사이, 스칼렛은 변명과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찡찡거렸다.
자기도 감찰 대원이 조사할 예정이라는 것만 알았다며, 올케도 기드언이 공작을 싫어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냐며.
근데 사실은 나도 기드언이 무섭다는 고백까지.
“전하가 왜 무서워요.”
“……응?”
“무서울 것까진 없잖아요.”
“어?”
“…….”
“아니, 뭐, 같이 사는 올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인데.”
스칼렛은 얘가 지금 진심인 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블룸은 블룸이지 싶었다. 참으로 대담했다.
타티아나는 스칼렛의 사과와 투정을 한참이나 더 들어 주다가 어둑어둑한 바깥을 내다보았다.
자신이야 집을 나왔다지만, 스칼렛에겐 그녀를 기다리는 곰 같은 남편이 있었다. 게다가 밤 기온이 공주에겐 너무 차갑지 않나 싶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근데 공주 전하, 진짜 왜 오셨어요? 부군께서 기다리실 텐데 이제 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스칼렛은 자기를 쫓아낸다고 생각했는지 타티아나의 말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타티아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미인이 매달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아까부터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려 했던 것이다.
공주는 왜 자기 남편 놔두고 유부녀 마음을 흔드는 걸까?
“있지, 타티아나. 나 뭐 좀 가지고 왔어. 여기 타티아나 집이잖아, 맞지?”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비록 누추하긴 했으나, 집이라고 인정해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칼렛은 품을 뒤적뒤적하더니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내 놓았다.
“남의 집에 올 땐 선물을 들고 오는 게 예의지.”
“이게 뭔데요?”
“우리, 같이 손톱 꾸미고 놀자.”
스칼렛은 쾌활하게 말했으나 타티아나의 표정은 떨떠름해졌다.
남매가 양쪽 다 선물 고르는 센스가 별로이지 싶어서였다.
얼마 전 기드언은 부관을 통해 마력도 없는 사람에게 마력석을 보내왔다.
누굴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저의가 뭐람.
그런데 뚱한 기분으로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마력석에는 하자가 있었다. 누가 쓰다 내팽개치기라도 한 것처럼 흠집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분개한 게 며칠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누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손톱을 꾸미고 놀자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인조 손톱을 붙이거나 그 위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러나 이는 타티아나에게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싫어해서가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격파술을 1, 2시간만 연마하면 다 깨지고 날아가서 안 하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니까.
“전하만 하세요.”
“어? 왜? ……싫어?”
“그게 아니라 운동할 때 망가져요. 애써 했는데 망치면 좀 그렇잖아요. 보석도 아깝고.”
시무룩해하던 스칼렛은 그 말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냐! 이건 다른 거야.”
공주는 다시금 신이 나서 비단 주머니를 풀어헤쳤다.
그녀가 그 안에서 꺼내 놓은 건 인조 손톱이나 색유리, 보석들이 아니었다. 여러 송이의 어여쁜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