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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9)화 (62/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

타티아나는 뜻밖이란 표정으로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보석이 아니었네?’ 중얼거리자 스칼렛의 눈은 새초롬해졌다. 약간은 으스대는 것 같기도 했다.

“난 어릴 때부터 인형 놀이가 취미였던 사람이야. 근데 그거 알아? 인형들도 전부 다 다르게 생겼다?”

“…….”

“사람은 훨씬 더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올케가 손톱에 장신구를 안 다는 것 정도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고객 맞춤형으로 준비해 왔노라고, 스칼렛은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였다.

그들은 꽃을 빻아 손톱을 물들이기 위해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찾아왔다.

스칼렛은 짓찧는 것도 함께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타티아나는 공주에게 험한 일을 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래. 이런 건 운동한 내가 해야지.’

타티아나는 힘차게 돌을 내리치며 꽃과 잎사귀를 으깼다.

그러다 구경하던 스칼렛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타티아나, 꽃을 빻아야지, 돌멩이를 부수면 어떡해. 세상에, 돌조각 튀는 것 좀 봐.”

“……하아, 잔소리. 내가 이러려고 운동을 했나?”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사람은 헝겊 조각과 무명실을 이용해 서로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꽃을 싸맸다.

타티아나는 꼼꼼하게 해 주고 싶어서 심혈을 기울였지만, 공주는 또 한 소리 했다.

“타티아나.”

“네?”

“나,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은데.”

“……하아, 공주님, 대충 넘어가지, 피곤해, 진짜.”

“뭐?”

“……손 내 봐요. 다시 해 줄게.”

익숙한 일이 아니라서 우당탕탕 하는 기분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처음 해 보는 놀이가 꽤 재미있었다.

어릴 때도 못 해 본 아기자기한 소꿉놀이를 다 커서, 그것도 공주님과 함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하, 이거 나중에 다 물들면 무슨 색 돼요?”

“글쎄. 아마 주홍색?”

“그럼 공주 전하 머리카락 색이랑 비슷하겠네요.”

타티아나는 기대된다는 듯 손을 쫙 펴며 앞뒤로 돌려 보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스칼렛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도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타티아나는 괜히 뭔가를 들킨 것 같아 멋쩍어하면서도 선선히 인정했다.

“저도 예쁜 거 좋아해요. 누가 이렇게 꾸며 주는 것도 좋고.”

“…….”

“왜요. 저랑은 좀 안 어울리는 취미예요?”

“아니, 아니. 안 어울리는 게 어디 있니. 좋아하면 그냥 하는 거지.”

스칼렛은 다음에도 내가 해 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타티아나는 솔직히 좀 의문이었다.

‘이거 돌로 으깨고 손톱 싸매는 것까지 죄다 내가 한 것 같은데……. 공주 전하는 그냥 꽃만 가져오신 것 같은데…….’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함께 하자며 꽃송이를 들고 온 그 성의 아니겠는가?

타티아나는 스칼렛이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 위해 용기를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윗사람이자 공주인데도 먼저 와서 화해를 청했다.

고작 사과 하나 하는데 공주이고, 손윗사람인 게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신분과 나이를 방패 삼아 사과에 인색하게 구는 사람들도 많다.

타티아나는 스칼렛에게 호의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스칼렛은 눈동자를 굴리다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나한테 화 다 풀린 거지?”

“…….”

“……아직도 화났어?”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주 전하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죄는 제 양부가 지었다면서요.”

“…….”

“근데 상황이 좀 야속하긴 하네요. 기드언 전하는 훨씬 더 야속하고.”

타티아나는 무심결에 원망을 털어놓았다가 흠칫하며 남편의 편을 경계하듯 눈을 흘겼다.

“왜요. 전하도 제가 혈육 탓하니까 기분 나쁘세요?”

하지만 스칼렛은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전혀? 내가 왜? 기드언은 얼마든지 욕해도 돼. 나만 욕하지 말아 줘.”

“뭐야, 그게.”

“진짜야. 나 친구 생겨서 요즘 엄청 신났었단 말이야.”

그건 타티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공감의 의미로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의아하기도 했다.

공주 같은 사람이 친구 하나에 연연하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녀 주변에는 그녀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전하는 친구 많잖아요.”

“내가 무슨 친구가 많니. 물론 공주니까 비위 맞춰 주는 사람들은 많지.”

“…….”

타티아나는 호오, 하며 감탄사를 흘렸다.

되게 해맑아 보이다가도 이럴 때는 공주와 기드언과 한 핏줄이구나, 느끼게 된다.

자기 인식이 너무 냉철하고 객관적이었다.

타티아나가 눈치만 볼 뿐 부정하지 않자, 스칼렛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며, 주섬주섬 담요를 끌어다가 몸에 덮었다.

“나 말이야. 결혼하고 몇 년간은 로버트랑 풀만에 가서 살았거든.”

“네, 알아요.”

“내가 여기서는 공주지만, 그 나라 사람들한테까지 공주인 건 아니잖아. 오히려 발터 왕족이라는 것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 나도 그런 거 속으로 다 느낀다?”

“…….”

“솔직히 그때 너무 외로웠어…….”

스칼렛은 담요를 턱 끝까지 끌어 올리며 웅얼거렸고, 타티아나는 결국 스칼렛을 따라 옆에 누웠다.

얘기가 정말로 길어지겠구나, 하는 직감 때문이었다.

타티아나가 같이 눕자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리던 스칼렛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파티에서 겪었던 황당한 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속 시원하게 복수해 줬던 일,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던 문화.

주제는 참으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흘러 흘러 고부 갈등에까지 다다르자, 타티아나는 내가 이런 가정사까지 알아도 되는 건가 의아해졌다.

그런데 듣다 보니 브라우닝 경은 고부 갈등 때문에 하소연하는 공주에게 해결책이랍시고 이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앞에서만 ‘네, 네’ 하고 뒤에서는 그냥 안 하면 되지 않냐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라고.

타티아나의 표정은 서서히 떨떠름해졌다.

아니, 공감과 위로를 바라는 사람한테 저딴 것도 해결책이라고. 당신 하나 믿고 타지 생활하는 아내한테.

하지만 친구가 남편이나 애인 욕을 할 때, 편을 들어준답시고 같이 욕을 하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

한참 동안 고심하던 타티아나는 말했다.

“그것참 아주 외교적이고 두루뭉술한 태도로군요.”

“그렇지? 로버트는 외교관 아들인 게 이렇게 한 번씩 티가 난다니까? 이 사람도 옳고, 저 사람도 옳대.”

스칼렛은 키득거렸고, 타티아나는 본인이 이 위기를 무난하게 넘긴 것 같아 몹시 흡족했다.

그러나 스칼렛의 표정은 점차 씁쓸해졌다.

“어머님이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나도 자존심이 센 편이라 뻣뻣하게 굴었거든. 아마 속으로 나 되게 얄미우셨을 거야.”

“…….”

“근데 있지. 어머님이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 결혼한 지 3년 만에.”

“……아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스칼렛은 고맙다는 듯 눈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님 취미가 그림 그리는 거였거든. 나중에 로버트랑 유품을 정리하는데, 세상에. 작업실에 내 초상화가 있는 거 있지?”

“…….”

“난 화폭 앞에 선 적도 없고, 따로 얘길 들은 적도 없거든. 그냥 생각날 때마다 화실에서 조금씩 그리셨나 봐. 그런데 타티아나. 그 그림 제목이 뭐였는지 아니?”

“…….”

“‘우리 예쁜 며느리’였어.”

스칼렛은 지나고 보니 너무나 후회가 된다고 했다.

같이 할 시간이 고작 3년밖에 없는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마음을 열었을 텐데.

쓸데없이 머리나 굴리면서 자존심을 내세웠다고.

그런데 어머님은 그 앙큼한 속내를 훤히 알면서도 자길 귀엽게 봐준 거라고.

그게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내가 이런저런 일로 나중엔 좀 우울해하니까 로버트가 다시 발터로 돌아오자고 한 거야. 자기 하던 것 다 접어 두고, 관직도 버리고.”

“…….”

“로버트는 나만 행복하면 된대.”

“좋은 남편이네요. 전하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

“그치? 그래서 나도 잘해 주려고.”

남편 자랑을 하며 웃음 짓던 스칼렛은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하는 듯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꿈결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버트를 닮은 예쁜 아기도 낳고 싶은데, 아기가 나한테만 오지 않는다고, 너무 속상하다고.

타티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스칼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속삭였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너무 주제넘은 위로가 아니었나 싶다.

스칼렛은 타티아나보다 연장자였고 결혼 기간도 훨씬 긴데 말이다.

게다가 나중이 되면 엉겁결에 약점을 보였다며 스칼렛이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못 들은 척해 주는 게 나았을 텐데.

그러나 스칼렛은 상냥한 손길이 좋았던 건지 사르르 미소 지을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녀가 곤히 잠들 때까지 그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안에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타티아나는 출입구 쪽으로 목을 길게 빼며 아까부터 우두커니 밖에 서 있는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아내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게 민망했는지 그는 오늘도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에게 아내를 되찾아 주기 위해 잠이 든 스칼렛의 몸을 들어 올렸다.

한데 너무 가뿐히 들어 올려 버렸나? 푸근한 표정으로 웃던 로버트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성큼성큼 걸어 그에게 스칼렛을 인계했다.

로버트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고, 타티아나는 한동안 스칼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겉은 화려하고 자존심도 세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 것 같다.

그게 어쩐지 좀 짠하고 애틋하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저절로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절친한 친구를 시커먼 사내한테 시집보낼 때나 하는 소리였다.

“공주 전하한테 잘 해 주세요…….”

로버트는 빙긋 웃으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비전하.”

타티아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로버트와 스칼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잘 해 주라니, 내가 저 사람한테 참 이상한 말을 했구나, 후회했다.

저 둘은 이미 너무나 잘 살고 있었다.

부부 사이가 저 이상 좋기도 힘든 거였다.

문제는 저 두 사람이 아니라 그녀와 기드언이었다.

로버트의 입에서 너나 잘해, 소리가 안 나온 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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