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
* * *
타티아나는 자신의 막사가 점점 성안의 명소가 되어 간다고 느꼈다.
사무엘 샘슨 경은 얼마 전 찾아와 넌지시 말했다. 기사들이 이곳을 한 번 더 관람하고 싶어 한다고.
‘근데 덫은 그냥 놔두지 그래? 좋은 교보재가 될 거야.’
‘여기가 무슨 체험 학습장이에요?’
타티아나는 앙칼지게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듣고 나니 덫을 그대로 놔두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모친께서 타인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것을 늘 경계하라 하였거늘.
타티아나는 솔직히 남에게 인정받는 게 좋았다.
얼마나 대단한 어른이 되어야 그 인정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가끔은 궁금해진다.
기사들은 종종 대련을 목적으로 막사를 찾아왔다.
타티아나는 그 요청을 전부 다 받아 주었다.
그들 중에는 타티아나보다 뛰어난 이들도 많았고, 배울 점이 뭔가 하나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기사가 되었을까, 입단 시험 때 인생의 모든 운을 다 써 버린 건가, 싶은 사람도 있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아빠를 닮았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대련은 뒷전이고 어느새 교관의 마음이 되어 그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교습소가 커질수록 타티아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기드언이 이 꼴을 기분 좋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뭐가 터져도 진작 터졌어야 하는 것 같은데. 주변이 잠잠한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꺼림칙했다.
‘전에 이혼 얘기를 꺼냈던 게 좀 컸나?’
타티아나가 흙바닥에 앉아 지난 일을 되짚을 때였다.
오늘도 이 체험 학습장에는 어김없이 관람객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이 관람객은 이곳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군용 막사에 관심이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타티아나와도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문객의 정체는 바이칼 왕자였다.
타티아나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호위병에게 마구마구 눈짓했다. 아직 제거하지 못한 부비트랩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호위병은 이를 갈며 나무에서 뛰어 내려왔다.
‘이이……. 저리 꺼지랄 땐 언제고 자기 급할 때만 찾네.’
하지만 바이칼이 이곳에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지는 건 호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는 폐비 정도에 그치겠지만 병사들은 꼼짝없이 교수형이었다.
바이칼 왕자는 호위병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막사 앞까지 도착했고, 타티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칼렛도 그렇고 바이칼도 그렇고, 귀하신 분들이 자꾸만 누추한 곳에 찾아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일부턴 그냥 저 앞에다가 ‘왕족 출입 금지’라고 써 붙여 놓을까 보다.
그런데 갑자기 타티아나의 머릿속에는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 바이칼 왕자를 내 부비트랩으로 보내 버리면…… 기드언 전하가 왕이 되는 거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내조가 아닐까?
너무 잔인한 생각이었나?
타티아나가 무서운 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바이칼은 너무나도 고상한 말씨로 인사를 건네 왔다.
“형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오랜만이에요.”
“뮐러 경의 일은 여러모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타티아나는 맞인사를 하며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그냥 지나가던 차에 들렀습니다.”
“…….”
“형수와 얘기라도 좀 나눠 볼까 해서 말입니다.”
무난한 답변이었으나 타티아나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비록 형수와 시동생 간이기는 하나, 이렇게 담소를 나누어도 괜찮은 사이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러한 의구심을 단 한 문장에 함축적으로 담았다.
“여기 오신 거, 혹시 왕후 폐하도 아시나요?”
하지만 바이칼은 이 물음에 자존심이 약간 상한 모양이었다.
형제간에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썹을 찌푸리자 희한하게도 기드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그걸 제 어머니께도 알려야 합니까?”
타티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겨우 두어 살 차이였지만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시동생을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너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있잖아’라고 말하려던 건 절대…… 그런 감상을 느낄 때가 가끔 있긴 있다.
“아니, 뭐. 걱정이 돼서 여쭤본 거지 다른 뜻은 없었어요.”
“…….”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괜히 혼자 뜨끔한 타티아나는 바이칼에게 앉을 것을 권했고 그는 사양하지 않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타티아나는 스칼렛이 왔을 때처럼 컵에 물을 따랐다.
이 추운 날씨에 왕자한테 냉수를 대접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줄 수 있는 게 정말로 이것뿐이었다.
바이칼은 냉수를 받아 들고 타티아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수 도끼로 패 놓은 장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쌀쌀한데 모닥불도 피우지 않고 계시는 겁니까.”
“……피워 드릴까요?”
“아뇨, 형수님께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순 없지요.”
바이칼은 한없이 깍듯한 태도였다.
타티아나도 이렇게 예의 바른 사람에게는 가시를 세우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나눌 만한 이야기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때 막사 안을 둘러보던 바이칼이 또 한 번 웃었다.
“마법서를 보고 계셨나 봅니다.”
낮에 뒹굴뒹굴하며 읽던 책들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타티아나는 혼자만의 취미를 들킨 기분에 다소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바이칼은 그게 흥미로워 보였는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마 전, 엔야 블룸 부인의 저서를 경매에 내놓으셨단 얘기는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정말요?”
“예, 왕립 도서관에도 필사본이 한 권 있죠.”
타티아나는 아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의아해졌다.
대마법사가 쉬운 말로 풀어 썼다고는 하지만, 마법서란 일반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본인이 평생 써 볼 일 없는 마법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건 보통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또 있었다.
타티아나는 엄마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문자로 쓰인 책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마법서인지는…… 어떻게 아셨죠?”
타티아나는 본인이 말하면서 점점 등골이 오싹해졌다.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나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 허무했다.
바이칼은 펼쳐진 책장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환영 마법진 아닌가요.”
타티아나는 어? 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마법을 좀…… 아시네요?”
“예. 사실은 저도 마력을 갖고 있거든요.”
“…….”
바이칼은 눈을 접으며 잔잔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몹시도 온순한 미소였지만, 타티아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발터의 2왕자에게 마력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처음 알았다.
관심사가 온통 검술과 마법뿐인 타티아나가 몰랐다면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이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검술계도 그러하지만 마법계도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검술계보다 마법계 쪽이 훨씬 심각했다.
이 나라 마탑은 마법에 대한 거의 모든 자원을 독식한다.
마력석이 나는 광산, 누적된 지식, 어린 인재들, 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기성 마법사들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는 고작 200여 명뿐이었다.
마력을 갖고 태어나는 이가 애초부터 드물기도 하지만, 양성 과정에서 그들 대부분이 탈락하기 때문이다.
고작 환영 나비 한 마리 날려 보겠다고 본인의 평생을 갖다 바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젊음을 다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물 몇 방울뿐이라면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지 않나.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되는 사람은 마탑에서도 짐 싸서 집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일단 테스트는 해 보아야 그 그릇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거였다.
마탑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 인재들을 발굴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분명했다.
‘왜 마탑에서 여태껏 아무 얘기가 없었지?’
바이칼이 왕족이기 때문인가?
평생을 연구에 헌신해야 하는 마법사의 삶과 왕좌는 양립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타티아나가 계속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자, 바이칼은 뜻밖에도 이렇게 물어 왔다.
“보여 드릴까요?”
“……정말요?”
“예, 그런데 이걸 마력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보여 주세요!”
타티아나는 자신이 너무 덥석 물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거였다.
마법사는 존재 자체로 진귀하여 어딜 가든 대접을 받았다.
대마법사의 딸인 그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좀처럼 마법을 보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내자 바이칼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 마치 그녀를 떠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 질문을 해 왔다.
“그럼 그 대가로 형수님께서는 저에게 뭘 해 주시겠습니까?”
“……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경계를 풀고 있던 타티아나는 눈앞의 남자가 남편의 정치적 경쟁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녀는 주먹과 어깨에 빳빳하게 힘을 주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제안을 한다면, 저 부비트랩에다 확 밀어 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농담입니다. 나중에 대마법사님 얘기나 해 주십시오.”
“……엄마요?”
“예, 부끄럽지만 책도 가끔씩 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게 마법을 보여 주는 대가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대마법사의 딸답게 엄마의 암호문 말고도 마법 서적이 꽤 많았다.
검에도 잘 안 쓰는 돈을 여기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곤 했다.
검은 일이고, 마법은 취미니까.
취미 생활은 자고로 돈 쓰는 맛에 하는 것이다.
타티아나가 걱정일랑 붙들어 매고 얼른 보여 달라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바이칼은 웃으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타티아나가 ‘불 피워 드릴까요?’ 물었던 그 장작더미였다.
“불, 온기.”
그리고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두 손을 고이 모으면서도 고개를 약간, 아주 약간 갸우뚱했다.
주문이 좀 더 길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법이란 건 정신 집중이자 염원의 투사이다. 함축적인 것도 좋지만, 본인의 소망을 담을 재료들이 연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려운 마법일수록 주문이 장황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묘한 의구심은 점차 현실화되었다.
한 10분쯤 기다렸을까. 타티아나는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마력의 본질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정말 인간 편의를 위한 게 맞나?’
타티아나는 애당초 말이 나왔을 때 그냥 직접 모닥불을 피워 버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부싯돌과 나이프 하나만 있으면 그녀는 3초 안에 불씨를 만들 수 있었다. 굳이 마력 따위가 없어도 저 장작을 활활 불태울 수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꾹 참고 바이칼 왕자의 마법이 성공하기만을 기다렸다.
상호 간의 민망한 상황을 피해 가기 위해서라도 이건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그 뒤로 대체 얼마나 더 기다린 걸까. 인내심이 좋다고 자부하는 타티아나에게도 긴 시간이었으나, 마침내 불씨는 피어오르고야 말았다.
하지만 너무나 자그마했다.
타티아나는 그 위태로운 불씨를 살리기 위해 장작 앞으로 뛰어갔으나, 하필 그때 겨울 초입의 칼바람이 불어왔다.
손톱만 했던 불씨는 푸시시 하며 허무하게 꺼져 버렸다.
타티아나는 장작과 바이칼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형수님, 혹시 웃으시는 겁니까?”
“……아니요? 누가요? 절대 아닌데요?”
이럴 때 웃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배려심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타티아나는 안간힘을 다해 참았으나,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
“으흑, 죄송해요.”
타티아나는 혼자 빵 터져서 결국 흐느끼며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