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1)
* * *
바이칼 왕자는 타티아나의 막사에 며칠 내리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녀는 심약하고 온순하게만 보였던 시동생에게서 의외의 심지를 발견했다.
이렇게까지 꾸준하게 찾아오리라곤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그런 바이칼에게 처음에는 몹시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고심해서 고른 책도 선물했고, 어렸을 때 어머니와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바이칼은 그게 뭐, 정말 대단한 이야기인 것처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타티아나는 난처함을 느꼈다.
이제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솔직하게 얘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너희 형이 너 여기 오는 거 싫어해.’
물론 그렇게 직설적인 화법을 쓰기에는 아직도 거리감이 있어, 그녀는 뜸을 들였다.
“저기요, 2왕자 전하.”
“예, 형수님.”
“낮에 와요, 낮에.”
우리 좀 이상해 보여.
이건 남편만 예민하다고 탓할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어떤 자극적인 소설을 써 댈지 예상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비가 양부를 잃은 배신감에 노선을 바꿔 타기로 했다는 말이 돌면 기드언도 곤란해질 게 틀림없었다.
사실 우리는 그냥 마법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솔직하게 해명하면 끝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중 한 명은 마력이 전혀 없었다. 또 나머지 한 명은…… 음.
저것도 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냥 없는 거다.
이 상황을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마 다들 웃겠지? 웃는 게 아니라 비웃겠지.’
타티아나는 바이칼이 그런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도 가끔씩 비슷한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넌 이걸 대체 어디에다 쓸 거니. 너도 야영하면서 불 피울 거야? 그게 정말 네 최종 목표냐고. 너 이대로라면 쉰은 넘어야 그 불 쬘 수 있어.’
사실 이 상황은 그녀가 언제부턴가 빠져 있는 이상한 의문과 닮아 있다.
친위대원의 삶을 꿈꾸었으나, 마을 자경단원으로 생을 마감한 노인들.
그들은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검을 쥘까?
혹시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과 기회비용을 엉뚱한 곳에 써 버렸다고 후회하진 않나.
타티아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연민, 씁쓸함, 동질감, 오기를 느끼곤 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겁부터 주고 싶진 않았다.
이건 애초에 안 될 일이라든가, 네 한계가, 네 마력이 딱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 친절하게 선을 그어 주고 싶지 않다.
뮐러 가에 있을 적, 공작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설파하려던 건 무엇이었나.
네가 검사로서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이게 다라는 것이었다.
여검사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딱 이 정도라고.
그녀는 그 말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때로는 수긍했으며 또 때로는 반감을 가졌다.
하지만 동시에, 친어머니의 말에도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어른에게도 힘들단다. 그러니 네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해라. 남에게 추앙받는 걸 네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 마라.’
이런 이상적인 신념을 갖기에는, 타인에게 그런 말을 해 주기에는 타티아나도 살아온 인생이 짧고 자격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패를 피해 가는 것도 사실은 대단한 요행이다.
안 될 일에 허비하다가 흘러가 버린 젊음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타티아나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제대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일한 자랑으로 삼고 살아가는 어른아이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건 단 한 번도 제대로 부딪혀 본 적이 없다는 방증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기력과 비겁한 삶의 태도를 현실감각이라는 미명 아래 감출 생각 없다.
그게 정말 뛰어난 현실감각이었는지, 단순히 실패 앞에 겁먹어서였는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이 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어둑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머쓱해하고 있는 바이칼 왕자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늦은 시각이라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도 왕후의 간섭을 피하고자 일부러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일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한동안 착잡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그걸 남이 뭐 어떡할 거냐,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을 그녀가 모르는 게 아니라서.
“불꽃을 만들 땐 마력이 여기, 여기, 여기를 통과한다고 해요.”
타티아나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턱, 턱 짚다가 에이, 모르겠다, 하며 바이칼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몸을 짚어 가며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혹시 실례가 될까 봐 검지도 아니고, 새끼손가락으로 소심하게 짚었다.
“그리고 이 지점 지점을 통과하는 마력의 양은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또 다르댔어요. 이것까진 내가 못 도와주는 거 알죠.”
물론 그 적정량을 계산하는 수식이 있다.
하나 최초 투입량을 결정하는 건 마법사 본인이다.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낼 것인가도 결국, 그때 판가름 나는 것이다.
숙달된 마법사는 수식의 도움 없이도 마력을 운용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을 정확히 안다.
왜? 너무 여러 번 해 보았으니까.
반면 초심자는 이게 어렵다. 스승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릴 적 타티아나는 자기 몸만 한 검을 겁도 없이 덜컥덜컥 집어 들었으나, 아버지와 주위 기사들은 늘 만류하곤 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러다 어깨가 망가지면 너는 더 성장할 수 없다고.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본인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바이칼이 아무리 주문을 읊어 대도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타티아나는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걸 운동과 비슷한 원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무게로 시작해서, 조금씩 증량해 보라고.
‘우선은 그 미묘한 차이를 몸으로 느껴야 해.’
익숙해지기도 전에 조바심과 욕심을 내선 안 되었다.
충분히 실패한 뒤에 지금의 무게가 우습게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다음 단계를 밟을 때였다.
하지만 이런 건…….
‘지루하지. 그런데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사실은 지겨운 거라고. 남들 앞에서 빛나는 건 아주 잠깐. 나머지는 전부 인내의 연속이야.’
한데 그녀는 갑자기 이러한 의문이 들었다.
장작을 태우지 못하고 매번 꺼져 버리는 바이칼의 불꽃.
혹시 그는 너무 조심스러워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과감히 좀 해 봐요!’라는 식의 무책임한 조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바이칼 왕자가 폭주하는 마력 때문에 각혈이라도 한다면…….
이 경우에도 그녀는 꼼짝없이 왕족 상해죄였다.
요즘따라 자꾸만 이런 걱정이 드는 걸 보면, 언젠가 한 명은 그녀 손으로 보내 버릴 운명인 건가 생각하게 된다.
타티아나는 그런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는 대신, 안전한 조언을 해 주는 쪽을 택했다.
“주문을 좀 길게 해 보는 건 어때요.”
“더 길게요?”
“네, 기성 마법사들의 주문을 그대로 모방해도 좋아요.”
마법사들이 괜히 멋있어 보이려고 주문을 거창하게 외는 게 아니었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 자신의 염원을 담는 것이다.
불, 온기, 이런 외마디로 장작을 태울 수 있는 건 대마법사쯤은 되어야 가능했다.
심지어 그 대마법사도…….
‘우리 엄마도 과자 집 만들 때는 20분 동안 주문만 외우고 있었어.’
하지만 사람이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타티아나의 어머니도 전날 아버지와 싸웠을 때는 과자 집을 만들려다 지붕에 불을 냈다.
불필요한 잡념이 끼어들어서라고 했다.
그때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황당하기만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비로소 어머니가 이해된다.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부부 싸움은 인간 정서에 정말로 해로운 거였다.
타티아나는 괜히 흠, 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단어는 그릇이 돼요. 의지를 담는다, 이런 추상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직 마탑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긴 한데 마력에 적합한 울림소리들이 있다더라고요.”
“……아아.”
“이름난 마법사들의 주문을 모아 보면 그렇대요.”
역시 잘난 인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사례 수집에 취미가 있는 타티아나가 비교해 본 바, 다들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그럴 능력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새로운 걸 고안할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소수에게만 있다.
“그러니까 일단은 남이 해 놓은 걸 한 번씩 다 따라 해 봐요. 본인한테 맞는 방법은 그다음에 찾고. 뭐, 전하의 경우엔 불꽃이 가장 크게 생성되는 주문이 맞는 거겠죠.”
타티아나는 자신이 암기하고 있는 주문과 그에 따른 계산식을 종이 위에 적었다. 바이칼 왕자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일필휘지로 종이를 빽빽이 채워 가자 왕자의 눈에는 감탄이 어렸다.
“형수님은 이런 걸 어떻게 다 외우고 계십니까.”
타티아나는 픽 웃으며 약간은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근데 읽을 책이 마법서밖에 없는 집에서 자라면 보통은 이렇게 될 거예요.”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
“정말로 대단한 겁니다. 좀 더 자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네요.”
세상에는 남의 노력과 성취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많다. 그에 비해 저건 얼마나 다감한 말인가.
그녀도 불과 몇 분 전 바이칼을 보며 ‘근데 그거 어디에 쓰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막말로 바이칼은 이 주문으로 모닥불이라도 피울 수 있지, 그녀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한데 바이칼은 타티아나가 건넨 쪽지에 생각보다 많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형수님, 제가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찾아와도 됩니까?”
“…….”
“여쭙고 싶은 게 있을 때만 오겠습니다.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타티아나는 ‘으음’ 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비싸게 굴려는 건 아니고, 갑자기 오랜 의문 하나가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있잖아요. 제가 예전부터 참 궁금한 게 있었는데…….”
“예. 말씀하십시오.”
“물에 못 뜨는 사람이 남한테 수영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수영 못 하십니까?”
아니,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너, 고작 그런 이해력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겠어?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머리가 엄청 좋단 말이야.
사실 그 사람들은 꼭 마법이 아니어도 뭐로든 대성했을 거야. 영리한데 다들 독하기까지 하다고.
타티아나는 혀를 찼으나, 다행히 바이칼은 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비유에 농담으로 응해 준 것뿐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참에 한번 도전해 보시죠. 제가 그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형수님 실험에 동참해 드리겠습니다.”
“…….”
어머, 이게 누구야. 얘도 아인슬러네?
말을 몇 번 섞고 나니까 숫기 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약간 유들거리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는 푸흐, 웃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낮에 와요, 낮에. 되도록 공적인 일정을 활용해 주면 더 좋고.”
“…….”
“안 그러면 남편이 싫어해.”
바이칼은 말없이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기드언 성격을 동생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