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3)
* * *
이자벨은 타티아나의 상처를 소독하며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부디 잘 아물어야 할 텐데요.”
흉터가 남으면 어쩌나.
다행히 왕자비는 머리칼도 눈썹도 풍성했다. 사실 모발로만 치면 발터에서 제일 부자였다.
새살이 돋고 나면 간혹 주변에 모(毛)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지만, 시녀들은 화장술의 대가였다.
눈썹 정도야 얼마든지 그려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예쁜 얼굴에 조금이라도 흉이 진다면 그 자체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자벨은 애가 탔다.
수석 시녀의 이러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티아나는 아침부터 속 편한 소리를 했다.
“흉터는 안 남을 것 같지만, 혹시 남아도 어쩔 수 없지.”
“…….”
“눈썹 사이에 스크래치 하나 지나가면 엄청난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너스레일 뿐, 타티아나도 기왕이면 상처가 잘 아물기를 바란다.
당시에는 꽤 놀라기도 했다. 그녀도 목숨 귀한 거 아는 사람이었고, 부상이 두려웠으니까.
칼날이 얼굴로 튀면 아무리 대담한 사람일지라도 간담 정도는 서늘해지는 게 당연했다.
다만 타티아나는 이 상황을 별것 아닌 것처럼 포장해야 할 필요성도 함께 느꼈을 뿐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사고 피해자가 아니었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타티아나의 지분도 상당했다.
사실 시작은 그녀가 먼저 했다.
하지만 왕자비와 호위라는 특수 관계 탓에 이러한 사건 정황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케이에게 잘못을 돌렸고, 기드언이 특히 그러고 있었다.
“방금 그 말씀은…… 기드언 전하 앞에선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하, 그날 화 많이 나셨지?”
“예, 엄청 노하셨답니다.”
이자벨도 어제 오후 집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좀 캐물어 볼라치면 왕자의 부관들이 말도 꺼내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린 시종 하나를 끈질기게 추궁하여 다소 ‘과격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 정도만 간신히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몸의 대화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사실 이자벨은 왕자가 케이를 살려 둔 게 훨씬 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왕자 진영에는 그만큼 중요한 전력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신뢰하니 그 성격에 자기 아내 곁에 붙박이로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일이 이 정도로 마무리된 듯하니 다행이라며, 이자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남은 건 왕자비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옆에서 잘 관리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소독약으로 상처 부위를 마저 닦아 내고는 그 자리에 손톱만 하게 붕대를 오려 붙였다.
타티아나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척 하나가 자취를 감추었음을 눈치챘다.
하루 종일 케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특유의 발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케이는 기드언의 심복이라, 그녀의 호위만 전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도맡아 하는 임무가 많다는 것쯤은 타티아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일어났던 일의 여파일까. 그녀는 이상한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혹시 케이가 어디 지하 감옥에 갇히기라도 한 건 아닌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련장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의혹이 얼추 들어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맨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누구……?”
“막스 도어입니다. 제가 오늘부터 비전하의 호위와 대련 상대로 배정되었습니다.”
“…….”
그녀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검사로서의 본능을 어쩌지 못했다.
상대의 어깨, 삼두근, 대퇴부터 스윽 훑어보았던 것이다.
응, 합격.
그러나 그녀는 곧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물었다.
“전에 있던 사람은 어디 갔는데?”
“송구하오나 거기까지는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이쯤 되니 케이가 정말로 염려스러워진다.
그러나 타티아나를 마주한 검사는 어느새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저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 동경, 약간의 의심, 승부욕.
호위로서는 대단히 부적절한 눈빛일지 모르나 타티아나는 솔직히 그를 이해했다.
저건 검사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호승심이었으며 본능이었다.
타티아나는 묘연해진 케이의 행방 때문에 찝찝해하면서도 검을 뽑았다.
복잡한 일은 미뤄 두고 일단은 몸부터 가볍게 풀자는 생각이었다.
타티아나는 들어오라는 듯 검지와 중지를 까딱였다.
사내는 ‘감사합니다!’ 외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고, 곧바로 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챙, 채챙, 챙.
딱 세 합을 주고받은 뒤였다.
타티아나는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검 끝을 아래로 내리며 기드언의 집무실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혹시 지금…… 나, 무시하나?’
후임자를 붙여 주려면 전임자와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 줘야 할 게 아닌가? 지금 나보고 대련을 하라는 건지, 아니면 이 사람을 가르치라는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케이를 걱정하던 그녀는 분개하고 말았다.
그건 이 인사에 관여한 부관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였다.
왕자비가 대련을 하다 말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자, 막스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타티아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시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 뒤로는 아주 일방적인 승부였다.
케이의 임시 후임자는 그렇게 신세계인지, 지옥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찔한 대련을 맛보고 말았다.
기드언의 집무실로 향하며 타티아나는 어떤 말들을 꺼내야 할지 고심했다.
우선은 케이의 행방과 안위를 확인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그들은 대련을 했을 뿐이고, 어제 일어난 건 우연한 사고다. 게다가 어디 가서 다쳤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처였다.
절대 누굴 죽이네, 마네 할 일은 아닌데…….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남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고충이었다.
타티아나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마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하아, 스트레스……. 이 만병의 근원…….”
그러자 집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들은 흠칫거렸다.
그중에는 일전에 타티아나가 목이든 손목이든 아무거나 하나 걸라고 말했던 병사도 있었다.
타티아나는 콕 집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오늘도 들어가면 안 되니?”
경비병도 그날의 오싹했던 대화를 떠올린 것일까? 예전과는 달리 대답이 나오는 속도가 전광석화였다.
“아닙니다! 혹여 비전하께서 오시면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타티아나는 그럼 얼른 아뢰지 않고 뭐하냐는 듯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한때는 넘기 힘든 문턱이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조로운 절차였다.
혹시 안에 있던 이가 그녀를 기다린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실제로 기드언은 이쯤이면 타티아나가 따지러 올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다.
뭘 따져 물을지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상황을 노린 것도 없잖아 있다.
오히려 그녀는 기드언의 예상보다 좀 늦게 찾아온 감이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오랜만에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청해 보았을 텐데.
기드언은 다소 아쉽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책상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소파를 권하며 물었다.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식사는커녕 차 한 잔도 같이 마시기 싫은 건가?
그러고 보면 뮐러 공작 사후로는 그녀와 뭘 같이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길일을 핑계 삼아 침실에나 몇 번 비집고 들어갔을 뿐이지.
요즘은 그녀가 밖에다 자신만의 기지를 꾸린 탓에 그마저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조금 더 활용해서 부부 관계를 개선하는 국면으로 삼아도 좋을 텐데.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속상했던 마음을 요령껏 풀어 주면서 말이다.
문제는 기드언도 성격이 좀 있는 사람인 데다, 타티아나의 일에는 심하게 진심이 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어쩔 수 없이 언짢아지고 말았다.
반창고를 보고 있으니 가식적인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왜 다쳐도 하필 저렇게 눈에 띄는 곳을 다쳐서…….’
기드언은 한숨을 쉬고는 벽 모서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가 눈조차도 마주치려 들지 않자 타티아나는 의아해졌다.
왜 저러나 싶어 테이블을 톡 치며 주의를 끌어 보았지만, 눈썹만 찌푸릴 뿐 그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게 지금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태도인가?
타티아나는 결국 대놓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뭐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러자 기드언도 자기가 지금 왜 이러는고 있는지 툭 터놓고 대답해 주었다.
“상처 난 곳을 보니 잠깐 성질이 나서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
“비한테 화도 안 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타티아나는 지금 자신에게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의 답변이 생각지도 못하게 정직하여 웃음이 터질 뻔했던 것이다.
그녀는 잘 참긴 했으나, 겸연쩍은 표정으로 상처 부위를 매만졌다.
사실은 뻘쭘함을 느낀 순간, 이미 이 분위기에 말려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 타티아나를 힐끔 바라본 기드언은 그녀가 눈썹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탁, 하고 쳐 냈다.
타티아나는 왜 갑자기 폭력을 쓰나 싶어 눈을 부릅떴으나, 그는 그녀보다 훨씬 더 무섭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뭐해? 자꾸 손대지 말아요. 덧나잖아.”
“…….”
그녀는 어정쩡하게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밑으로 내렸다.
분명 뭔가를 항의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전투 의지가 맥없이 꺾여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