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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6)화 (68/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4)

상대가 다소 거칠게 화를 낼지라도 그 기저에 염려가 깔려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걸 자각한 순간에는 그 사람과 같이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냥 나 죽었소, 하고 얌전히 혼나고만 있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렇지만 기드언은 여전히 못 미더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거 정말 흉 안 지는 거 맞아요?”

“의사가 관리만 잘하면 그럴 거라잖아요.”

하지만 이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타티아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약간의 밑밥을 깔아 두기로 했다. 혹시 흉이 지더라도 너무 화내거나 상심하진 말라는 의도였다.

“근데 좀 남을 수도 있죠.”

“…….”

“왜요. 흉터 남으면 이제 나 거들떠도 안 볼 거예요? 좀 못나졌다고 폐비시키고 그럴 거 아니잖아요.”

그러나 이건 너무 심한 비약이었다.

어쩌면 기드언이 제일 싫어하는 부분을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몇 년간 숨죽여 기다렸다 겨우 청혼하여 결혼한 남자 앞에서 얼마 전에도 이혼 얘기를 꺼냈다.

기드언은 아까보다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어요.”

“네?”

“입 다물라고 했지.”

그딴 소리 할 거면 그냥 조용히 하라는 거였다.

어지간히 듣기 싫었는지 기드언은 이마저 가는 듯했다.

사실 타티아나도 상처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이 얘기는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한 화제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오늘 이곳에 찾아온 용건도 결국에는 이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케이는 어디 갔어요.”

기드언은 역시 이 화제도 별로 달갑지 않은 듯했다.

타티아나가 이 일로 자신을 찾아올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는 건 유쾌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걱정됩니까? 아직 안 죽였습니다.”

밉살맞은 소리였지만, 타티아나는 큰일은 없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부러 기드언 보란 듯이 휴우, 하고 작위적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즉시 기드언의 한쪽 눈썹이 비뚤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그럼 어디 있는데요. 감옥에라도 가뒀어요?”

“잠시 다른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진실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 온 호위는 놀랍게도 친위대 소속이었다.

친위대라면 일단 거르고 보는 기드언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그 기사는 한때 병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타티아나에게도 낯선 얼굴이었다. 입단한 지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기사임이 분명했다.

기드언 측은 판단했을 것이다.

왕후에게 포섭되기엔 충분하지 않은 기간이라고. 그러니 안심할 수 있겠다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타티아나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기간이 기사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쌓기에도 한없이 부족한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말도 없이 호위를 교체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일개 호위 한 명을 임명할 때도 티티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합니까?”

“케이는 그저 그런 호위 한 명이 아니에요. 알잖아요. 그 사람은…… 좀 달라요.”

그 말은 안 그래도 저조한 기드언의 심기를 긁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그는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벽 모퉁이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저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화를 가라앉히려는 것이다.

기드언은 하, 웃다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자잘한 행동들이 타티아나에게는 평소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후, 기드언은 하늘빛 눈동자를 착 가라앉힌 채 입을 열었다.

“티티는 내가 밉다고 했죠.”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냐고 물었을 때 답하지 않은 적은 있지만.

“밉다고 한 적은…….”

“용서 안 할 거라며. 실망했다고 했잖아.”

기드언은 결국 뮐러 공작의 일로 언성을 높일 때 오갔던 대화를 들먹였다.

타티아나는 열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했던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그러나 너무 감정적이었던 나머지, 유치한 소리를 해 버린 것도 같기도 하다.

기드언은 그녀의 뺨을 손으로 덧그리며 단어 하나, 하나 무척이나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미워하는 건 괜찮아요.”

“…….”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티티가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다른 남자를 특별히 여겨도 된다는 뜻인 건 아닙니다.”

“…….”

“결혼을 했으면 나한테 충실해야지.”

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마치 ‘넌 겨우 그 정도도 못 하겠어?’ 묻고 있는 듯했다.

타티아나는 그의 말뜻을 전부 이해했다.

지금 기드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타티아나의 결혼관과도 일치했다.

다만 타티아나는 케이를 이성으로 특별히 여기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기드언 외의 남자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경험 자체가 전무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그와 사이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그 얘기가 아닌 거 알잖아요. 나는 지금요…….”

“…….”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일종의 재료가 필요한 거예요.”

“…….”

“정체기를 깨 줄 수 있는 자극제 같은 거.”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면서 몸부림쳐 와서.

이 답답한 마음이 당신한테는 보이지 않아?

그녀는 그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유심히 바라보던 기드언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바이칼은.”

“뭐, 그 사람도 비슷해요. 사실 나는…….”

“…….”

“마법도 좋아하니까.”

타티아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힐끔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기드언은 그녀의 말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력이 없는 거 아니었냐며 뻔한 질문을 해 오지도 않았고, 비웃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말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참 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임무를 완수하면 다시 본인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다만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아직 나도 확인해 줄 수 없어요.”

“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어요.”

비록 완벽한 답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타티아나로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케이와 또 검을 맞댈 수만 있다면 그녀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기드언은 그녀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다른 불만까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호위 명단은 다시 검토해서 올리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오늘 온 기사가 티티 성에 안 차는 거죠?”

“아, 네. ……근데 그 사람, 이런 일로 상처받진 않겠죠?”

그러자 기드언은 기가 막혀서 하아, 웃었다.

타티아나는 그녀 수준에 맞는 기사를 구해다 바치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발터 전역을 탈탈 털어도 그녀의 검을 열 수 이상 받아넘길 수 있는 기사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다 큰 사내놈 상처받을 거나 걱정하고 있다니, 내 아내, 진짜 가끔 왜 이럴까.

기드언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상처받든가 말든가.”

“…….”

“그것까진 내 알 바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기사라면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알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왕자가 이제 막 입단한 기사의 마음까지 보듬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한 가지 감상이 피어오르는 걸 막지 못한 채 ‘어후, 저 성격, 어떡하니…….’ 하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기드언은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하며 가소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켰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못 들은 척 옷매무새를 고치고 나갈 채비를 하자, 그의 표정은 오묘해졌다.

“벌써 갑니까?”

“가야죠.”

“…….”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에 기드언의 표정은 더욱 오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더 이상 그녀를 붙잡아 둘 구실이 없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그들은 오늘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낸 것인지 모른다.

타티아나는 검 앞에서만큼은 늘 진솔했다. 그 덕에 대화 또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 번 싸운 뒤로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곤 하는데 오늘은 딱히 그런 것도 없었다.

그녀가 만족스러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분명 그러한데…….

이상하게도 기드언은 가슴 한쪽이 조금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딱히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아님에도 말이다.

타티아나의 머리와 심장은 늘 검으로 가득 차 있어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부족하다.

비록 결혼을 했고, 만인 앞에 내 아내라 공표했으며, 저 몸을 수도 없이 가졌다지만…….

‘저 여자가 정말 내 여자가 된 건가?’

이 단순한 물음 앞에서 그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저이에게서 검을 빼앗지만 않는다면, 저 여자는 본인의 옆자리에 누가 서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 같다고.

꼭 나라서 청혼을 받아 준 건 아니었을 거라고.

그래서일까. 용건을 마치고 후련하게 자리를 뜨는 그녀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자조가 깃들었다.

“티티는 검이 제일 좋죠? 솔직히 그것 말곤 어떻게 되든 다 상관없잖아.”

“…….”

“좋겠어요. 그렇게 푹 빠질 수 있는 분야가 있어서.”

타티아나는 문을 나서려다 말고 멈춰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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