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5)
평소라면 뭐에 갑자기 저렇게 꼬였을까, 다소 황당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그에게로 다가갔다.
기드언의 어조에서 빈정거림보다는 씁쓸함이 묻어나는 걸 느껴서였다.
타티아나가 소파 근처까지 와서도 앉을까 말까 고민하자, 기드언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기왕 다시 오기로 한 거면 이번에는 맞은편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 주었으면 했다.
두 사람의 허벅지는 조금의 틈도 없이 맞닿았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기드언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은근하게 어루만졌다.
타티아나는 옆구리를 훑어내리는 그의 손가락이 좀 야하게 느껴졌다.
옷을 갖추어 입은 채였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꼭 침실에 있는 기분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혹시 아직 따질 게 남았어요? 내 말이 기분 나빠서 도로 온 거예요?”
“뭐라고요?”
“티티는 그런 게 있을 때만 날 찾아오잖아요.”
“…….”
타티아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편 기분이 진짜로 상하긴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도 손길도 다정한데, 말에서 약간 뒤끝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타티아나는 그에게 뭘 더 따지기 위해 다시 온 건 아니었다.
검 말고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뾰족한 물음에 기분이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좀 씁쓰레한 건 사실이었다.
“전하는 제가 좋아 보여요? 검을 들 때 말이에요.”
“…….”
“마냥 행복해 보이냐고.”
그 말에 기드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사람인 이상 늘 즐겁진 않겠지.
무게감과 좌절감에 짓눌릴 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검을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표정에서 이미 답을 읽은 듯 흥, 하고 웃었다.
사실 이건 그녀가 겪고 있는 고충이기도 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주변의 염려와 만류를 물리치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한 발 한 발 걸어 나간다는 건 정말로 근사한 일이다.
거기에 동반되는 엄청난 자부심과 행복감이 있다.
그때는 진짜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명암이 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 경우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투정 부릴 명분이 없다는 거다.
왜?
누가 시킨 게 아니니까.
말린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걸 잘 알면서도 타티아나는 기드언에게 문득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그래도 이 사람은 이걸 좀 이해해 줄 것 같아서.
기혼자들이 배우자에게 갖는 기대란 사실 겨우 이런 것이다.
당신만큼은 나라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해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게 맘처럼 되지 않을 땐 어김없이 실망한다.
그러고 나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 기대심리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든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공감을 바라는 외로운 동물이라서.
둘이 함께 있는데도 감정을 나누지 못하는 건, 혼자일 때보다 더욱 갑갑하고 외로운 일이라서.
“어릴 땐 정말로 즐거웠거든요? 전하는 알잖아요. 나 되게 해맑았던 거.”
“……응.”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아요.”
“…….”
“전 사실 살면서 제 실력에 진심으로 만족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타티아나는 곁눈질로 옆을 힐긋 올려다보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러고는 숨겨져 있던 자괴감과 고독감을 드러냈다.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혹은 내가 그리될 거라고 하지 않았냐고, 그중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혼자 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속마음이었다.
“전하.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게 늘 일치할 순 없겠죠. 그런데요, 그거 너무 괴로운 일인 것 같아요.”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한다.
‘있지. 나는 사실 검을 짝사랑해 온 거야.’
저 날카로운 쇠붙이는 너무나도 냉정하다.
그녀는 인생을 다 갖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아무리 간절하게 두드려도 저이는 원하는 만큼의 답을 돌려주지 않는다.
매번 아쉬움이 남아 목이 마르고, 거지처럼 구걸하게 된다.
그런 시간을 너무 오래 반복한 탓일까. 이제는 가끔 검이 원망스럽고 밉기까지 했다.
“분명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저는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은 걸까요.”
타티아나는 자조하듯 중얼거리다가 조금 창피해지고 말았다.
이건 그녀의 솔직한 진심이었지만, 씩씩하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른스러운 모습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연민에 곧잘 빠지는 건 원래 아이보단 어른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게 꼭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기드언은 이내 뜻 모를 미소를 짓더니 그녀에게 이렇게 답해 주었다.
“그건 티티가…… 검을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어떤 기사들보다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훨씬.
남편에게서 흘러나온 공감의 언어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마음을 좀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저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역시 민망했던 탓일까. 그녀는 약간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러자 기드언은 왜 모르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알죠. 나도 짝사랑해 봤는데.”
“…….”
“원래 너무 좋아하면 상대가 미울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어요.”
“…….”
“그래도 계속 좋아하게 됩니다.”
타티아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순간 그녀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누구를 짝사랑해 왔고, 누구를 계속 좋아하고 있다는 것인지를.
구름이 달빛을 가린 밤이었다.
타티아나는 오랜만에 막사를 떠나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
이제는 건강체인 그녀에게도 밤공기가 한없이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결 포근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되찾았음에도 그녀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이건 몸이 그새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서인가, 아니면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서인가.
그때 침실 밖에서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방문자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사실 이 시간에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비전하, 주무십니까. 기드언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
한데 왜일까. 피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녀는 갑자기 눈을 딱 감고 수면 호흡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낮에 나눈 대화의 여파였을 것이다.
그녀는 기드언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곧바로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직은 해 줄 말들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사실 이런 것은 다 핑계고, 그녀는 그저 쑥스럽고 어색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느니 지레 자는 척을 택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숙련된 검사의 수면 호흡은 완벽에 가까웠다. 일반인은 절대로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드언은 일반인이 아니기에, 그녀는 더욱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유효했는지 기드언은 침대까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걸어왔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모두 죽인 채였다.
타티아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깨울까? 만약 깨운다면 무슨 말을 할까?
혹시 몸을 섞으러 온 것일까. 아니면 그냥 옆에 누워 같이 잠을 청하려 들까.
그런데 기드언은 그중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맡에 서서 타티아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5분이 지났을까. 아니, 10분 정도는 지난 건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기드언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한숨의 무게를 느낀 타티아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 자는 걸 보며 한숨을 쉬는 건 왜일까.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도 요즘 답답한 걸까.’
결혼 생활이 꿈꾸던 것과 너무 다르고, 마음처럼 되지 않아 고되게 느껴지나.
저 사람도…… 힘든 건가.
혹시라도 그렇게 느낀다면 너무나 미안했다.
그녀는 상대를 힘들게 하고 싶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사실 나, 깨어 있었다고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드언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더니 마치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나뒹굴고 있는 그녀의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까지 잘 덮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잠자리를 살피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
타티아나는 그가 나간 방에 홀로 남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드언이 덮어 주었던 이불은 다시 스르륵 허리까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그 이불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고마움 때문에? 감동받아서?
아니. 이건 그것과는 달랐다.
인간인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아주 근원적인 외로움.
그 고독감은 가끔 뼈를 에일 듯한 한기가 되어 사람을 엄습한다.
그런데 그 순간 타티아나는 마치 예감처럼 이러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힘들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내 곁에 끝까지 남아 이불을 덮어 줄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저 사람일 것 같다고.
우리의 사이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마음이 어긋났을 때도, 통했을 때도.
그 작은 예감이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참 슬프게 반짝인다.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그렇지?’
야속하다는 감정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양부의 일을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냐고, 왜 나를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냐고, 불쑥불쑥 원망과 의문이 치솟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타티아나는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솔직하게 말할까.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멀리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불가능했다. 검이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던 것처럼.
사실은 그를 진심으로 너무나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