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
혹한기를 대비하여 타티아나는 자신의 막사를 임시 폐쇄했다.
친위대원들은 일제히 서운한 감정을 표했다.
‘이것 참 아쉽게 됐군.’
‘그러게. 부비트랩이 진화하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샘슨 경에게서 그들의 반응을 전해 들은 타티아나는 분개했다.
그게 누구 재밌으라고 세운 게 아닐 텐데?
그럼 나더러 이 날씨에 밖에서 얼어 죽으라는 건지?
그러나 타티아나는 곧 그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 줄 방법을 강구했다.
접견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접견 장소를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친위대원들과 대련을 하든, 바이칼 왕자와 마법 공부를 하든 공적인 창구를 이용해야만 후탈이 없을 것 같았다.
하나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은 그 두 부류를 제외한다면 여전히 한정적이었다.
스칼렛 공주와 친구들 정도가 다였다.
결혼을 하면 인간관계가 협소해진다더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녀 남편이 무서워서 왕자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오전 무렵 책을 돌려주기 위해 온 바이칼 왕자를 만났고, 그다음에는 스칼렛 공주와 긴 시간 담소를 나누었다.
“전하.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그러엄. 올케는 나한테 열 개도 물어볼 수 있지요.”
공주는 예전부터 타티아나에게 친절했지만, 근래 들어 부쩍 더 친절해졌다.
얼마 전 막사에서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늘어놓은 술주정 같은 하소연을 타티아나가 묵묵히 들어 준 뒤 생긴 일이었다.
“전하는 언제 결혼을 잘했다고 느끼세요?”
“응?”
“질문이 좀 추상적인가? 음, 그렇다면 브라우닝 경한테 감동을 받았을 때라든가…….”
상대가 미워졌다가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 기억.
스칼렛은 아아,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 다니던 감동 사연이 있었나 보다.
“내가 풀만 왕국에 처음 갔을 때,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했잖아.”
“아, 네.”
“근데 로버트가 날 두고 외무 관료들이랑 사냥을 간다는 거야. 4박 5일 일정으로.”
“…….”
“나도 사냥해 봤거든? 사실 그거 그렇게까지 오래갈 필요 없단 말이야.”
……이게 지금 감동 사연이 맞나요?
시작부터 긴박감이 느껴지는 게 이건 분명 부부 싸움 각이었다.
그러나 스칼렛의 이야기는 타티아나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난 사실 혼자 있기 싫었는데, 그래도 겉으론 내색 안 했거든. 내가 그때만 해도 자존심이 좀 셌어. 약간 도도했어.”
“지금보다 더요?”
“응.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타티아나는 의외의 지점에서 로버트를 재평가하게 됐다.
스칼렛은 말 그대로 공주였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이한테는 다 퍼 주지만, 그 높은 콧대만큼은 어디 안 간다는 거다.
그런데 과거엔 지금보다 자존심이 더 셌다니. 그걸 본인 입으로 인정할 정도라니.
브라우닝 경에게도 결코 만만한 신혼 생활은 아니었겠거니, 싶어졌다.
타티아나는 그 생각을 속으로만 간직한 채 공주에게 계속하시라, 손짓했다.
그러자 스칼렛은 지난 일을 회상하듯 으음, 하는 콧소리를 냈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 기분 좋은 한때가 펼쳐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눈빛은 아련하게 반짝였고, 저절로 흘러나온 콧소리는 다정한 노래와도 같았으니까.
“그날 로버트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집사가 차를 한 잔 내오더라고. 로버트가 자기 가면 꼭 주라고 했대.”
“…….”
“별건 아니고 내가 결혼 전에 발터에서 즐겨 마시던 차였어.”
“…….”
“진짜 아무것도 아니지? 근데 차향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눈물이 찔끔 나더라고.”
스칼렛은 그렇게 차를 한 잔 다 마시고 나니 속으로 벼르고 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내가 대체 왜 그렇게 서운해했지? 자기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나 너무 쉽니? 좀 단순한가? 올케는 솔직히 나 이해 잘 안 되지?”
“아뇨. 공주 전하는 절대로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어떤 기분인지 알 것도 같아요.”
“……그래?”
스칼렛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타티아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 타티아나는 남이 소중히 간직했던 감동 사연을 너무나도 건조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말았다.
“원래 사람은 의식주를 건드리면 바로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그중에서도 먹을 걸 특히 빼놓을 수 없어요. 사실 그게 가장 커요.”
“……뭐야, 그게. 그렇게 얘기하니까 되게 동물적이잖아.”
예, 바로 그 얘기입지요.
타티아나는 장난스레 대꾸했고 그제야 농담이라는 걸 알아챈 스칼렛은 그녀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웃어 댔다.
두 사람이 키득대는 소리가 온 방 안에 가득했다.
겨울 초입의 짧은 해가 저물고, 성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타티아나는 마치 한 마리의 승냥이처럼 오늘 밤 몸을 누일 곳을 찾아 성안을 배회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가 택한 잠자리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소였다.
기드언의 개인 침실이었다.
타티아나는 예전에도 그의 사적인 공간에 가 본 적이 있긴 했다.
침대가 있는 곳까지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바로 그 앞에 있는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생각해 보면 따질 것이 있을 때만 자신을 찾아오는 게 아니냐는 기드언의 말도 어느 정도는 맞는 셈이다.
그녀는 그때도 뭔가를 요구하고, 항의하다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으니.
하지만 오늘만큼은 반대 사례를 하나 남겨 줄 생각이다.
그녀는 오늘 밤 다른 용건 없이, 그와 같이 자기 위해 이곳에 왔다.
미리 기별하지 않고 온 탓에 시종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드언에게 그녀의 방문을 알리면서도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쯤 되니 타티아나도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가,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녀는 애써 마음가짐을 가볍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으로 들이라 말하는 기드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티아나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기드언은 침대에서 이제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건장한 상체를 보며 생각했다.
‘혼자 잘 때도 저러고 자는구나.’
결혼 초에는 육체관계를 나누기 위해 던진 농담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는데 그냥 원래부터 갖고 있던 습관이었나 보다.
타티아나가 그의 맨살과 침대를 흘긋거리자, 기드언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다 그녀가 자신의 복장 불량을 지적하는 중이라고 생각한 건지 침의를 찾으며 물었다.
“나가서 얘기할까요?”
“아뇨. 할 얘기 없는데.”
기드언의 고개는 아까보다 급격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럼 왜…….”
“자러 왔어요.”
안 돼?
타티아나는 시큰둥하게 입술을 내밀다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진짜 안 되면 이걸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쫓겨난다면 이건 너무너무 큰 상처였다.
칼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과거가 되고 말 것이다.
밖에는 그 참담한 광경을 지켜볼 목격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럴 순 없지.’
타티아나는 그 전에 먼저 선수를 치겠다는 심정으로 에이, 모르겠다, 하며 그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너도 빨리 누우라고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기드언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그녀가 시키니 선선히 침대에 누워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유를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앵무새처럼 영양가 없는 말만 반복했다.
우리 그냥 자자고. 정말로 같이 자고 싶어서 왔다고.
“…….”
머리 좋고 예민한 남자와 함께 사는 건 피곤하기만 할 것 같지만 좋을 때도 꽤 많다.
그들은 남의 생각을 읽는 데 능해서, 상대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속마음까지 금세 알아채곤 한다.
물론 워낙 눈치가 빠르다 보니 거짓된 말로 속이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게 딱히 단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그에게 감추고 싶은 게 없어서.
그리고 타티아나가 예상한 것처럼 기드언은 정말로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꼭 끌어안았으니까.
기드언은 지금 그녀가 그녀를 괴롭히던 무언가를 내려놓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은 지난 일로 그에게 날을 세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늦은 밤, 그의 방문을 두드린 건 앞으로 이 관계를 더 좋은 방향으로 풀어 보고 싶다는 그녀 나름의 신호였다.
종전 협정까지는 아니겠지만…… 휴전 제의 정도는 될 테지.
그리고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혼자서 수없이 고민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티티, 고마워요.”
타티아나는 머쓱해서 그의 팔뚝에 얼굴을 숨기려다가 눈동자를 힐끔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다 괜찮다는 건 아니에요.”
“압니다. 내가…… 잘할게요.”
“……뭘 어떻게 잘할 건데요.”
“그냥 다요. 다른 거 전부 다.”
그러니까 지난번 그거 하나만 눈 딱 감고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맞춰 주고 원하는 건 전부 다 해 줄 수 있으니.
기드언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고맙다고 다시 한번 속삭였고, 타티아나는 눈을 감으며 그의 팔에 뺨을 문댔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갔다.
비록 바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으나 타티아나는 새로운 잠자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막사보다 따뜻했고, 자세히는 못 봤지만 그녀 침실보다 약간 넓은 것 같다.
사실 방 크기는 아무 관심 없고, 남편이 옆에 있어서, 익숙한 체온이라서 그냥 그게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