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2)
이른 새벽, 눈을 뜬 부부는 서로를 만지작거렸다.
타티아나는 어젯밤 자세히 보지 못한 그의 침실을 제대로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이미 무수히 봐 왔던 그녀의 몸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본래 결혼 생활은 어느 한 사람만 좋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양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협하고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헐벗은 채로 그의 품에 안겨 방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이러면 공평하지, 생각하면서.
기드언의 침실에는 책도 꽤 많았지만, 그보다는 서류 뭉치들이 더 많았다.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점은 그 앞장에 죄 귀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타티아나는 저게 치부책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침실에서마저 귀족들을 궁지로 몰기 위해 계략을 짜는 것일까.
‘이렇게 머리 아프게 고민할 것 없이 그냥 내 부비트랩으로 한 방에…….’
그녀는 본인이 생각해 놓고도 참으로 미친 생각이었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말랑한 피부를 만지작거리던 기드언은 약간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웃은 게 못마땅한 게 아니라, 혼자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못마땅한 것이다.
그는 그녀의 몸도 머릿속도 다 차지하고 싶은 사람이라서.
기드언은 그녀의 관심을 뺏어 오려는 것처럼 얼굴을 움켜쥐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 타티아나에게 정말 이상한 것을 물었다.
“새로 온 호위.”
“음? 호위가 왜요.”
“전완근은 좀 어때요?”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기사들의 몸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중 그녀가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던 건 기드언의 몸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자신의 전완근을 칭찬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뭘 어때요. 전하만 못해요.”
“……그걸 또 눈여겨봤다는 거네. 그놈 것도.”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물으니 대답해 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을 보고 나니 그녀야말로 부비트랩을 밟은 기분이었다.
타티아나는 도망이라도 치듯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나, 기드언은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며 손을 눈앞으로 끌어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 끝에 발갛게 꽃물이 들어 있었다.
“누이랑 이러고 놉니까?”
“네. 우리 이러고 놀아요.”
“귀엽네.”
타티아나는 피시시 웃었지만 기드언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이 말해 놓고도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너. 네가 귀엽다고. 누이는 말고.”
타티아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크게 터뜨리고 말았다.
자기 누나, 귀엽다고 좀 인정하면 큰일 나나?
저게 정말 싫어해서 그러는 건지, 너무 친해서 그러는 건지.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란 타티아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키득거리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웃은 김에 그냥 마음껏 웃으라는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아주 격렬하게 몸부림쳤고, 이러다 조만간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기드언은 피식거리며 손을 뗐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종이 잘 개어 놓은 옷을 툭 털어 팔부터 꿰입었다.
“난 먼저 나가 볼게요. 좀 더 있어요.”
“저도 갈 거예요. 운동해야 해요.”
“하고 다시 와요, 그럼.”
“왜요. 전하도 금방 끝나나요?”
기드언은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는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똑같은 침대일 뿐인데. 그녀가 그의 침실에 와 있는 건 그가 그녀의 방으로 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사내의 체취가 배어 있는 이불.
타티아나가 그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그는 마치 자기 암컷에게 영역 표시라도 한 것처럼 흡족해졌다.
“그냥 좋네요.”
“뭐가요.”
“티티가 여기 있는 게.”
타티아나는 실없다는 듯 웃어넘겼으나, 기드언은 그녀에게 지금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도마뱀도 없고, 그녀에게 어울릴 법한 근사한 검도 없어서 아쉽기만 했다.
그때 기드언은 그럴듯한 선물이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실은 진작에 되돌려 주었어야 하는 물건이다.
타티아나 부모님의 유품이자, 대마법사의 혼이 담긴 마력석이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서랍까지 열어 놓고도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혹시 그녀가 아침부터 눈물 바람을 하진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눈물이야 닦아 줄 수 있지만, 그 서글픈 마음까지 그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라서.
기드언은 의아해하는 타티아나의 얼굴과 서랍 안을 몇 번씩 오가며 바라보다가 결국엔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 살짝 얹어 놓았다.
타티아나의 반응은 전에 한 번 마력석을 선물 받았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어릴 때 며칠 갖고 놀던 장난감이야 휙, 집어 던지면 그걸로 끝이었지만, 어머니의 유품까지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마력석 가까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함부로 만지지도 못할 만큼 소중했는지 손가락은 그 주변만을 애타게 맴돌았다.
“……세상에.”
“…….”
“이걸 왜 전하가 갖고 있어요?”
“뺏어 왔어요. 마탑 하는 게 시원찮아서.”
“…….”
“도로 갖다줘요?”
그에게서 다소 밉살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타티아나는 평소처럼 눈을 흘기지 못했다.
목걸이를 어루만졌다가 입을 가렸다가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어어……. 어떡하지.”
“울지는 말고.”
나는 네가 이럴까 봐 바로 못 주고 갖고 있었던 거란 말이야.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눈가가 그렁그렁하자,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타티아나는 알겠다는 듯, 어어, 하며 안 울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하……. 진짜 고마워요.”
“나한테 고마울 건 없죠. 원래 티티 거잖아요.”
“그래도요. 진짜로요.”
그녀는 이 목걸이가 왕실로 갔다가, 다시 마탑으로 보내졌을 때 사실상 모든 미련을 거두었다.
그냥 기탁했다고 생각하자며 본인을 다독이기까지 했다.
마법사도, 기사도 완벽한 자연인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유품은 사건 현장의 증거 물품이었으며 나중에는 연구 자료로 쓰여야 했다.
타티아나는 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서러운 마음이야 있었지만, 그게 그녀 부모가 선택하고 살아온 삶이라서.
딸인 자신이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나 보다.
목걸이를 보자 그리움이 왈칵 밀려오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줄은 갈라고 했어요. 조금 훼손된 부분이 있어서.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좋아요.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울지는 말라니까.”
타티아나는 안 운다는 듯 손사래를 치다가 침대에서 팔짝 뛰어 일어났다. 그러고는 기드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진한 감사 인사였다.
기드언은 잠시 굳어 있다가 벽 모퉁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작 줄걸, 괜한 걱정을 하였다고.
그는 좀 더 쉬라며 타티아나를 침대에 앉혀 놓고는 말했다.
“갔다 올게요.”
그런데 그때 타티아나의 눈이 개구쟁이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그의 인사에 대답했다.
“네, 다녀오셔요. 여보.”
“…….”
기드언은 나가려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잘못 들었나 싶어 등 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리어 ‘어머? 저이가 왜 저럴까.’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드언은 픽 웃으며 또 한 번 생각했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줄걸.
뭐라도 밝혀낼까 싶어 마법구 앞에서는 몹시도 탐욕스러워지는 마탑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타티아나는 몹시도 행복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드언이 결혼한 이후 본 모습 중에 오늘이 가장 기뻐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약간의 우려는 남아 있어 그는 문을 나서기 전 덧붙였다.
“너무 오래 보고 있진 말고. 내일 보고, 모레도 또 보고 좀 나눠서 봐요.”
“…….”
“되도록 좋은 생각만 하라고.”
너무 깊은 감상에 빠져 생각이 슬픈 방향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네, 네, 남편이 최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부웅, 부웅 소리가 날 정도로 끄덕거렸다.
기드언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그냥 너 알아서 하라고 체념한 듯 웃다가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타티아나는 그가 나간 뒤로도 한참 동안 뒹굴뒹굴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목걸이를 끌어안았다가, 입을 맞추었다가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보면 약간 울컥하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위기의 순간도 찾아왔지만, 그녀는 그 위기 또한 잘 극복해 냈다.
기드언이 좋은 기억만 떠올리라고 했으니까. 두 분은 좋은 삶을 살다 갔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어……. 뭐야?”
타티아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홀린 듯이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방금 기이한 광채가 마력석 가장자리를 훑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녀는 눈가를 비비며 다시 자세히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력석은 잠잠하기만 했다.
사실 타티아나는 얼마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드언이 선물로 주었던 또 하나의 마력석에서도 뭔가 부자연스러운 빛이 반짝하다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는 달빛에 의한 반사광이라 치부했으나, 이번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분명히 보았다.
순간이지만 마력석이 그녀에게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