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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2)화 (74/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5)

한껏 실력을 뽐내던 무희들이 퇴장하자, 연회장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연주자들의 음악은 사람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은은하게 진행되었다.

편안한 분위기였으나, 방금 전까지 너무 강렬한 무대를 감상한 탓일까. 약간은 심심한 감도 들었다.

그때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발터의 또 다른 왕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를 차지한 건 언제나처럼 왕후였다.

그 뒤를 바이칼 왕자가 따르고 있었으며, 스칼렛 부부의 모습 또한 보였다.

도도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던 스칼렛은 먼저 와 있는 타티아나를 발견하고는 킥, 하고 웃었다. 오늘도 역시 참으로 깜찍했다.

타티아나는 빙긋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왕후는 왕실의 어른이었고, 기립해서 맞이하는 게 예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드언은 누가 오든가 말든가, 다리를 꼰 채로 턱이나 괴고 있을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런 남편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참을 수 없는 게 있어서 그의 무거운 다리를 번쩍 들어 바르게 놓아주었다.

방금 건 아주 안 좋은 자세였다.

“다리 꼬면 허리에 안 좋아요. 턱도 좀 자주 괴시는 것 같아요.”

“……내 허리를 왜 걱정해요? 내가 밤에 걱정할 정도야?”

“아니이, 누가 그렇대?”

두 사람이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왕족들은 천천히 연단 위로 올라왔다.

왕후는 기드언 부부가 시시덕거리는 걸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두 사람, 오늘따라 유독 다정해 보이십니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사실은 뮐러 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다.

타티아나는 약간의 도덕적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람들 앞에서 기드언과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

아무도 안 알아줘서 서운하려던 참인데, 그렇다고 왕후가 알아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왕후는 너무 강력한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기드언은 다시금 다리를 척 꼬더니 중얼거렸다.

“공작의 자백서가 지금 어느 부서에 계류해 있더라…….”

그 일을 다시 공론화시키면 당신한테도 좋을 게 없다는 경고였다.

놀랍지만 기드언과 왕후는 여기에 있어서는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뮐러 공작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바라지 않았다.

비록 증거는 불충분하나 왕후는 왕후대로 공작에게 사주한 게 있어서.

기드언은 또 기드언대로 타티아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서.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한다는 데에도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상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한참 동안 노려보기만 했다.

스칼렛은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이곳에 있기가 싫어졌는지 총총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면서 지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후, 또 시작이야. 안 들을래.”

그러나 공주가 이곳에 남아 원군을 자청하는 대신 파티장에 나서기로 한 건 지겨워서만은 아니었다.

스칼렛은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남동생의 능력을 신뢰했다.

남동생이 왕후한테 말로 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잔뜩 끌어모으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기드언만큼 남의 아픈 곳을 찌르는 재능은 부족했다.

그러니 일찌감치 분업하여 서로 잘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타티아나는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

어어? 나도 여기 끼기 싫은데? 같이 좀 데리고 가 줘요…….

그러나 이 내면의 소리는 공주에게 가닿지 못했고, 타티아나는 이번에는 바이칼 왕자를 바라보았다.

너희 엄마랑 내 남편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바이칼 왕자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공주의 남편 또한 바라보았으나, 저 곰 같은 사내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기드언과 왕후는 언제나처럼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서로의 속을 사정없이 긁어 댔다.

두 사람은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적수였다.

누가 회심의 한 방을 날리든 간에 상대는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응수했다.

둘 다 약점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왔기에, 흠잡을 만한 구석도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는 전략이 하나 있다.

상대의 소중한 이를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침착한 사내일지라도 사랑하는 여자를 건드리면, 그때부터는 동요하거나 눈이 돌아간다.

왕후는 가만히 앉아 있는 타티아나에게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비, 요즘 학교를 짓고 있다면서요.”

“아, 네. 많이들 도와주셔서요. 준공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타티아나는 내탕금을 사용하여 총 세 곳의 빈민가에 학교를 지었다.

하나는 기존의 건물을 활용했지만, 다른 두 지역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쓸 만한 건물이 없어 터부터 새로 닦아야 했다.

조만간 학교가 완공되고 나면 타티아나는 그 기념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가서 개회식 리본 하나 정도는 잘라 주는 게 관례였다.

기드언은 당연히 동행할 테고, 공주도 함께 가 주겠지? 공동 기획자니까.

타티아나는 파티장 한가운데를 종횡무진 휘젓고 있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공주 주위에는 그새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때, 왕후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참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비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아이들이라 마음이 쓰이셨나 보지요.”

“…….”

“사람이 본래 과거를 잊기가 참 힘듭니다.”

가난한 건 죄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사실관계는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타티아나는 빈민가 아이들과 비슷하게 자라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유복하게 컸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블룸 가는 백작가였으니.

왕후도 그 연대표를 잊어버려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단지 그녀의 출신을 한 번 더 꼬투리 잡고 싶을 뿐인 거지.

타티아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평민 출신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졌다.

트집 잡을 게 저거 하나밖에 없나 본데, 이것마저 없으면 우리 왕후 폐하께서는 심심해서 어떻게 사시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타티아나는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이전에도 한 번 받아 본 공격과 유사한 형태라 별로 타격감이 없었다.

‘왕후 폐하는 확실히 좀 옛날 사람이신 것 같아. 지난 얘기를 너무 많이 반복하셔. 새롭지가 않아.’

그러나 태연스럽게 앉아 있는 그녀와는 달리, 옆자리에서는 모락모락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뻔하디뻔한 공격에 반응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진심으로.

타티아나는 이제 기드언의 기준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는 알고 보면 소문 따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본인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지껄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가끔 신경 쓰는 시늉만 할 뿐이지, 속으로는 가소롭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누가 그녀에 대해 함부로 떠들기 시작하면, 그도 진심이 되고 만다.

그런 상황까지는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드언은 냉랭한 눈빛을 하고서도 활짝 미소 지었다.

마치 얼음 조각이 햇빛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반짝이는 미소였다.

그러나 얼음 조각이 왜 얼음 조각인가?

아름답지만 선뜻 만질 수 없는 건 왜인가. 몹시도 차갑고 그 끝이 때로는 너무나 날카로워서였다.

기드언은 왕후를 바라보며 천천히, 아주 우아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죠.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잊기가 참 어렵지요. 본인이 살아온 틀을 한 번에 버리기도 어렵고 말입니다.”

“…….”

“그러니 지아비의 권력이 자신의 것인 양 취해 살던 사람이, 대를 건너 아들에게까지 기생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기드언이 무슨 말을 하려나, 듣고 있던 타티아나는 순간 아찔하여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의 발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왕후의 과거와 현재를 꼬집고 있었다.

이건 칼날만 오가지 않을 뿐이지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 정도면 상대가 다시 일어나기 힘든 치명타였다.

그러나 기드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바이칼 왕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 자식은 또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권력욕을 바이칼 왕자가 이뤄 주지는 못할 거라는 뜻이었다.

네 남편은 왕이지만, 네 친아들까지 권좌에 오르지는 못할 거라고.

내내 여유를 부리던 왕후의 미소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를 건드리면 기드언이 즉각 반응하듯 왕후의 약점은 바이칼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 왕후와 기드언 사이에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기드언이 자기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왕후는 본인 아들을 보며 내심 아쉬워한다는 점이었다.

같은 아인슬러의 피를 이어 받았는데, 제 이복 오누이들처럼 대가 강하지 못하여.

기드언과는 달리 군사에도, 전술에도 통 관심이 없어서.

권력욕이 없고, 언제부턴가 자꾸만 제 어미에게 왕위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해서.

왕후는 부채를 차락, 펴더니 턱 끝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고는 오라비와 인사나 나누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무수한 귀족들 가운데에서 굳이 수도 방위군 대장인 바이칼의 외숙을 언급한 건, 끝까지 기드언의 심기를 긁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점이 참 왕후다웠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이 싸움의 승자와 패자가 이미 가려졌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왕후가 먼저 자리를 피한 순간, 기드언이 이긴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의 얼굴은 어딘가 퀭해져 있었다.

그냥 옆에서 관전만 했을 뿐인데, 사정없이 기를 빨린 기분이었던 것이다.

역시 그녀는 말로 하는 싸움보다 주먹이나 칼로 하는 싸움이 훨씬 맘 편했다.

“후, 진 빠져.”

타티아나는 급격히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음식을 뒤적거렸다.

기드언은 창백해진 그녀의 낯빛을 한발 늦게 눈치채고는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하얗게 질렸는데.”

“…….”

“건포도라도 먹었어요?”

“네?”

건포도? 대체 언제 적 건포도야.

까짓것 그냥 먹으면 되지,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를 해 놓고 당신은 그게 중요해?

타티아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기드언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진짜로 건포도가 알알이 박힌 빵을 발견하고는 얼른 씹어 보였다.

그 호불호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걸 남편한테 알려 주려고.

기드언은 잘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타티아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맛있어 보이는 빵을 집어 들었다.

열량 보충은 자신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설전을 벌인 남편이 해야 했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입에 빵 한 조각을 쏘옥, 하고 넣어 주었다.

다행히 그는 맛있게 먹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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