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3)화 (75/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6)

* * *

파티 도중에 빠져나온 두 사람은 기드언의 침실에 몸을 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드언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정신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그녀는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이곳이 정말로 안전한가 경계하는 버릇은 있으나, 성안에서 왕자의 처소만큼 방비가 튼튼한 곳도 드물었다.

기드언의 방 구조에는 진작에 익숙해졌다. 이불에서는 가끔 그의 체향이 나는 듯해 편안하기까지 했다.

물론 매일같이 갈아 대는 이불에 체취가 밸 리는 없겠지만, 기분이 그랬다는 거다.

이 밤, 타티아나가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파티의 여파였다.

만약 위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소화 장애를 유발할 정도의 신경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곁에 있던 브라우닝 경은 속이 더부룩하다며 파티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 무던해 보이는 곰 같은 사내가 말이다.

그런데 정작 설전을 벌인 기드언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얼굴로 꿈나라를 여행 중이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아마도 그에겐 아까 전과 같은 싸움이…….

‘일상이어서겠지.’

타티아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침대 옆 협탁, 책장, 간이 책상 위에는 여전히 서류 뭉치들이 수북했다.

타티아나는 그 무질서한 종이들 위에 적힌 귀족들의 이름을 훑어보았다.

‘한스 베일리 후작, 나니아 백작 부인, 헨리 호프만 공작. ……많기도 하네.’

그런데 그때, 이러한 생각이 타티아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양부에 관한 것도 있을까?’

그녀는 멈칫하다가 슬그머니 등 뒤를 돌아보았다.

기드언은 여전히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고, 그녀는 다시금 서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뮐러 공작과 관련하여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공작은 정말로 기드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갑갑해지기도 한다.

한데 돌이켜 보면 그 무렵, 남편의 행동에는 이상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타티아나는 그때만큼은 어릴 때부터 알아 온 기드언의 속내를 추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대화를 차단했으며 그녀와 마주칠 일 또한 만들지 않았다.

그녀가 뭔가를 생각하거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을 처리해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지.

그는 그녀에게 쓰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녀에게만큼은 날 원망하냐고 묻기도 하고, 용서 안 한다면서요, 곱씹기도 하는 사람인데.

그걸 묻고 되새겼다는 것은 그가 그녀의 생각과 반응을 몹시도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타티아나는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차분해지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기드언의 행동이 사실은 전부 그녀를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이건 너무 근거 없는 믿음일까?

무수한 기혼자들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오류에 빠져 있나.

내 결혼과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를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며 시야가 흐려진 건가.

타티아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혹시 저기엔 그 답이 있을까. 그녀는 홀린 듯이 서류 뭉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등 뒤에서 스윽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을 턱, 하고 낚아챘다.

“어어……?!”

타티아나는 심장이 덜컹하고 떨어지는 것 같아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뻣뻣해진 목을 돌려 어깨 뒤를 바라보았다.

기드언은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나른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피식대다가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숨소리는 속여도 심장 소리는 어떻게 못 하나 보죠.”

“…….”

“엄청 뛰어.”

그녀도 쿵, 쿠웅, 하는 본인의 심장박동을 생생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거의 망치 소리 같았으나 이렇게라도 뛰니 다행이었다.

아깐 정말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뭐예요, 기척도 없이.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타티아나는 자신이 남의 서류를 몰래 훔쳐보려 했다는 것도 잊고 되레 핀잔을 줬다.

기드언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면서도 그 점을 지적했다.

“뭐가 궁금한데.”

“…….”

“네가 찾는 건…… 여기 없어.”

타티아나는 그 말에 흠칫거렸다.

앙큼한 속내를 들킨 건 둘째 치고 뭐가 있긴 있다는 소리인가 싶어서.

그녀는 초록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며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어디 있는데요?”

“그런 거 없다고.”

……내가 다 없애 버렸거든. 그러니까 이제 찾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마. 다 끝난 일이잖아.

기드언은 뒷말을 삼키곤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그만 생각하고 자요. 내일 또 일찍 일어날 거잖아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입술로 푸르르, 바람을 불더니 뚱하게 말했다.

“파티 때문에 신경을 너무 많이 썼나 봐요. 오늘따라 잠이 잘 안 와요.”

“그래요? 좀 도와줘?”

타티아나는 ‘어떻게 도와줄 건데?’ 눈으로 물었으나, 답은 뻔했다.

격렬한 운동 뒤에 느끼는 탈력감은 수면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기드언은 느물느물 그녀의 위로 올라왔으나, 타티아나는 그 가슴팍을 턱, 하고 밀어냈다.

“싫어?”

“싫다기보단…….”

“응.”

“그냥 얘기하고 놀고 싶어서.”

남편과 함께 새로운 감각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황홀경에 빠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그냥 어린애들처럼 손만 잡고 놀고 싶을 때도 있다.

기드언은 아아, 내 아내가 지금 나한테 할 말이 있으시군? 하더니 턱을 괴고 들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초장부터 너무 엉뚱하고 난해했다.

“전하는 안 힘드세요?”

“뭐가?”

기드언은 얘가 왜 아까부터 내 허리랑 체력을 걱정하는 건가 의아해졌다.

밤에 뭔가 불만족스럽나?

물론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었고, 타티아나는 금방 그 오해를 풀어 주었다.

“그냥…… 오늘처럼 사람들이랑 싸우는 거.”

“아아.”

기드언은 무슨 얘기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인상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내에게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왕후의 말이 그녀에게는 몹시 모욕적으로 느껴졌을 텐데.

자신한테는 너무 익숙한 일이라, 타티아나의 기분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미안해요, 아까 기분 나빴죠.”

하지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기분이 막 날아갈 듯 좋은 건 아니었지만, 왕후는 왕자비의 자리에 어떤 누가 앉아 있든 간에 꼬투리를 잡아낼 사람이었다.

단지 기드언의 아내라는 이유로.

그러니 왕후의 말을 굳이 곱씹으면서 상처받고 싶진 않았다.

그 정도로 섬세한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타티아나가 지금 궁금한 건 기드언의 속내였다.

“저 말고 전하요. 괜찮냐고요.”

“뭐, 짜증이 날 때야 많지만, 이것도 정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

기드언의 말은 타티아나의 귀에도 타당하게 들렸다.

실제로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으며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기드언이 홀로 왕후를 상대하는 것을 볼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 자신이 왕후의 공격 포인트가 되고, 기드언이 그걸 칼같이 방어하는 모양새였기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내 얘기를 하는 중인데 남편 혼자 싸우게 놔 둬서. 미안해서.

물론 아까 그 얘기는 타티아나가 기드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듣지 않아도 되었을 소리였다.

비록 피는 안 섞였을지언정 왕후는 기드언의 어머니이지, 타티아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가족은 남편이, 아내의 가족은 아내가 방어하는 거라고.

만약 의견 충돌이 생기거나 싫은 소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악역은 본인이 직접 하자는 거다.

배우자를 자기 가족 앞에 욕받이로 내세우지 말고.

참 옳은 말인 것 같다.

혈육이 하면 ‘으이그, 저거 또 저러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소리도 피 안 섞인 사람이 하면 고까울 때가 있으니까.

비단 이것뿐일까? 세상에는 우리 기혼 선배들이 결혼 생활에 대해 남기고 간 무수한 지혜들이 넘쳐 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타티아나는 가끔은 이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지혜라는 것들이 배우자와 행복하게 지내기 위한 지침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 있어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한 병법서 같다고.

배우자와 그를 둘러싼 모든 무리를 이미 적으로 설정해 놓고 시작하는 듯하다고.

무슨 얘기냐면 기드언이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는 그녀의 마음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기드언은 고군분투했다기보단 여유만만한 태도로 다 받아쳤으며, 왕후와 기드언 사이의 문제는 그들 둘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다.

타티아나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남편이 왕자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왕은 모든 자잘한 시비에 일일이 대응하는 자리가 아니까.

“전하도 가끔은 전하를 대신해서 싸워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요?”

“음. 그렇기야 하겠죠.”

“네, 성군 뒤에는 원래 독사 같은 책사들이 있다잖아요.”

왕이 무한 칭송을 받기 위해서는 그를 대신하여 악역을 맡아 줄 사람도, 물밑에서 지저분한 일을 처리해 줄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 외에도…….

“전하도 전하만의 검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왜, 티티가 해 주고 싶어서?”

“…….”

“내가 오늘 왕후를 상대하는 게 많이 버거워 보였나 보네.”

기드언이 픽 웃자, 타티아나는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오늘 일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심란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왕후는 원래 듣는 사람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어쩌면 타티아나는 그가 힘들까 봐 염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들어 주고 돕고 싶어진 것일 테지.

아내가 마음을 써 준다는 건 역시 참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거듭하여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티티. 내가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응.”

“난 이 결혼으로 뭔가 다른 걸 얻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네 남편이 되고 싶었던 게 다라고.”

“…….”

“너는 내 신하가 아니야.”

“…….”

“아내지.”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네가 검을 바쳐야 하는 주군이 아니라, 너의 남편일 뿐이라고.

그러니 나를 지키려 하지 말고 조금만 더 믿고 의지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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