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7)화 (79/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0)

* * *

케이는 타티아나의 호위로 복귀했다.

한동안 기드언의 집무실만을 드나들며, 대단히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쑥덕대더니 임무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어쩌면 기드언과 케이는 타티아나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서두른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오며 가며 케이를 마주칠 때마다 ‘언제쯤 나랑 다시 겨뤄 줄 거야?’ 하며 애가 탄다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케이가 자리로 복귀하자 타티아나는 아침 일찍부터 연무장에 나와 몸을 풀었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결연한 준비운동이었다.

한데 오늘은 기드언도 본인의 로열석을 뒤로한 채, 그들을 따라 나와 있었다.

또 대련이 격해질까 봐 살짝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저 두 사람은 최전성기의 검사였다.

불이 붙었을 시 말릴 수 있는 권력과 실력을 모두 가진 사람은 이 성에 기드언뿐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기왕 삼자가 모두 모인 김에 뭔가를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파르스름한 멍이 가시지 않은 케이의 얼굴 때문이었다.

“전하, 사람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떡하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기드언도 할 말이 있었다.

그는 안 그래도 저걸 볼 때마다 내가 역시 너무 착해졌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티티. 발터 왕실 역사상 왕족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도 목숨을 건진 사례는 없습니다. 알고 보면 나처럼 자비로운 이도 없을 테죠.”

케이는 기드언의 처분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어느 순간 호위의 직분을 잊고, 호승심을 억누르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타티아나의 검은 절대 건성으로 받아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나, 그도 완전히 떳떳한 기분은 아니었다는 거다.

하지만…….

‘자비?’

이것처럼 기드언과 안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었던가.

그는 기드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치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호오, 그럼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네? 상당히 뜻깊은 사건이었네? 생각하며 되물었다.

“그거 진짜예요?”

그러자 기드언은 너무나 태연하게 본인의 말을 뒤집었다.

“나도 모르죠. 내가 왕후예요? 옛날 사례나 뒤지고 있게.”

타티아나는 에이, 하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이제 이러지 말아요.”

“왜, 마음이 아파?”

막 아려? 속이 찌르르해?

기드언의 표정은 서서히 퉁명스러워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이유를 내세웠다.

“이 사람, 전하 밑에서 껄끄러운 일들 대신 처리해 주는 사람 아니에요?”

“…….”

케이는 밋밋한 흑색 옷과 복면을 즐겨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는 잘 안 다녔다.

의도한 바일 수도 있고, 계속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습관으로 굳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케이는 타티아나의 호위를 전담하던 시기에도 종종 자리를 비우곤 했다.

농땡이를 피울 사람처럼은 전혀 안 보였으니, 그 정도로 바쁘다는 것이다.

한데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 주는 이가 없다.

사실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몇 없어 보였다.

이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진짜 활동 반경은 양지가 아니라 음지였다.

“전하, 비밀 요원은 눈에 띄는 상처나 흉터 같은 게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눈여겨보게 되잖아요. 기억에 남는다고요.”

그가 기드언의 심복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겠냐마는 굳이 나 좀 봐 달라는 듯,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사들은 잠복할 때는 향수도 안 뿌린다.

그런데 저렇게 얼굴에 멍이 남아 있으면…… 일에 지장이 생기잖아.

몽타주 작성이 수월해진다고.

왕자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이의 표정은 아주 약간 떨떠름해졌다.

옳은 말이긴 했으나 뭐랄까. 순수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살짝 고까웠다고나 할까.

그걸 눈치챈 타티아나는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녀는 케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이제 와서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좀 짓궂게나마 농담을 건넨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농담은 케이에게 통하지 않았거니와 기드언마저 고깝게 했다.

그는 얼마 전 반창고를 떼어 낸 타티아나의 눈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매를 비틀었다.

아, 그러세요? 네 얼굴이나 잘 챙기세요.

“그게 티티가 할 소리예요?”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챈 타티아나는 멋쩍은 듯 눈썹을 긁적이며 말했다.

“흉터 안 남았잖아. 그럼 됐지…….”

“아무튼 조심 좀 하라고.”

“아이, 알았어요.”

“연습을 굳이 실전처럼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러다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티티가 좋아하는 검, 앞으로는 못 잡게 될 수도 있어요.”

“……세상에. 이건 또 무슨 끔찍한 소리야. 저주하는 거예요?”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걱정과 잔소리, 그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놓여 있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케이가 저 사랑싸움인지 부부 싸움인지 알 수 없는 대화는 언제 끝나려나 생각할 때였다.

타티아나는 케이가 심드렁한 기색으로 한눈을 팔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흠,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평상시 기습을 즐겨 하는 검사는 아니었다.

기사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검사들은 본래 이상한 자존심과 결벽 같은 게 있어, 상대에게 선공을 양보할 때도 많다.

물론 그들도 전투에 나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오면 물불 안 가리고 할 거 다 한다.

돌도 던지고 흙도 뿌리고.

그래도 대련에서만큼은 격식을 차리고, 체면도 따지는 게 보통의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케이와 대련을 할 때 종종 예고 없이 검을 휘두르고는 했다.

케이가 당연히 막아 낼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가 보여 주는 반응속도가 감탄스러웠기 때문이다.

챙-!

케이는 이번에도 역시 놀라운 발검 속도를 과시하며 타티아나의 검을 받아쳤다.

그녀는 복부 하단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탄사를 하아, 하고 내뱉었다.

왕실 친위대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

이 사람은 진짜였다.

타티아나는 근래 들어 틈만 나면 기사들과 대련을 펼쳐 왔기에 이 차이를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친위대의 수준이 3년 전에 비해 급격히 저하되었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었다.

조만간 샘슨 아저씨를 불러 진지한 대화를 한번 나눠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혹시 입단 시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기드언은 그런 타티아나를 보며 혀를 차는 중이었다.

아내 눈이 또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신체 조건이 좋거나 실력 있는 검사만 보면 늘 저렇게 정신을 못 차렸다.

어쩌면 저것은 집안 내력인지도 모르겠다.

블룸 경도 인재 발굴 욕구가 남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기드언은 스승이 자신을 각별하게 여겼던 가장 큰 이유가 재능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실은 케이도 저 실력 때문에 블룸 경에 의해 인생이 뒤바뀐 사람이었는데, 때마침 타티아나가 물어 왔다.

“전하, 저희 아빠는 이런 인재를 대체 어디에서 찾으셨을까요?”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그게 궁금해졌어? 내가 진실을 알려 줄까?

“장인어른이 암살 길드를 박살 내러 갔다가 주워 왔습니다.”

“…….”

전원 소탕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어깨에 짊어진 채 출동했던 블룸 경은 그때 딱 한 번의 예외를 두었다.

기드언에게 이 아이를 옆에 두고 쓰시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한 것이다.

‘전하께서 친위대를 동원해 공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더욱 많아질 겁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한 번만 기회를 줘 보시죠.’

기드언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블룸 경의 안목을 신뢰했거니와, 케이는 그가 보기에도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드언이 지금 타티아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얘기가 아니고…….

“얘 살수라고. 범죄자 출신.”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존경과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진 말라는 거다.

그녀에게서 그런 눈빛을 받는 건 자신으로 족하니까.

오늘에서야 비로소 케이의 정체를 알게 된 타티아나는 멈칫했다.

도둑놈인가? 살짝 의심은 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살벌했기 때문이다.

하긴 이건 좀도둑한테서는 나올 수 없는 실력이었다.

이런 재능으로 더 큰 과업을 펼쳐야지 왜 도둑질을 하나.

혹시라도 굳이 하겠다면 국새 정도는 훔쳐 줘야 저 실력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 기사들과만 어울리며 양지에서 자라 온 타티아나에게 살수의 세계는 아직 거리감이 있었다.

그녀는 당신, 참 낯설다, 하는 눈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어쩌면 은인의 딸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 버린 자신의 과거가 민망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전에 없이 변명을 주워섬겼다.

“……저 손 씻은 지 오래입니다. 비전하.”

기드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언제 손을 씻었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케이가 이제껏 귀족들의 저택에서 빼내 온 부정의 자료는 얼마만큼이며, 손수 보내 버린 목숨은 몇인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명령권자인 기드언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케이는 머뭇거리다가 그 점을 언급했다.

“저는 이제 기드언 전하의 종복입니다. 그저 전하의 명만을 충실히 이행할 뿐입니다.”

기드언은 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것 좀 봐라? 싶어서였다.

기껏 살려 주고 식솔들까지 다 거둬 먹였더니 남의 아내 앞에서 같이 죽자며 달려들고 있었다.

‘내가 너무 착해졌지?’

이게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른다며 기드언은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예쁘긴 한데 너무 살벌해서 케이와 타티아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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