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3)
* * *
두 사람은 그들이 살면서 주로 밟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붉은 카펫이나 대리석 바닥, 잔디밭이 아닌 흙길이었다.
석양이 질 무렵, 마을에서는 푸근한 수프 냄새가 났다.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골목 곳곳엔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고, 간혹 쥐의 사체가 눈에 띄기도 했다.
구중중한 시궁창에서 올라오는 악취는 음식 냄새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타티아나는 ‘으음…….’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란히 걷던 기드언은 그녀의 옆얼굴을 힐긋거리다가 어깨너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그들이 머물렀던 신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뚝 솟아 있는 학교는 외진 골목 어귀에서도 잘 보였다.
마을 지리를 모르는 이들에겐 이정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듯싶었다.
학교 설립 행사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인근 영지의 귀족들은 따로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조용히 찾아와서는 얼굴을 비추었다. 기부금도 또 내고 갔다.
왕실의 눈치를 본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건물 벽면에 가문의 이름이 새겨진 후라, 와 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도 야무지게 새겨 놔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100년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길이라고 말하기에도 참 뭐한 땅을 한참이나 걷던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등 뒤를 돌아보자,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그를 따라 학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뿌듯한가. 만족스럽지 못한가.
기드언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타티아나는 입을 열었다.
“전하.”
“음?”
“나 돈 좀 꿔 줘요.”
기드언은 팟, 하고 웃더니 입가를 매만졌다.
지난번엔 돈 많이 벌었다고 으스대며 자랑했는데, 그새 똑 떨어졌나 보다.
그런데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돈 얘기를 하면 그게 이상하게 참 웃겼다.
이유는 그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돈이 왜 필요한데요. 학교가 티티 성에 안 차요?”
“아뇨, 훌륭하죠.”
타티아나는 이 추레한 거리에 나 홀로 번듯하게 자리 잡은 학교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너무 훌륭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위화감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이러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저곳에 보낼 여유가 있을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예산으로 다른 급한 불을 먼저 꺼 주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마을을 한차례 둘러보자니, 급한 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 모든 걸 단숨에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연 단위로 지급되는 내탕금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전 짊어지고 온 사재까지 텅텅 비고 말겠지.
이래서 정책 결정은 똑똑한 사람들이 해야 하나 보다.
좋은 의도와 따뜻한 마음만 가지고는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게 어려웠다.
타티아나가 이 같은 생각에 대해 설명하자, 기드언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왕자비로서 벌이는 구호 사업에 꽤 진지해진 눈치다.
그런데 기드언은 사실 타티아나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의 아내에게는 삶을 관통하는 선명한 기준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아예 안 하면 모를까, 기왕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자고.
그 선명한 기준은 그녀의 일상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목욕물의 온도, 잠자리의 쾌적함, 그날 입을 옷, 이런 자잘한 것들엔 대단히 건성이다.
어지간한 사람들이랑은 싸우는 것도 귀찮아했다.
내가 맞출 테니, 우리 그냥 대충 넘어가자는 거다.
사람들은 그 모습만 보고 그녀를 무딘 성품이라고 오인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면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검을 쥘 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실상은 완벽주의자도 이런 완벽주의자가 없는 것이다.
본인이 만족하지 못하면 남들이 괜찮다 해도 다음 기술로 넘어가는 법이 결코 없는 사람이었다.
타티아나가 지금 심란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이 일이 그녀의 관심 범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었다.
진심으로 임하고 있으며, 더 잘 해내고 싶어서 욕심이 난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
기드언은 그 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는 진지한 태도로 답변해 주었다.
다소 현실적인 관심이었으나 나름대로는 위로할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티티가 처음 계획한 방향대로 운영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그래도 마을에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는 건 중요해요.”
“…….”
“사람들은 재난을 겪거나 위험이 닥쳤을 때, 자연스레 저곳에 모여들겠죠. 이 사람들에게는 저 건물이 왕실과 닿아 있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질 겁니다. 티티도 계속 관심을 가질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라도 쓰이면 다행이고요.”
타티아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개운하지 못한 눈치였다.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듯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벽하길 기대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법이었다.
기드언은 그녀가 그걸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검은 뭐, 태어날 때부터 완벽했나.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도 한 번에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방향성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를 새초롬하게 올려다보았다.
남편이 아직 중요한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은 얼마나 꿔 주실 건데요? 왜 그 얘기가 없어요.”
“…….”
“전하 앞으로 나오는 내탕금도 있을 거 아녜요.”
기드언은 아내가 다시금 돈 얘기를 꺼내자 어김없이 팟, 하고 웃어 버렸다.
누가 검밖에 모르던 내 소녀 장사에게 이러한 현실감각을 허락했을까.
기사들인가, 파티인가.
아님 남의 집 더부살이가 문제였나.
기드언은 재물이야 얼마든지 안겨 줄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왕자궁의 실소유주가 그녀임을 증명하는 서류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돈 얘기를 꺼내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일부러 비딱하게 응수했다.
“왜 내 내탕금에 관심을 가져요? 나도 다 쓸 곳이 있어요.”
“어디에?”
기드언은 알려 주기 싫다는 듯 딴 곳을 바라보며 웃었고, 타티아나는 어머,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남편, 딴 주머니 찰 생각인가 봐! 왜 안 알려 주지?
내가 진짜 뺏어 갈 사람처럼 보이나?
“뭐예요. 나는 다 알려 줬는데.”
그러고 보면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그의 앞으로 배정된 예산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개인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지 못했다.
보통의 가정 같았으면 싸움이 났어도 백 번은 났을 상황이었다.
다행히 타티아나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남의 재산에는 큰 욕심이 없었다.
그게 남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어디에 사용하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지만, 들어 봐야 재미없는 내용일 게 뻔했다.
사실 안 들어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금 대부분은 그가 거느린 정보원들의 공작 비용에 쓰이고 있을 것이다.
기드언은 애초에 개인적인 취미랄 게 없는 사람이니까.
운동만 하며 살아온 그녀보다도 사생활이 훨씬 재미없고 삭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이 불투명한 재정 상황과 부부 간의 정보 격차에 대해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한테? 친정 부모님한테.
“이제 엄마 아빠 보러 갈래요. 가서 남편이 돈 안 준다고 일러야지.”
기드언은 ‘어, 그래라’ 하며 코웃음 쳤다.
장인 장모님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타티아나는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안 통하면 나는 남편이 속을 썩일 때 누구한테 하소연을 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마차에 오른 뒤, 묘지가 점점 가까워지자 이렇게 말했다.
“진짜 다 일러바칠 거예요?”
“왜요? 무섭긴 해요? 꿈에 나올까 봐?”
“그건 아닌데 적당히 해. 걱정하시잖아.”
저렇게 말하니 진짜 처가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 사람 같았다.
타티아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 * *
블룸 백작 부부의 묘소는 왕실의 보호 아래 관리되고 있다.
말 그대로 순국선열의 묘였으며, 공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기사들 상당수는 이곳에 잠들어 있다.
왕실이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우인 셈이다.
한데 순직 기사에게 배우자가 있을 경우에는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귀족들에게는 가족묘라는 게 있으며, 자식들 중에는 부모님을 한데 모시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아내, 양쪽 모두가 순직자인 경우는 드물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배우자, 자식, 그 사돈의 팔촌까지 자리를 허락한다면 왕립 묘지는 포화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당사자의 유언을 따르거나 남은 가족들의 선택에 맡기는 게 관례였다.
하나 블룸 경 사후, 왕실은 블룸 부인의 묘까지 이곳으로 이장해 왔다.
어찌 보면 예외를 둔 셈이라, 당시에는 갑론을박이 오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일을 추진했던 기드언은 그때마다 이러한 논리로 응수했다.
‘꼭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발터에 기여한 겁니까? 블룸 부인이 발터 마법계의 발전에 이바지한 부분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왕립 묘지 안치 기준은 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1왕자가 자신의 스승을 각별히 여겨 이런 짓을 벌인다고 생각했겠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블룸 부부는 기드언이 좋아하는 여자의 부모님이었다.
심적으로는 그때부터 이미 장인 장모님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한데 뜻밖에도 이 이장 계획에 힘을 실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마탑이었다.
마법사들은 본래 승계 문제나 국내 정치에 관여하는 법이 없다.
전쟁 외의 상황에서는 항상 뒷짐을 진 채 물러나 있었다.
그게 마탑이 설립 초부터 지켜 온 원칙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언제나 검술계와 대립각을 세우며 자존심 싸움을 벌여 왔다.
왕립 묘지에 안치된 마법사의 숫자가 기사들보다 현저히 적다는 건 그들의 오랜 불만이었다.
대상이 순직자이다 보니, 후보군 자체에 포함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도 연구에 매진하다가 과로사하는 사람 정도는 종종 나오는데 말이다.
마탑주는 그 무렵 길고 긴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장황한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1왕자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