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4)
타티아나는 부모님 묘소 문제에 기드언이 힘을 써 주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회의 끝에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전갈을 받았고, 예우 차원인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 무렵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딱 끊은 상태였다.
사교계 소문 같은 건 일부러 멀리했다.
부친마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타티아나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을 세파 앞에 흔들림 없이 보호하기 위해서는 눈과 귀를 막아야 할 때도 있다고.
외부 자극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수용하는 거다.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가혹한 신체 활동은 운동이 아니라 고문이다.
정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정말로 많이 흘렀나 보다.
그녀는 부모님의 무덤가 앞에서 제법 초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위기의 순간도 있었으나, 왜였을까.
기드언이 ‘웁니까?’ 묻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쏙 하고 들어가 버렸다.
아마도 남편 앞에서 못생겨 보이기가 싫었나 보다.
타티아나는 평온한 기색으로 비석을 어루만졌다.
부모님께 양손을 흔들고 무덤가에서 돌아설 때는 입가에 미소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상념에 잠긴 건 도리어 기드언인 듯했다.
그는 성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턱을 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너무 오랜 시간 계속되자, 타티아나는 그의 팔뚝을 쿡 찌르며 물었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인사했어요?”
“응?”
“따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으로 뭐 이런 얘기 안 했어요?”
“……안 했는데.”
타티아나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뭐야, 나 같은 딸을 낳아 주신 게 전혀 감사하지 않아요?’ 하며 따져 물었다.
기드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아내가 또 왜 이럴까…… 하는 눈빛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렇게 한 번씩 앙큼하게 으스댈 때가 있다.
그건 좋았다. 귀여우니까.
그런데 이 당돌함이 쭉 유지되는 게 아니라, 끝에 가서는 민망하다는 웃음으로 귀결되곤 했다.
본인이 해 놓고 본인이 창피해한다는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는 얼굴을 가린 채 잘게 웃다가 실토했다.
“그냥 전하는 무슨 생각했는지 궁금해서요. 진짜 감사하란 뜻은 아니었어요.”
기드언은 아아, 하더니 타티아나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감사하죠. 그런 마음이야 늘 갖고 있죠.”
“……정말?”
“그럼. 아닌 것 같아?”
기드언은 부모의 정 같은 건 잘 모른다.
그의 누이는 친모에 대한 추억이 좀 있는 모양이지만, 그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기억하고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아쉬움은 딱히 없었다.
도리어 그 정이 꼭 필요한가? 의문이 들 때마저 있었다.
그는 그 내리사랑의 부족분을 언제나 다른 것으로 손쉽게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재물, 권력, 힘이랄까.
누구나 인정할 만큼 성품이 훌륭한 부모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환경.
그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기드언은 주저 없이 후자를 고를 것이다.
다만 아내를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어딘가 다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에게 베푸는 관용. 솔직한 감정 표현.
겸손하지만 그녀 안에 분명히 내재되어 있는 자부심.
그녀는 때때로 좌절하고 실망하지만, 또 금세 일어난다.
난관을 이겨 내는 힘과 회복력이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드언은 그 힘의 원천이 어린 시절 그녀가 받았던 사랑과 블룸 부부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왜 감사하지 않을까.
아내를 이렇게 정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길러 주었는데.
하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블룸 경의 묘비 앞에서 평소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경, 미안합니다.’
당신의 죽음에 얽힌 사실관계를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밝히지 못해서.
그 억울함을 풀고 기사로서의 마지막을 더 깨끗이 하지 못해서.
‘나는 진실을 이대로 죽을 때까지 떠안고 갈 겁니다.’
그렇지만 기드언은 블룸 경이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딸을 그토록 귀애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딸이 사람들의 혓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과거의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결과를 그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당신 딸은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경은 그걸로 충분할 테죠. 아닙니까?’
만약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기드언은 죽은 사람의 명예보다는 산 사람의 인생을 중시했다. 스승보다는 아내가 우선이었다.
사실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건 왕좌와 아내, 딱 둘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한다.
블룸 경이 살아 있었다면, 그는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했을까, 아니면 반대했을까.
물론 신하의 입장이니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속마음은 다를 수 있는 게 아닌가.
블룸 경은 당시 기드언이 타티아나를 흠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드언은 그때도 감정과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했으나, 딸 가진 아비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드언이 대화 속에 무심한 척 그녀의 안부를 끼워 넣을 때마다 블룸 경의 눈빛은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때만큼은 주군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풋사랑에 빠진 사내, 아니, 미숙한 소년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아무리 숨겨 봤자, 나는 네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그때 속으로 뭐라고 생각했을까.
어린애들 소꿉장난을 보는 것 같아 그냥 모른 척해 준 것일까.
자기 딸을 탐내는 짐승이자 도둑놈이니, 그래도 괘씸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을까.
하지만 만약 반대했다 하더라도…….
‘난 청혼했을 거야.’
그녀가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서, 지금처럼 부부의 연을 맺고야 말았을 것이다.
기드언은 블룸 부부의 보물이자 자신의 어린 시절, 인생 그 자체를 끌어안았다.
타티아나는 그 품에 안겨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묘소에 갔다 온 뒤로 어딘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생각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은 유독 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전하.”
“응.”
“……혹시 슬퍼졌어요?”
“아니.”
기드언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괜한 소리를 덧붙였다.
“혹시라도 고민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왜, 해결해 주게?”
“아니, 그럴 자신은 없지만, 부부 사이에는 원래 다 터놓고 얘기하는 거래요.”
“……누가 그러는데?”
“파티에서 친구들이.”
기드언은 피식 웃으며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출처가 거기일 줄 알았다.
그는 아내가 친구들과 재밌게 노는 게 좋았다.
부부 싸움을 한 뒤 거기 가서 그의 욕을 실컷 한다 해도, 그녀의 기분이 풀릴 수만 있다면 찬성이었다.
다만 조잡한 훈수를 듣고 와서 그들 부부 사이에 적용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타티아나와 살고 싶은 거지, 타티아나를 둘러싼 이들과 대가족처럼 다 같이 살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궁금한 건 타티아나의 의견과 생각이지, 그 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다.
그렇게 불특정 다수의 의견과 사례들을 끌고 와 근거 삼지 않아도, 그는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아내는 아직 그걸 모르는 걸까?
기드언은 잠깐이라도 좋으니 친구들을 좀 끊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얘기하려다 관두었다.
농담일지언정 아내의 인간관계에 가타부타 말을 얹으면…….
‘시시한 남자처럼 보이겠지.’
그는 말을 삼킨 채 웃기만 했고, 타티아나는 뭐야, 오늘 진짜 이상하네?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그런데 그때, 기드언의 품에 안긴 타티아나의 몸이 뻣뻣하게 곱아들었다.
기드언의 눈빛과 표정도 싸늘하게 돌변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창가를 바라보았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살기가 마치 화살처럼 그들이 탄 마차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드언은 그녀를 보호하듯, 본능적으로 품 안에 숨기려 들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기어이 그를 밀쳐 내고는 창가에 얼굴을 바싹 갖다 붙였다.
밖에 있던 병사들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하나같이 긴장 어린 표정이었다.
기드언은 이번 행사에도 친위대원들을 동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친위대를 대신할 수족들이 있었다.
그가 이제껏 열심히 거둬 먹이고 물밑에서 양성해 온 살수 집단이었다.
기척을 숨긴 채 조용히 따라오던 살수들은 하나둘씩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들 중심에는 흑색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있었다.
케이였다.
그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매복해 있는 적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명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정도는 진작에 파악한 듯, 아무런 망설임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타티아나는 살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운을 감지하고 말았다.
마치 공기가 일렁이는 것 같다.
그녀는 일전에 바이칼이 모닥불을 피울 때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은 그때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바이칼에게서 느낀 잔물결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파도였으며, 해일이었다.
그리고 그 해일 같은 공기가 그들을 덮쳐 오는 순간, 타티아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케이! 피해!”
쾅, 콰쾅-!
누가 화포라도 발사한 것처럼, 숲길 한복판에 흙먼지와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