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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3)화 (85/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6)

적들은 도주로에 마법사를 배치해 놓고, 그들을 이곳으로 몬 것이다.

의도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알았다 해도 뾰족한 방도는 없었을 것 같다.

이미 전열의 허리가 끊어진 뒤였다.

앞으로 가느냐, 뒤로 가느냐의 선택이 있었으나, 어디로 가든 기드언과 타티아나가 이 마법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이라고 같은 자리에서 천년만년 기다리고만 있는 게 아닐 테니 말이다.

앞선 부대와 합류하면 다 함께 여러 명의 마법사를 상대할 텐데, 이미 뒤로 와 버렸으니 남은 건 양쪽에서 각개격파하는 것뿐이었다.

‘근데 마법사를 대체 몇 명이나 동원한 거야?’

과장 좀 보태서 길을 걷다 발에 돌멩이 차이는 것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법사가 이렇게 흔한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방금 전 마법사가 쏘아 올린 불화살이 그다지 위력적이지는 못하다는 것이었다.

기드언의 살수들을 붙잡아 두고 있는 마법사들에 비하면 실로 미약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아직 실력을 단정 짓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들 근처에 숨어 있는 이 마법사는 그저 마력을 안배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자신의 체력과 마력을 비축하는 중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타티아나 측과 용병들은 현재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위에 무작위로 마법을 내리꽂으면 더 큰 피해를 입는 쪽이 누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마법사는 당분간은 계속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저쪽에도 쉽지 않은 싸움일 게 분명하나, 문제는…….

‘다 같이 죽기로 마음먹었을 때지.’

마법사가 정밀 조준을 포기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초겨울의 나무와 수풀은 건조했다.

불 속성 마법을 쓰는 이들에겐 유리한 환경이었다.

그리고 양쪽이 다 같이 타 죽기에도 딱 좋았다.

타티아나와 기드언은 그 전에 이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건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포위망을 점점 좁혀 왔다.

기드언과 타티아나, 그리고 병사들은 주저 없이 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그때, 타티아나를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화살이 날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거다.

타티아나는 불화살을 탕-! 쳐 내며 흙바닥을 뒹굴었다. 그 충격에 검이 멀리 날아가 꽂혀 버렸다.

그녀는 실성한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아, 또 있어, 하, 마법사들 너무 짜증 나…….”

케이는 대체 왜 안 오는 것일까. 설마 변을 당한 건 아니겠지?

타티아나는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콰쾅-! 쾅! 화포 소리를 닮은 폭발음이 들렸고, 대지가 우웅, 하며 흔들렸다.

타티아나는 그 요란한 굉음에 얼굴을 굳히면서도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마법사가 계속 마력을 쏟아붓는 건 그럴 만한 대상이 존재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살수들 또한 끊임없이 저쪽을 괴롭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살수들은 몸이 빠르고 그 누구보다 은신에 능하다.

조준 사격으로 맞추기도 어렵겠지만, 저런 난사로는 더욱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케이는 무사할 거야.’

반드시 살아남아 적의 목을 딴 뒤에 유유히 이쪽으로 걸어올 테지.

그때까지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타티아나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살을 걷어 내다가 무기를 놓쳐 버렸으니, 시체에 꽂혀 있는 검이라도 얼른 뽑아다 쓰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사내들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병사, 용병, 너 나 할 것 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몰려온 이들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양측의 희비는 엇갈렸다.

기드언과 타티아나의 얼굴에는 낙담의 빛이 어렸다.

용병들이었다.

기드언은 얕은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탁 트인 부지에 위치한 왕립 묘지는 수도와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출발한 뒤로 아직 반도 오지 못했으니, 남은 거리가 가깝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마법사의 존재를 확인하기 무섭게 성으로 지원 요청을 보내 놓은 상태였다.

치밀한 성격이라, 시간 차를 두고 몇 명이나 보냈다.

기다리면 원군은 반드시 올 것이다.

시간을 끌면 이쪽이 우세해지는 싸움이었다.

다만 그는 아주 냉정하게, 최악의 상황 또한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와 비슷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는 듯했다.

마법사가 조준을 포기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군의 목숨과 함께 본인의 목숨 또한 내어놓은 것 같았다.

아마도 다급해졌을 테지.

기습을 한 마당에 이 정도로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저들이 다 같이 죽자는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기드언 측도 당장은 저들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전세를 뒤엎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무리의 용병들이 몰려온 뒤로는 수적으로도 불리했다.

한데 기드언이 생각하는 최악은 이게 아니었다.

케이가 저쪽에서 승리하지 못할 경우였다.

만약 저곳에 있는 마법사들마저 여기로 몰려온다면, 그때는 원군이 올 때까지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

기드언은 마른 잎에 옮겨붙은 불을 짓밟아 끄며 적들의 어깨너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였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티.”

“…….”

“틈이 생기면 무조건 빠져나가요. 나도 금방 따라갈 거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어차피 같이는 못 간다.

저들은 왕자와 왕자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성공할 확률이 희박했다.

한 명은 잠시라도 여기 남아 시선을 끌어 주어야 했다.

타티아나는 이 체스판의 왕이 기드언이라 생각했으나, 기드언에게는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변을 당하면 그는 이 싸움에서 지는 거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도, 그 무엇으로도 승리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왜 혼자 도망을 가요.”

그녀는 검사였다. 그리고 블룸이었다.

물론 블룸이라 할지라도 작전상 후퇴는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니까.

그렇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이 함께 싸우던 사람을 놔두고 혼자만 발을 빼는 법은 없었다.

그 사람이 남편이라면 더더욱 갈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호할 거예요. 나는 검사이니까.’

그녀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기드언은 답답한 듯 외쳤다.

“검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하려고!”

타티아나는 그 말에 차아,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시체가 이렇게 즐비한데, 검이야 아무 데서나 주워 오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웃은 건 그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이 그녀의 콤플렉스와 살짝 맞닿아 있어서였다.

그녀도 안다. 자신은 맨손 공격에는 별다른 강점이 없었다.

무기가 없으면 다른 남성 검사들보다 현저하게 전투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먼발치로 날아간 검을 아쉬워하는 대신, 지금 다른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마력석 목걸이였다.

아까부터 몸 안에 뭔가가 조금씩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마력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 지금일까. 아니, 참 고맙긴 한데 타티아나는 솔직히 좀 야속하기도 했다.

기왕 운이 따라 줄 거면 좀 더 제대로 따라 줄 순 없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이건 바이칼 정도의 찰랑거림도 아니었다.

어디서 물이 새기라도 하는 것처럼 졸졸졸졸, 거리는 수준이었다.

왜 검술과 마법은 그녀에게 한 번에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나.

왜 항상 이런 식으로 미약한 가능성만을 보여 주어 사람을 포기하지도 못하게 만드느냐는 말이다.

‘과연 이걸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시도해 볼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이것보다 더 암울할 때에도 마력석과 마법서를 놓지 못했다.

가문의 검술을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정도면 그녀에게는 희박한 가능성이 아니라, 온 세상의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고할 것이다.

타티아나는 결심한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기드언이 멈칫하며 팔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떼어 내며 미소 지었다.

저 당혹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른다.

‘가장 강한 검을 얻은 자가 발터의 왕이 될지어다.’

기드언은 발터의 건국신화와도 같은 그 문장에 별로 연연해하지 않았다.

너무 오만한 거 아니냐고 입을 삐죽거린 적이 있긴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의 태도가 내심으론 좋았다.

그게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집착하고 조바심을 부리는 사람보다는 그의 자신감이 훨씬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강한 검을 구해다 주고, 때로는 직접 그 검이 되어 주고 싶은 것도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전하.”

“…….”

“제가 오늘…… 전하의 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타티아나는 마치 그의 기사가 된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시도라는 걸 방증하듯, 눈빛만큼은 결연했다.

그녀는 곧 입안을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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