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4)화 (86/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7)

기드언은 다시금 타티아나를 제지하려 했다.

지금 무기도 없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는 급한 대로 자신의 검을 내밀었으나 타티아나는 그것마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는 건데?!”

“잠시만요. 지금부터 잠깐만 말 시키지 말아 봐요.”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외쳐 온 게 마법 주문이라지만, 실제로 마력을 사용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조금 더 집중해야만 했다.

기드언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타티아나가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맨몸으로 서 있다간 화살받이가 될 뿐이었다.

그는 낯빛을 굳힌 채 적들에게서 그녀를 비스듬히 가리고 섰다.

마치 그녀의 방패가 되어 주듯이.

타티아나는 그 뒷모습과 든든한 어깨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다가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외우고 있는 마법 주문, 마력이 순환하는 경로들은 몇 개나 될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천 개 정도는 된다.

이게 검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휴식이었으며 탈출구였으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주문은 무엇일까?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전부 다 좋아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마력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외쳐 보고 싶었던 주문쯤은 있다.

타티아나는 어쩔 수 없는 검사라, 마법의 힘을 빌려 자신의 검술을 완성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오늘이 그날이겠지.

그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나지막이 주문을 읊었다.

“바위를 뚫는 낙숫물. 담금질한 쇠. 애벌레의 탈피. 고통을 이긴 자가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을 믿는 자가 마침내 자신을 뛰어넘는다.”

존재여, 너를 당연하게 가둬 오던 형태를 부인하라. 속박을 벗어라.

너의 굳센 의지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타티아나는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마력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이건 일종의 신체 강화 마법이었다.

어떤 병약한 마법사가 밤샘 연구를 하다가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뒤 고안했다지.

그러나 그이는 고작 몇 시간의 말똥말똥한 정신을 보장받고, 나중에는 마력을 탕진하여 뻗어 버렸다고 한다.

마력과 체력을 맞바꾼 것이다.

그리고 마력 소모는 결국 체력 소모로 이어진다.

내일의 체력을 미리 당겨쓴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마법은 전투를 앞둔 검사들에게는 너무나 유용했다.

월등한 실력에 비해 다소 아쉬운 체력을 갖고 있는 기사들에게는 이만한 게 없었다.

‘30분만, 아니, 딱 10분만 버텨 주길.’

난 그 10분이면 모두를 제압할 수 있으니.

타티아나는 생애 첫 마법이 성공하자 떨려 오기 시작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꼭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주문에 돌입했다.

어머니의 장기, 환영 마법이었다.

기드언의 말처럼, 그녀에게는 지금 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들면 된다.

“너의 경험이 상상으로. 상상은 다시 그림으로.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어라. 마음을 다하라. 살아서 움직이리. 나의 경험은 나의 검, 나의 검은……!”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 나의 검은 뭘까.

유년, 현재, 미래, 꿈, 현실, 절망.

무수한 말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굳이 한 가지 단어로만 표현해야만 한다면, 나의 검은…….

“나의 의지.”

그 순간, 타티아나의 손에서 새파란 기운이 쑤욱, 하고 자라났다.

기드언이 선물한 명검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티티?”

기드언은 눈을 크게 떴고, 타티아나는 그 놀란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상상력은 인상 깊은 경험에 기반하는 거라서, 그녀는 무심결에 그의 선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나 보다.

기드언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설명이 필요한 눈치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우리 나중에.’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손끝에서 자라난 마법검을 있는 힘껏 던졌다.

용병들은 허리를 숙이거나 바닥을 구르며 몸을 피했고, 그녀의 검은 그들을 넘어 불화살이 날아왔던 장소를 향했다.

애초부터 그곳을 겨냥한 것이다.

마법사를 없애거나 발을 묶어 놓아야 기드언과 병사들이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새파란 검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나중에는 구체가 되어 땅에 부딪혔고, 펑-! 하는 폭발음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큰 먼지구름이 일어나자, 타티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 주변에 있던 병사 하나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 마법사?”

“…….”

그래, 우리 오늘 마법사 참 많이 본다.

그치?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한두 명 보기도 힘들다던데.

타티아나는 마법사들이 난장을 피우는 이 상황에 자신 또한 일조했음을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그 난장판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녀는 다시 한번 환영 마법의 주문을 외웠고, 손끝에서는 아까와 같은 검의 형상이 또다시 쑤욱, 하고 자라났다.

졸졸졸졸, 새어 나오던 마력은 언제부턴가 몸 안에 가득 차 찰랑거린다.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콸콸 흐르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타티아나는 입안에 감도는 피 맛을 느꼈다.

동시에 뭔가가 울컥, 하며 그녀의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타티아나는 검붉은 핏덩이를 퉤, 뱉어 내고는 입가를 닦았다.

초심자 주제에 이론 좀 안다고, 시작부터 너무 무리한 대가였다.

그녀는 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운동을 강조해 왔다.

증량은 현재 무게에 익숙해진 다음에나 하는 것이다.

그녀의 몸은 아직 이 마력에 적응하지 못했다.

안다. 이게 그 명백한 신호였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란 말인가.

검을 포기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 순간에도 그녀는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며 마차 바퀴에 기름칠하듯이 몸을 단련해 왔다.

그렇게 열심히 닦아 온 바퀴를 오늘 같은 상황에도 굴리지 못할 거면, 대체 언제 굴리란 말인가.

그녀는 꼭 가 보아야만 하는 세계가 있다.

어릴 때부터 염원하던 경지다.

타티아나는 적진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팔을 길게 뻗으며 초승달을 닮은 궤적을 그렸다.

“티티…….”

기드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타티아나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서 저 신호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가문의 검술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1장, 2장, 3장.

타티아나는 아버지가 남긴 책장을 차근차근 넘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손끝으로, 온몸으로.

너무나 닿고 싶었던 그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마검사가 드문 이유는 검술과 마법의 작동 회로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이다.

전력 질주를 하며 정밀화를 그릴 수는 없다고들 하지 않나.

타티아나는 실제로 지금 아주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었다.

마력을 사용해 세상에 둘도 없이 강한 검을 만든다는 건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마력이 아니라 검술 쪽은 어떠할까?

검술은 그녀에게 있어 전력 질주라기보단…… 그냥 호흡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누워서 쉴 때도, 꿈을 꿀 때마저도 그녀는 늘 머릿속으로 검술을 생각했다.

몸에 익을 대로 익어 버린 습관, 그 이상이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히 뛰는 심장박동이었다.

달리면서 그림을 그리기란 쉽지 않겠지.

때로는 불가능하겠지.

그렇지만 만약 숨을 쉬며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면…… 그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사들은 타티아나를 도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기드언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검무를 추듯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적들이 스러져 간다.

새파란 검은 왼손에서 솟아났다가 오른손에서 솟아났으며, 또다시 왼손에서 생겨났다.

자연법칙을 위배하고 있었음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나비처럼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타티아나는 세상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꼭 어린 시절 그들이 처음 만난 순간처럼.

그리고 그녀가 언젠가 실패했던 가문의 검술, 그 마지막 장에 도달한 순간, 기드언은 숨을 죽였다.

타티아나의 얼굴에도 잠시 긴장이 어렸으나, 그녀는 곧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미소다.

곧이어 어둑어둑해진 사위가 환하게 빛났다.

달과 별 때문이 아니었다.

검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번뜩이는 탓이었다.

아마 기드언은 저 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아.”

기드언은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흘렸다.

블룸의 검술, 그 마지막 장.

언젠가 그녀가 실패했던 바로 그 페이지.

타티아나는 기어이 그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쓰러진 적들 사이에 홀로 선 채 희열에 찬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하.”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드언은 어떤 말도 선뜻 꺼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타티아나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마력을 소진한 후폭풍이었다.

기드언은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다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예 바닥에 눕혀 버렸다.

그는 뒤늦게 인상을 찌푸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부부끼리는 다 말하는 거라더니, 정작 그녀는 제일 중요한 내용을 털어놓지 않았다.

기드언이 너무 살벌한 표정을 짓자, 아까까지만 해도 암사자처럼 뛰어놀던 타티아나는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힐끔 눈치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나도 안 지 며칠 안 됐어요.”

“…….”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심지어…….

“오늘 처음 써 봐요.”

“……뭐?”

기드언은 황당해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 하아, 기가 찬다는 듯 몇 번이나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그가 또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화를 안 내려고 마음을 다스리는 중인 것이다.

그녀는 피시시, 웃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나 어땠어요?”

“…….”

“오늘은 많이 실망스럽지 않았죠?”

그러자 허공을 응시하던 기드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이런 말이 다 있나 싶어서였다.

“티티는 나한테 언제나 최고의 검사예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거예요?”

타티아나는 겸연쩍은 듯 미소 지었다.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다.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박수받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검술을 펼쳤고, 염원하던 세계를 보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언에게 감상을 묻는 이유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녀가 가문의 검술을 구현하다 실패했을 때, 기드언은 그날도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때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으니, 이번에는 성공의 기쁨도 함께 나누고 싶어서.

말로 나누면 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부디 앞으로도 내 모든 순간에 당신이 있기를.

타티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휴식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