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2)
익숙한 방이었으나, 주변은 또 온통 마법사들 천지다.
오늘 혹시 무슨 마법사들만의 기념일인가.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날인가.
원래 조용한 사람들이 자리를 깔아 주면 확 돌변해서 요란하게 논다더니.
그러나 타티아나는 아까와는 달리 전혀 긴장감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들 대부분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룸 가에 다 한두 번씩은 방문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다소 울적하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이라고 해 봐야 한 줌이다.
혜성처럼 등장하는 신예가 많은 업계도 아니다.
안면을 익히고 외우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는 이쯤에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발터에 고작 200여 명 남짓이라는 마법사들을 왜 그렇게까지 부러워한 거냐고.
소수의 저들이 특수한 거지, 마력이 없다 해서 그녀가 모자란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당연히 타티아나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녀는 아주 어릴 때, 과장 좀 보태서 세상 사람들이 전부 마법사 아니면 기사인 줄 알았다.
저택에 드나드는 부류가 딱 그 둘뿐이었으니까.
물론 한 명의 예외가 있긴 했다.
왕족도 한 사람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 왕족은 기사들보다 훨씬 더 검을 잘 썼다.
그러니 어린 타티아나가 어떤 기분이었겠나?
남들이 다 하는데 자기만 못하면 애들은 원래 운다.
사람들 다 마력 있어, 힝, 근데 나만 없어, 타티아나도 그런 식으로 훌쩍훌쩍 울었다.
좀 바보 같긴 하지만 어릴 땐 그게 진짜로 서러웠다.
내가 딱히 모자란 게 아니고, 세상 사람들은 원래 대부분 마력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그랬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들이 흘러간 뒤 돌이켜 보니…….
‘나로 사는 건 참 재밌었어.’
그녀는 자신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마음에 든다.
이제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울퉁불퉁 못생기고, 검을 쥐기엔 다소 작은 자신의 손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다시 태어나도 또 나로 살고 싶어…….”
잘하는 것도 있지만, 부족한 점도, 아쉬운 면도 있는 타티아나 블룸으로.
마법사들에게 살기를 뿌리느라 타티아나가 깨어났다는 것도 늦게 알아챈 기드언은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가슴이 철렁했던 이유는 그녀의 말이 흡사 유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발언이었다.
“티티,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녀를 대신하여 대답한 건 한쪽 벽면에 붙어 서 있던 의사였다.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고열 환자의 일반적인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전하. 본래 신열이 오르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전부 다 내뱉기도 합니다. 깊게 고민하고 하는 말들이 아니니 일일이 새겨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기드언이 설마 그걸 모를까.
그러나 이미 그녀가 각혈하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기드언에게는 저 말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불길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섬망 증상이라는 게 온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헛소리가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주변인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얼핏 들으면 제정신 같으니까.
기드언은 실제로 그 섬망 증세를 보이는 환자를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그것도 자그마치 1년이나 말이다.
그 환자는 과거와 실제, 일어나지도 않았던 본인의 망상을 끊임없이 오가며 기드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었다.
기시감을 느낀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침대에 바싹 다가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티티. 정신 좀 차려 봐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응?”
“정신 차린 건데…….”
내가 많이 이상해 보이나?
타티아나는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잘게 웃었다.
그러나 평소의 생기 넘치는 얼굴과는 달리,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어서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침울한 방 분위기를 깨며 마탑주가 들이닥친 건 그때였다.
그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으나, 여든이 넘은 나이였기에 마차를 타고 성까지 왔다.
살수들도 그에게만큼은 거칠게 굴지 못했다.
그러나 기드언은 그런 배려나 특혜를 베풀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노인이 너무 팔팔해 보였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우렁찼다.
“기드언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마탑 주위의 병사들을 물려주십시오!”
“외부 일정 중에 마법사들에게 기습을 받았습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수급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외다. 우리 아이들이 아닙니다.”
“…….”
“전하, 내 비록 늙은이지만, 우리 아이들 얼굴까지 못 알아볼 정도로 총기를 잃지는 않았소이다.”
마탑주가 절절한 목소리로 호소했으나 기드언은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본인이 꾸민 일이라 해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순순히 실토할 리가 있나 싶어서였다.
그러자 마탑주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했다.
“몸에서 발견된 마력석 또한 우리 게 아니오.”
“…….”
“전하께서도 보면 아시잖습니까. 풀만 왕국 겁니다.”
마탑주는 흑요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마력석을 내밀었고, 기드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확실히 발터 광산에서 채굴할 수 있는 마력석은 아니다.
그러나 국경이 가로막힌 것도 아닌데 저것 몇 개 빼돌리는 게 그리 어려울까?
기드언은 마탑이 마법구라면 눈이 뒤집혀 밀거래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탑주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하나 사건에 개입한 마법사들이 마탑 소속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왕실은 마탑 마법사들의 명단과 신원을 모두 확보하여 관리해 왔다. 잠시 마탑에 몸을 담았다가 성과나 재능 부족 등의 사유로 퇴출당한 이들까지 말이다.
현장에서 수습해 온 시신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제3의 인물들이었다.
기드언은 턱을 매만지다가 방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동생 부부가 기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스칼렛은 타티아나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남편인 브라우닝 경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드언은 풀만 왕국 출신인 매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스칼렛은 자신의 남동생이 지금 무슨 의심을 품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기드언! 아니야!”
그러나 브라우닝 경은 괜찮다는 듯 스칼렛의 팔을 붙잡으며 조심스럽게 제지했다.
기드언은 그 모습을 비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마탑주께서 이리 말씀하시는데 매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전하. 아니, 만약 풀만 출신이라 해도 몇몇 마법사들의 단독 행동일 겁니다.”
“…….”
“풀만 왕실은 발터와의 평화를 원합니다. 그게 국왕 폐하께서 즉위하실 때부터 고수해 온 정책 기조입니다.”
“그 말을 책임지고 입증하셔야 할 겁니다.”
기드언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전쟁부터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그때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두 남자가 언쟁을 벌이고 스칼렛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마탑주는 타티아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마탑의 수장직을 괜히 맡고 있는 게 아니라서 타티아나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챘다.
마력이 깨어났다는 것과 그 마력이 폭주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자의 자식은 사자라더니.”
부모가 마법사라 해서 자식이 마력을 갖고 태어나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엔야의 자식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한때 마탑 내부에는 존재했었다.
대마법사는 그때마다 싸늘한 태도로 일관했다.
내 딸의 인생을 멋대로 결정하지 말라나, 뭐라나.
자신을 거둬 키워 준 거나 다름없는 마탑 원로들에게 어찌나 냉랭하게 굴었는지, 그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괘씸한지고. 너도 꼭 너 같은 자식 키워 봐라.’
그런데 엔야는 정말로 자기 같은 자식을 낳아서 키웠나 보다. 딸도 마법사가 되고 말았으니.
엔야가 이 모습을 봤더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노인은 복잡한 눈빛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쉬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청했다.
“누가 의자 좀 주시오. 말을 많이 했더니 어지럽구려.”
그가 뭔가를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챈 케이는 기드언을 응시했다.
어찌할까요, 묻는 시선이었다.
그러자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난 엔야를 갓난쟁이일 때부터 봤소. 비록 피붙이는 아니지만, 딸이나 다름없습니다. 엔야가 그 시커먼 놈과 결혼할 때 식장에 손잡고 들어간 사람도 나요.”
“…….”
“내가 어찌 엔야의 딸이 아프기를 바라겠소.”
기드언은 마탑주를 빤히 바라보다가 케이를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다른 고위급 마법사들에게 치료를 맡겼을 때부터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탑주는 케이가 끌어온 의자 위에 앉으며 주름진 손으로 타티아나의 이마를 짚었다.
“해풍을 만난 고기잡이배. 만선의 꿈이 흔들릴 때, 신이여. 어부를 보호하소서! 그의 가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나이다.”
타티아나는 생전 처음 듣는 주문에 눈을 깜빡거렸다.
원형을 직접 설계하신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의 몸은 점점 편안해졌다. 나중에는 노곤한 기분에 잠마저 솔솔 올 지경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는 타티아나를 보며 노인은 혀를 찼다.
“마력을 처음부터 이리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이런 건 누굴 닮았는지, 원. 엔야는 늘 침착했거늘.”
타티아나는 몽롱한 눈을 하고서도 그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누굴 닮긴. 이런 부분은 엄마지, 엄마.
겉모습만 보고 많이들 오해하는데 아빠는 침착했다.
전투 중에는 용맹해도 집에서는 다정했다.
한 번씩 욱하던 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엄마였고 말이다.
마탑주도 같은 마법사라고 팔이 안으로 굽나 본데, 말은 정확히 해야 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대신 잠과 열에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 보고 싶다…….”
마탑주가 엔야, 엔야 하며 자꾸 대마법사 얘기를 꺼낸 탓이었다.
아픈 사람 앞에서 엄마 얘기하면 어른도 가끔 울컥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