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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7)화 (89/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3)

타티아나의 말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기드언이었다.

그는 얼른 침대맡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우리 보고 왔잖아요. 응? 장인어른이랑 장모님, 나랑 같이 뵙고 왔잖아.”

마탑주가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타티아나의 안색은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기드언의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케이의 칼날이 타티아나를 스치고 지나간 이후로 약간의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제는 피를 토하는 것까지 봐 버렸으니 그 심정이 어떠할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기드언의 귀에는 타티아나가 아까 전부터 중얼거리는 소리가 전부 불길하게 들렸다.

또 태어나도 나로 살고 싶다는 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고, 엄마를 보고 싶다는 건 정말 보러 가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어떻게 보겠나. 방법이라 할 만한 게 뭐가 있는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왕자와 왕자비를 둘러싼 사람들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들 중 유독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고위급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타티아나를 어루만지는 기드언의 손길이 너무나 다정하여 1왕자가 이상한 마법에 걸려 버린 건가? 싶어졌다.

정작 마법사인 그들은 아무런 주문도 외우지 않았고, 그런 마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할 정도로 1왕자의 지금 모습은 그들이 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기드언이 마법사들을 대할 때의 눈빛은 대체로 둘 중에 하나였다.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할 때는 저것들은 밥 먹고 하는 짓이 마법인데 왜 이 정도도 못 할까. 이 나라 마탑의 존재 의의는 뭔가.

어쩌다 연구 성과를 냈을 때는 그래, 이거라도 해야지. 너희한테 들어가는 나라 예산이 얼만데.

공통점은 둘 다 그리 따스한 눈빛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주 계산적이었고 냉정했다.

사실 그들은 이제껏 1왕자가 감정이 별로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왕자도…….

‘자기 아내 앞에서는 다르구나.’

마법사들은 신기하다 못해 얼떨떨한 표정으로 왕자 부부를 힐끔거렸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건 스칼렛 공주였다.

왕자와 비의 사적인 대화를 외부인들에게 너무 많이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의도한 바가 아닌 이상 말이다.

스칼렛은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응급 상황을 대비하여 마법사들과 의사들에게 임시 처소를 배정했다.

덕분에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침실 안에 단둘이 남아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외부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목소리도 좀 전보다 훨씬 다정해졌다.

“기억 안 나요? 몇 시간 전에 뵙고 왔잖아.”

“……기억나죠. 난 지금 머리를 다친 게 아니에요.”

타티아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기드언은 찡그리지 말라는 듯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속으로 인사드렸어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말에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머리 안 다쳤다는데도 그가 사람을 속여 먹으려 해서였다.

“거짓말. 그런 얘기 안 했다면서.”

“마음속으로 했어. 창피해서 비밀로 하려고 한 거예요.”

“……진짜 거짓말.”

당신이 창피한 게 뭔지 알기는 해? 살면서 그런 일 겪어 본 적 있냐고.

미래의 남편 앞에서 눈물의 칼춤을 춰 본 적 없는 자, 내 앞에서 창피함을 논하지 말라.

타티아나는 그와 도란도란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과 대화하는 게 언제나 즐거웠다.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어릴 때는 한마디도 안 했을까, 가끔은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도 어릴 땐 이보다 고집스러웠고, 기드언도 냉랭한 소년이었다.

그때 말을 붙였다면 지금처럼 편안한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겠지.

그녀는 이 안온한 분위기를 조금 더 즐기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아까부터 너무나 졸렸다.

마탑주가 건 마법의 여파와 전투 후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전하, 나 이제 좀 자고 싶어요.”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살짝 불안한 눈치였다.

그녀의 이불을 덮어 주며 그는 못 미더운 듯 덧붙였다.

“빨리 나아요. 아프면…… 용서 안 할 거예요.”

타티아나는 순간 기시감을 느끼고는 내가 저 말을 어디서 들어 봤더라? 생각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저건 그녀가 기드언의 방에서 질질 끌려 나갈 때 한 말이었다.

오늘 당신이 나에게 보인 태도를 잊지 않겠다고,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그런데 그때 기드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하십시오.’

타티아나는 그 혼잣말과도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너무나 화가 난 상태였지만, 그의 말에 여실하게 묻어 있는 감정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것이다.

네가 용서를 하든 말든,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난 상관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는 분명 자책과 씁쓸함, 회한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분한 와중에도 그게 의아했고 속상했으며 또 슬펐던 것 같다.

상처받았지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당신이 알긴 아냐며, 타티아나는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리…… 하십시오?”

“지금 아프겠단 소리예요?”

“맘대로 생각해요.”

“……티티.”

기드언은 오늘따라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아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아내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 마음이 약해져서 난 내세울 게 건강밖에 없다고, 그러니 눈곱만큼도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고는 곧 소록소록 아기처럼 잠이 들었다.

* * *

마탑주와 고위 마법사들은 왕자비의 침실 건넌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케이를 비롯한 살수들도 함께였다.

감시를 위해서였다.

이제 상호 간의 경계를 풀 때도 된 것 같은데, 살수들은 여전히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마탑주는 알 게 뭐냐는 듯 커다란 침대를 차지한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드릉드릉 코까지 고시는 중이었다.

노인이 잠이 없다는 건 틀린 말이다.

사람마다 다른 게 확실하다.

고위 마법사들은 저 두꺼운 신경 줄이 부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침실에 붙어 앉아 1시간에도 몇 번씩 마법사들을 소환해 댔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은 1왕자가 엄청나게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숨소리가 이상하다, 열이 떨어지질 않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린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마법사와 의사들은 그때마다 유심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매번 상태가 똑같았다.

1왕자는 저 예민한 신경을 평소에는 어떻게 다 억누르고 사는 건지 좀 무섭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회복되지 않는다고 조심스레 간언을 올렸다.

그러나 기드언은 마법사와 의사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부름을 받았을까. 마법사들도 이제는 한숨을 돌린 상태였다.

왕자비의 안색이 왕자의 눈에도 양호해 보였는지 호출은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데 마법사들은 이 여유를 만끽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무료한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운동 중독자라면 그들은 연구 중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검사들의 전성기는 이십 대 초중반이지만, 마법사들의 전성기는 대체로 그 이후에 온다.

지식이 쌓이고 혜안이 생길 중년 무렵이 절정이었다.

사오십 대인 그들은 지금 한창 연구의 꽃을 피울 나이였다.

그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하나도 없는 이 방 안은 화려하기는 하나 그들에게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의 연구실 한가운데에 펼쳐 놓고 온 자료들을 떠올리며 손톱을 물어뜯던 마법사는 케이에게 물었다.

“우린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요.”

케이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방이 마음에 안 드시면 지하 감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책 한 권 없는 이곳이 감옥보다 안락한 건 사실이니까.

“……전 이 방이 몹시 마음에 듭니다.”

마법사들은 풀이 죽어 눈치만 보았다.

연구실에서 책이라도 좀 갖다 달라고 요청해 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케이가 너무 무서웠다.

새파랗게 젊은 놈인데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자벨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기드언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비전하의 상태가 이상하다 하십니다.”

몹시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마법사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뚱했다.

앞선 상황들이 그들에게서 위기의식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이번엔 비전하께서 숨을 이렇게 쉬다가 저렇게 쉬셨나? 반듯하게 주무시다가 뒤척거리셨나?

아까보다 땀을 조금 더 흘리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마법사들은 속으로 ‘이이, 또, 또…….’ 구시렁대며 왕자의 소환에 응했다.

왕자비의 침실까지는 몇십 보 채 걸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기드언의 눈치를 보느라 그 몇십 보를 아주 열심히 뛰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방에 도착했을 때, 마법사들은 난생처음으로 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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