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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9)화 (91/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5)

한데 왜일까. 블룸 부인은 생각이 많은지 수심에 젖은 표정이었다.

전쟁 영웅께서는 그런 아내를 위로한답시고 느물느물 웃으며 물었다.

‘우리 여보는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으실까?’

그러나 대마법사께서는 역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저렇게 다정하게 말을 붙이는데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택에 사람들을 못 오게 할까 봐. 기사들도, 마법사들도 전부 다.’

‘……갑자기 왜?’

블룸 부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타냐가 마법을 못한다고 슬퍼해. 주인공이 되고 싶대. 집에 오는 사람들한테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가 봐.’

‘아이인데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타티아나는 그제야 이게 어떤 날의 풍경인지 알아챘다.

어머니가 마력이 없어 실망하는 타티아나를 나무라고, 그 미안함에 밤까지 새워 가며 암호문을 만들어 선물한 날이었다.

어린 타티아나는 어머니를 속상하게 만든 것 같아 주눅이 들었다가 이제는 새로운 문자에 푹 빠져 있었다.

‘타냐가 저러는 건 우리 때문이야. 사람들이 우리한테 가지는 기대가 우리 딸한테까지 이어져서, 타냐는 그걸 느끼는 거야. 저 어린애가 말이야.’

‘…….’

‘여보. 남한테 보여 주기 위해 자기 인생을 살 순 없어. 그건 광대야.’

‘…….’

‘난 타냐가 거기에 연연하다가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워.’

타티아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건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타티아나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본인들 때문이라고 자책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다.

만약에 알았다면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해 주었을 텐데.

아니야, 엄마. 나는 엄마 아빠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실력을 갖추고 싶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어요.

정말로 검과 마법을 좋아해요, 하고.

부모도 자기 자식이 무엇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그 마음과 열정의 크기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던가.

타티아나는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장면이 바뀌듯 부모님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있는데.

이건 타티아나가 만들어 낸 환영이라기보단 목걸이에 각인된 실제 과거다.

이미 일어난 과거는 변하는 게 아니라서 어른 타티아나가 어떤 말을 해도 그녀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을 순 없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애타게 외쳐 본다.

‘사랑해, 엄마, 아빠, 사랑해!’

다행히 그때, 꼬마 타티아나가 창가의 부모님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부모님은 그 모습에 모든 시름을 날려 버리듯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어린 타티아나를 향해 너나 할 것 없이 양손을 흔들어 주었다.

너무나 행복해하시는 모습이었다.

뭉클한 감정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 주변 풍경은 서서히 바뀌었다.

가슴께에 손을 얹고 울컥울컥하는 마음을 내리누르던 타티아나는 약간 뻘쭘해지고 말았다.

눈앞에 또 아버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전에 비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 맞은편에 서 있는 타티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이제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17? 아아…… 18살인가 보다.

정확한 때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면 불과 몇 년 전 기억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목에 어머니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블룸 부인은 원래도 건강이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타고난 건강체인 블룸 경과 타티아나가 한편이 되어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퍼붓곤 했으나, 결과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뚜렷한 징조를 몇 가지 보였으며, 가족들은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하나 아무리 예비한들 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는 그 무렵 울적해하는 타티아나를 위해 어떻게든 짬을 내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다.

‘타냐. 이 일만 끝내고 오면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있자.’

‘안 그래도 돼.’

‘아빠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

‘……성에서 놔준대?’

‘엄살 좀 피워 봐야지. 이제 쉴 때도 됐잖아.’

그녀는 피시시 웃으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어른 타티아나도 깨달았다.

이건 아버지의 마지막 임무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목걸이에 이다음 기록도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범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갑자기 뚝, 하고 멈추어 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이후를 보여 주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곧바로 어머니의 주문을 외우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수도 없이 외워 온 주문이나,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속마음은 다정하지만, 마법에 있어서는 철저하고 엄격했다.

그걸 증명하듯 주문의 서두에는 경고문이 있다.

‘노여움과 슬픔을 함부로 깨우지 말라.’

마무리도 경고인 건 마찬가지다.

지나온 나날과 악수할 수 있는 자만 슬픔을 바라보라고.

받아들일 자신이 없으면 시도하지 말라는 거다.

타티아나는 본인이 지금껏 이 마법의 본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알고 보면 상당히 섬뜩한 주문이었던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지며, 이 상자를 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앞에 두고 등을 돌릴 수 있는 딸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타티아나는 심장이 벌벌 떨려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주문을 외웠다.

‘노여움과 슬픔은 깊은 곳에 잠들라. 함부로 깨우지 말라.’

지나온 나날을 사랑하라. 그들과 악수하며 물 아래를 바라보라.

‘이제 너의 슬픔에서도 빛이 난다.’

그러자 멈춰 있던 장면이 서서히 지나갔고, 타티아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연 베일에 싸여 있던 이 상자를 열어 본 것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았을까.

글쎄. 그것까진 정확하지 않다. 그런 판단을 미처 내릴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타티아나의 눈빛은 수십 번도 더 변했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톱에 파인 살에서 피가 나는 듯했다.

사건 당시, 친위대원들이 그토록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건 이동 마법의 좌표와 시간대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뜻이다.

정보가 샜거나 같은 친위대원의 범행일 확률이 몹시 높았다.

괴한들은 정확히 좌표 주위를 둘러싼 채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친위대원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그리고 타티아나는 입 주위를 복면으로 가린 괴한들 가운데에서 익숙한 눈매를 발견했다.

뮐러 가에 머물 때, 스쳐 가듯 본 적이 있는 사병의 얼굴이었다.

‘하아…… 말도 안 돼…….’

물론 모든 친위대원들이 단칼에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적들이 목과 급소 바로 앞에서 칼을 들이밀었음에도, 몇 명의 친위대원들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또 다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 중심에는 뮐러 공작이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잠시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던 그 감정, 찰나의 착각을 타티아나는 보고 말았다.

‘믿었구나. 도와주러 온 줄 알았구나.’

그게 타티아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상황을 알아챈 아버지가 본인의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은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게 더욱 그녀를 미치게 했다.

몸이 벌벌 떨려 왔다.

양부가 왜? 대체 왜.

사실 이건 왕족과 귀족들이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 못 올라오게 짓밟는 거다.

타티아나도 기드언이 그런 일을 꾸미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뮐러 공작도 그렇게 숙청되었으니까.

그러나 전선에서 같이 싸워 온 동료들의 등에 칼을 꽂는 저 비틀린 세계를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괴한들은 아홉 구의 시신을 사건 현장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좌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위치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북부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부자인 공작은 그런 식으로 의심을 피해 가려 한 것이다.

며칠 동안 목걸이는 기사들과 함께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눈밭을 헤치고 그들을 찾아낸 건 케이와 살수들이었다.

케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곧 은인의 시신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조의를 표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진심 어린 애도가 타티아나에게는 아주 자그마한 위로가 됐다.

그런데 그때, 현장을 확인하던 케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잠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다.’

살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타티아나는 그 언젠가 기드언이 뮐러 공작과의 식사 자리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덟 명의 사망자와 한 명의 실종자.

저자가 바로 그 실종자이자 생존자인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저 기사가 추후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목걸이에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연명하긴 힘들지 않았을까.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거동과 의사 표현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걸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타티아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뒤로 마력석에 각인된 풍경들은 아주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마탑으로 간 목걸이는 여러 마법사의 손을 탔다. 관심도 많이 받았고 애칭도 무수히 얻은 듯했다.

샐리, 안소니, 다이애나…….

그리고 정확히 3년 뒤, 기드언은 마탑에 찾아가 그 목걸이를 내놓으라 했다.

목걸이는 결국 타티아나에게로 되돌아왔고, 그 뒤는 익히 아는 대로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목걸이를 감도는 광채를 발견한다.

그 순간 현실 속 타티아나도 잠에서 깨어나 눈을 번쩍 떴다.

“일어났어요?”

기드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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