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8)
* * *
타티아나는 침실에만 머물며 며칠째 외부 출입을 삼가는 중이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라는 마탑주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이렇게 점잖게 말하지 않았다.
‘괜히 용감한 짓 하지 마시오. 몸을 가지고 괴상한 실험도 할 생각하지 말고. 다른 마법사들이라고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오.’
살수들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자 중재를 해야겠다고 느꼈는지 고위 마법사는 덧붙였다.
‘몸이 마력에 적응해야 하니, 무리하지 말라는 그런 걱정의 말씀이십니다.’
세상에. 여기에도 통역관이 있었군?
타티아나는 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주의 당부가 아니라 해도 그녀는 쉴 생각이었다. 몸 상태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타티아나는 최근 며칠 일반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말았다.
시녀들이 운동을 하다가 앓는 소리를 하면 왜 저렇게 엄살이 심한가, 근엄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잠깐이나마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비실대고 싶어서 그랬을 리 없다.
아프다는 건 이런 느낌이로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참으로 새로운 감각이었다.
조금만 무리해도 이런 상태에 빠지다니, 다들 사는 게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꼬.
이젠 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반인이 아니라서 회복 속도도 남달랐다.
사실은 진작 다 나았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그냥 어디 나갈 기분이 아니라서였다.
“하아, 스트레스. 이 만병의 근원…….”
목걸이가 알려 준 진실은 그녀의 정신을 시시때때로 괴롭히며 일상을 갉아먹으려 했다.
어디 가서 마음껏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성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외부 자극을 모조리 차단하고 운동에만 몰두하는 건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지만, 이외에는 솔직히 방법을 잘 모른다.
타티아나는 결국 맨손 운동에 돌입했다.
오늘도 시작은 물구나무서기였다.
“하아, 피가 또 막 거꾸로 솟네. 기가 막힌다, 진짜.”
왜 이렇게 울컥울컥 화가 나는 건지.
화만 나면 다행인데, 가끔은 눈물도 주룩주룩 났다.
너무 아무 때나 맥락 없이 흐르는 나머지, 기드언이 곁에 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더는 그걸 창피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기사들 중에 약해 보이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앞에서는 눈물을 흘릴 테니 말이다.
그녀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배우자였지만, 동시에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배우자인 게 아닐까.
그러나 타티아나는 기드언에게 아직 꽁한 마음과 서운한 부분 또한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둘 사이는 요즘 들어 다소 삭막했다.
그녀는 기드언에게 말 한 마디 붙이지 않았고, 기드언 또한 억지로 뭔가를 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밤마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잠들기 전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어젯밤, 며칠간의 탐색전을 깨고 기드언이 움직였다.
그렇다고 많이 움직인 건 아니고 딱 손가락 하나만 움직였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검지로 등을 살살 긁어 대자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이제 와서 그녀의 멋진 등에 흠뻑 빠진 건 아닐 테고, 갑자기 낙서가 하고 싶어진 건 더더욱 아닐 테고, 대체 뭘 하는 걸까.
혹시 하트라도 그리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성미의 남자는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그의 손 글씨에 집중했고 기드언은 이렇게 쓰고 있었다.
‘티. 티.’
타티아나는 자신이 기드언을 참 많이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툭 까놓고 말해서 그녀는 기드언과 웃는 포인트가 비슷했다.
기드언도 그녀의 말에 곧잘 웃어 주었지만, 그녀도 기드언의 별 뜻 없는 담백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웃는 포인트가 서로 맞다 한들,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심각한 순간에까지 실소가 새어 나오진 않겠지. 속없이.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웃음을 꾹 참았다.
팟, 하고 터지는 순간 냉전은 종료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대한 무신경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왜요.’
‘나 다른 데 가서 잘까요?’
타티아나는 그 말에 눈을 매섭게 뜨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
며칠 전에 잠깐만 혼자 있고 싶다고 했을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갑자기 또 왜 이러나 싶어서였다.
이 사람은 지난번에 싸우고도 느낀 바가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일전에 내 방이 여관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어떻게 반응했나. 막 이를 빠득, 갈지 않았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는 듯 살벌하게 노려보기도 했다.
그걸 벌써 잊어버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각방 쓰자는 소리를 먼저 할 수 있냐는 거다.
잔뜩 기분이 꼬인 그녀도 며칠째 가만히 참고 있는데 말이다.
‘전하는 저랑 따로 자고 싶어요?’
‘아뇨. 이러다 티티가 또 막사를 칠까 봐 그럽니다.’
‘…….’
‘이젠 진짜로 밖에서 못 자는 날씨예요.’
기드언은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도리어 지난 싸움의 전개를 너무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금 그를 등지며 말했다.
‘안 칠 거니까 그냥 있어요.’
기드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으나…….
‘그렇다고 만지지는 말고요.’
‘……네, 그래요. 그럽시다.’
‘입도 뻥긋하지 말고.’
‘…….’
그러자 그는 고개를 쭈욱, 빼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고 있으라는 거냐는 눈빛을 읽은 타티아나는 덧붙였다.
‘그냥 옆에서 숨만 쉬면서 존재만 하세요.’
‘…….’
‘가구처럼.’
‘가구는 숨을…….’
‘어어? 뻥긋하지 말라니까요?’
이 사람이. 은근슬쩍 자꾸 말을 거네?
타티아나는 기드언과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공작의 일을 처리한 그의 방식이었다.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이 사건에서 그녀를 배제한 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직감했다.
이건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악의를 가지고, 그녀를 기만하거나 조롱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실을 숨긴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염려해서 그런 거다.
사실 그는 더 간단히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테지.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상대의 선의가 마냥 고맙지만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건 사람을 상당히 난감하게 만든다.
무작정 화를 내기에도 애매한 것이다.
나는 당신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를 대할 땐 좀 달리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그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둘 다 마음이 안 상하는 방법은 없나?
타티아나는 두 번째 부부 싸움은 조금 더 이성적으로 임하고 싶었다.
전말을 알게 된 이상, 지난번처럼 무작정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 결과 그녀는 머릿속으로 기드언과 가상 격투를 펼쳤던 과거처럼, 이번에는 종목을 바꾸어 격조 높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피고 측, 변론하십시오.’
‘존경하는 재판장님, 죄송합니다만 제가 원고입니다. 이 소송은 제가 제기했다고요. 아니, 누가 봐도 내가 피해자잖아?!’
이렇게 끊임없이 대본을 수정해 가면서.
약간 구차한 것 같긴 하지만, 귀족들과의 기 싸움에 다져질 대로 다져진 남편과 살다 보면 누구나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정도 준비도 안 하면 여차하는 순간 말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기드언도 그녀가 생각과 할 말을 정리할 때까지는 조금만 더 기다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내가 자기보다 말을 좀 못한다고 해서, 막 어버버할 때, 기습 공격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
그리고 타티아나가 대본을 수정한답시고 ‘당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아?!’ 따위의 질문이나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자벨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비전하.”
“…….”
“혹시 주무시고 계십니까?”
“아니. 왜?”
“친구분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타티아나가 말이 없자, 이자벨은 무슨 가문의 누구, 어느 백작가의 누구, 누구누구의 여식, 하며 길고 긴 소개를 덧붙였다.
물론 불필요한 짓이었다.
어차피 왕자비의 친구임을 자처할 수 있는 사교계 인사는 몇 없었으니까.
스칼렛 공주를 제외하곤 딱 세 명뿐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약간 의아했다.
지금 왕자궁에 외부인이 출입해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기까지 찾아온 친구들을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호위나 시녀들 선에서 제지하지 않은 건 역시 좀 이상했다.
“으음, 일단 들어오라고 해.”
그러자 끼익, 문이 열리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들 세 명이 종종걸음으로 침대까지 달려왔다.
하나 타티아나는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시작부터 벌써 귀가 따가웠기 때문이다.
“비전하, 소식 들었습니다. 무슨 그런 무서운 일이…….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이상하다, 왜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이지?”
“그러게. 오늘따라 유독 튼튼해 보이네. 이거 식은땀 아니죠?”
꾀병이네, 꾀병이야. 얘들아, 이거 사기극이었나 봐.
비전하, 방에서 운동했어.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순간에도 사실 적시를 멈추지 않는 무서운 존재들이다.
걱정이 되어 달려왔던 그녀들은 진짜 아픈 게 맞냐는 듯 몹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눈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타티아나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맨손 운동을 한 탓에 불그죽죽했다. 땀을 흘려 번들번들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 혈색 좋은 얼굴을 떨떠름하게 만들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왔니?”
“걱정돼서 왔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걱정돼서 온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고?
타티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고, 그걸 혹시 추궁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녀들은 갑자기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사실은…….”
“사실은, 뭐.”
“기드언 전하가 사람을 보내셨지 뭐예요. 저희 초대 받았어요.”
타티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응?’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비전하의 쾌유에도 좋을 것 같다고…….”
“어허…….”
이게 대체 뭐지? 내 남편은 또 무슨 속셈이실까?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속내를 추측했다.
이건 친구들이랑 욕을 하든 수다를 떨든 뭐라도 해서 기분을 좀 풀라는 게 아닐까.
곧 있을 부부간의 전투를 대비하여 일단 그녀의 화를 좀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고도의 전략이 아니겠냐는 거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으로 그와 가상 토론을 벌이던 타티아나는 생각했다.
기드언 선수는 역시 변칙 공격에 능하다고.
예상치 못한 잔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