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10)
부관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기드언은 한쪽에 치워 놓았던 서류철을 다시 끌어왔다.
벌써 시끄러운 데다가 말 또한 길어질 게 뻔하니 대비하는 것이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랄까.
스칼렛은 경비병들의 만류를 가뿐히 뿌리치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기드언은 그쪽으로는 시선 한 톨 주지 않았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벌써 주눅이 들었겠지만, 스칼렛은 아니었다.
기드언이 본인 할 일만 하고 있듯이, 그녀도 대뜸 자기 할 말부터 했다.
“요즘 자꾸 로버트를 불러다가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
“괴롭히는 거 아니지?”
턱을 매만지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기드언은 눈동자만 힐끔 들어 올렸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뜻이었다.
기드언은 로버트와 함께 풀만 왕국에 보낼 서한을 작성했을 뿐이었다.
사절단 대표로 보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매형이 그 나라 외무부 고위 관료의 아들인데, 이럴 때 안 써먹으면 언제 써먹으라는 건가 싶다.
물론 그 서한의 내용은 아직 극비라서 기드언과 로버트, 그리고 소수의 부관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칼렛이 무슨 꿍꿍이냐며 따지러 온 걸 보니 비밀은 잘 지켜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스칼렛은 남편이 위험한 일에 발이라도 들였을까 봐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다가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맡겨 줘. 내가 대신할게.”
“뭘 대신합니까?”
“뭐든.”
“……왜 이래요? 진부하게.”
기드언은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자신이 매형을 사지로 몰고 있다고 오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기에, 누이의 저 비장한 표정을 보고서도 웬 유난인가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칼렛은 여전히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그녀는 일전에 마탑주의 입에서 풀만 마법사들의 존재가 언급된 이래 계속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때 남편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기드언이 취조라도 하듯 냉랭한 눈으로 로버트를 몰아붙인 걸 생각하면 아직도 서러웠다.
물론 사실관계를 분명히 해 둬야 하는 문제이긴 했으나,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이 국적을 뛰어넘어 결혼한 과정이 마냥 유쾌하고 동화 같았던 건 아니라서.
“로버트한테 너무 그러지 마. 너 타국에서 무시당하면 얼마나 서러운 줄 알아?”
스칼렛은 투정 섞인 목소리로 기드언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기드언은 이상한 데 꽂혀 버린 눈치였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풀만에 있을 때 누가…… 누이를 무시했습니까?”
네 남편이란 놈은 그때 뭘 하고 있었는데? 설마 가만히 있었어?
기드언이 눈을 부라리자 스칼렛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얘기를 할 의도가 아니었는데 왜 거기로 튀는지 알 수 없었다.
1왕자 부부가 피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터와 풀만은 평화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 초창기에 파티에서 기분 나쁜 일을 몇 번 겪었다 해서 그 평화를 어그러뜨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스칼렛은 기드언의 말을 열심히 부인했다.
“내가 언제 그렇대? 그리고 내가 무시당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야?”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그럼 이제 좀 나가요.”
기드언은 그게 아니라면 되었다는 듯 바로 눈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휘 내젓다가 문득 생각이 나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조만간 성을 나가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준비하고 있어요.”
그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해 스칼렛은 깜빡 속을 뻔했다.
말투만 들으면 ‘아, 그래?’ 하고 그녀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생각해 보니, 곱씹을수록 훨씬 더 이상했다.
지금 나보고 어딜 나가라고?
“……너 나 내쫓니?”
기드언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다시금 서류철만 들여다보았고, 스칼렛은 분개했다.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 아직 왕 아니야.”
그런데 네가 왜 나한테 나가라, 마라 명령이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왕이 아니라는 말이 너무 정곡이었나. 기드언은 대꾸하면서 눈썹을 와락 구겼다.
“그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이니까, 우선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요. 지금은 나도 자세히 얘기 못 해 줍니다.”
스칼렛은 기드언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자신의 남편과 남동생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만약 공무에 얽힌 일이라면, 그녀가 무작정 캐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 설명에 ‘아, 그러십니까? 그럼 이 누이가 기꺼이 따라야죠’ 수긍하고 물러나는 것도 찝찝한 일이었다.
사실은 좀 자존심이 상하고 아니꼬웠다.
스칼렛은 이 불친절한 설명에 항의라도 하듯 그의 성격을 걸고넘어졌다.
“올케도 네가 이런 놈인 거 아니?”
그런데 이 말이 기드언에겐 아직 왕이 아니라는 소리보다 더 정곡이었던 걸까? 그는 스칼렛이 방에 온 이래 가장 심하게 얼굴을 구겼다.
일부러 밉살맞게 말하고 있던 스칼렛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사실 기드언은 지금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의 누이는 이 방에서 그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네 아내는 네가 이런 남자인 걸 다 알고도 결혼한 거니?’
그때 그가 뭐라고 답했었나.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비 앞에선 그 입 꼭 닥치라고 했었나?
가뜩이나 타티아나에게 감추고 싶은 부분을 들켜 버려서 입맛이 썼던 기드언은 싸늘하게 웃었다.
“응. 이제 알아요.”
“어?”
“나 이런 놈인 거 내 비도 잘 아니까 좀 닥치라고요.”
타티아나가 알든 모르든 기드언이 누이에게 닥치라고 말하는 건 똑같았다.
그러나 스칼렛은 그 상스러운 언사보다 다른 부분에 더 놀란 눈치였다.
동그랗게 뜬 눈이 토끼 같았는데, 기드언은 저게 약간은 과장된 표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칼렛은 잘 걸렸다 싶었는지 그때부터 작심을 하고 기드언을 긁기 시작했다.
“어머. 올케가 네 성격을 알아 버렸어?”
“…….”
“웬일이니, 웬일이야. 이걸 어떡하니.”
“…….”
“그럼 너 이제 이혼당하는 거야?”
기드언의 싸늘한 미소는 깊어졌고, 부관들은 헛숨을 삼켰다.
1왕자는 요 며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심기가 저조한 걸로만 치자면 타티아나의 마력이 폭주했을 때보다 요즘이 더했다.
비록 기드언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으나, 부관들끼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부부 싸움을 한 것 같다고.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이혼 얘기를 꺼내는 건…… 다 같이 죽자는 의도인가?
혹시 그렇다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관들은 원망스럽다는 듯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스칼렛은 속정이 깊은 편이었다.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긴 했으나, 나가기 전에는 뒷수습도 제대로 해 주었다.
“근데 올케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을 걸?”
“…….”
“너에 대해 잘 안다고.”
“…….”
“그래도 네가 좋은가 보더라.”
기드언은 그 말에 물끄러미 누이를 바라보았고, 스칼렛은 생긋 웃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부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사람 정신 쏙 빼놓는 데 뭐가 있다고.
몇 마디 안 했는데 무슨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공주의 말을 듣고는 도리어 차분해진 눈치였다.
그는 모처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자신이 타티아나에게 참 잘 보이고 싶어 했다는 것이었다.
딴에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그게 완벽했느냐,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다.
성격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고, 그녀에게 화를 낸 적도 분명 있다.
사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을 꾸미거나 철저하게 감추려고는 안 했다.
나 원래 이래, 성격이 그렇게 썩 좋진 않아, 별로 신사는 아니야, 하듯 일부러 보여 준 적도 있다.
기드언도 그게 무슨 심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 보이고 싶은 동시에 그녀 앞에서는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이 혼재했다.
어른스러운 남자로 비치길 바라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나 또한 알아줬으면, 좋아해 줬으면 하는 어린아이 같은 바람은 대체 왜인가.
스스로가 참 별 볼 일 없게 느껴지는 기분이라 기드언은 조소했다.
그 미소가 심상치 않았는지 부관들은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기드언은 그들을 향해 또 한 번 픽,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내 비가…….”
“…….”
“전부 다 알아 버렸어.”
뭐를? 성격을? 살짝 미친 사람 같을 때가 있다는 거?
그거 방금 공주 전하가 다 얘기했잖아. 그래도 좋다잖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곱씹으면 안 되나?
부관들은 헛다리를 짚기 시작했고, 기드언은 그게 아니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 말고. 뮐러 공작 관련된 거.”
음? 하던 부관들은 기드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하나둘씩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부관들끼리는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기로 이미 합의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소리 내어 의논한 적은 없지만, 이런 건 원래 말 안 해도 아는 것이다.
솔직히 그들 중에는 그래도 비전하가 아셔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이들도 꽤 많았다.
그러나 굳이 앞에 나서서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막말로 비가 깊은 상처를 입고 폐인이 되거나, 부부 사이가 완전히 파탄 나 버리면 그건 남이 책임져 줄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 어쩌다…… 누가, 일단 전 아닙니다.”
“저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전하.”
갑자기 집무실 안에는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넘쳐 났다.
당혹스러워하던 부관들은 생각했다.
이건 왕후의 짓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그들도 기드언 밑에서 손발을 맞춘 게 몇 년인지라, 이 뿌리 깊은 의심의 굴레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일이 잘못되기만 하면 무조건이었다.
하지만 기드언은 그런 부관들을 약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진실을 알려 주었다.
“목걸이가 그랬어.”
“예?”
“목걸이가 고자질한 거라고.”
“……예?”
그것만 아니었으면 완전 범죄가 될 수 있었는데, 기드언도 설마 장모님이 이러실 줄은 몰랐다.
“사위가 마음에 많이 안 드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