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11)
부관들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서로 눈빛만 교환할 뿐이었다.
하지만 왕자비가 알게 되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하께서 수심이 깊어 보였구나.’
부관들은 덩달아 골치가 아파졌다.
왕자비는 지금 괜찮은 걸까?
그들도 근 며칠 얼굴을 보지 못해서 확신할 수 없으나, 사람이라면 마음이 평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갈 길 잃은 분노와 배신감이 기드언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속인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한데 그들은 솔직한 심정으로, 왕자비가 조금만 참작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왕자의 수족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거냐고 비난한다면 그 말이 몹시 옳다.
원래 옆에서 보고 들은 게 있으면 그쪽 입장을 조금 더 헤아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부관들은 블룸 경 사후, 기드언이 어땠는가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해당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기사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군데군데 집착이 서려 있는 과정이었다.
케이가 현장에서 비밀스럽게 기사를 구조해 온 이후, 그이는 약 2개월간 의식불명 상태였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의식을 회복하더라도, 그건 산 게 아닐 거라고.
하지만 기드언은 기사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버텨라. 네 임무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주군의 명이 발목을 붙잡았던 것인가.
기사는 정말로 눈을 떴다. 그러나 먼젓번 의사의 판단도 정확했다.
기사가 생존해 있던 10개월간 내뱉은 단어라고는 ‘엄마, 아빠, 집, 밥’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마저도 웅얼거리거나 꽥꽥거리는 고함이었다.
인지력과 언어 능력이 모조리 퇴행한 듯했다.
부관들의 목표는 그 기사를 회의석상에 세워 이 사건과 왕후와의 연관성을 증언, 혹은 위증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였다.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서 그가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된 것 같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1왕자의 명으로 환자를 보살피던 의사는 간언하곤 했다.
그냥 보내 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눈이라도 편히 감게 해 주시라고.
그러나 기드언은 연민에 젖어 있는 의사에게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네 임무는 환자를 치료하는 거다. 그 외의 가치관을 여기에 개입시키지 마라.’
‘…….’
‘이건 공무다. 사감을 버려.’
부관들은 고개를 조아렸으나, 의사가 겪고 있을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가끔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때도 있다.
연명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일 때, 주변인들은 이 치료를 계속하는 게 옳은 것인가, 혼란에 빠진다.
게다가 환자에게는 더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어릴 적 기억에 젖어 엄마를 찾았고, 또 때로는 망상에 젖어 괴물이 있다고 외칠 뿐이었다.
섬망 증세가 온 사람의 헛소리를 10개월 가까이 듣고 있으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나가 버린다.
부관들도 딱 그 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가 엄마, 아빠, 집, 밥, 괴물 외의 단어를 내뱉었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대, 대장…….’
‘대장이 뭐.’
‘밥…….’
‘하아.’
부관들은 너도나도 한숨을 쉬었으나, 기드언의 눈매는 일순 가늘어졌다.
부관들은 곁눈으로 그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 왕자가 앞으로 오랜 시간 저 말에 집착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기사는 숨을 헐떡이며 본인의 생을 마무리할 조짐을 보였다.
버티라며 비정한 말만 반복해 왔던 기드언은 그제야 명을 거두었다.
‘고생했다. 네 가족은 왕실에서 끝까지 책임지마.’
‘…….’
‘이제 쉬어라.’
그리고 이후, 기드언 측은 집무실에서 꽤 뜨거운 갑론을박을 벌였다.
타티아나가 공작 가에 입적한 지 1년. 데뷔탕트까지 남은 시간도 1년.
기드언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그 계획은 한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공작이 범인일 가능성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부관들은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했다.
기사는 죽기 전까지 헛소리만 몇만 번 반복하고 갔다. 의미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에 공작의 직책을 한 번 불렀다고 해서, 그걸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이 때문에 친위대와 거리를 둔다면, 그건 왕자에게도 손해였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뮐러 가에서 꽤 잘 지내고 있는 듯한데 말이다.
괜히 들쑤셨다가 아니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전하. 이건 증거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드언은 몹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끝내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기사의 눈빛이 그 말을 하던 순간에는 평소와 달랐다는 거였다.
부관들은 대체 뭐가 달랐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속으로는 이런 무엄한 생각까지 했었다.
미친 사람들은 상대의 눈빛이 자신과 같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할 수 있는 건가? 하고.
그런데 너무 무서운 일이지만, 왕자의 의심은 실제로 밝혀졌다.
부관들은 뮐러 공작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걸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다.
독약을 가져오라 명하며, 공작을 유심히 바라보던 기드언.
부관들은 그때 왕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몹시도 궁금해했다.
저 무심한 표정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분노인가, 아니면 후련함인가.
사실 그때 기드언은 상황에 그다지 어울리진 않지만 한 가지 실험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왕립 아카데미 학자의 실험으로, 그는 식물에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고 했다.
반대편 텃밭에는 풀잎에 대고 열심히 욕설을 내뱉는 조수들이 있다지.
말의 내용이 작물의 생장 속도에 끼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것이다.
그 실험은 한 가지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단 말의 내용이 인간에게는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성장기에는 더욱더.
그러니 식물에도 같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한낱 풀잎에도 이러하니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논리를 펴려는 것일 테지.
기드언은 비로소 공작이 타티아나를 곁에 둔 의도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쓰레기와 대화를 나누는 취미는 없었지만, 그 쓰레기가 승리감에 도취한 채 생을 마감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알량한 만족감을 박살 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그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뭐 하나 알려 줄까?’
‘…….’
‘내 비는 사실…… 널 살리고 싶어 해.’
말은 못 하고 있는데, 나야 다 알지. 내가 남편인데 그걸 모르면 누가 알겠어?
‘혹시 네가 이긴 것 같은가?’
부친의 원수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직도 도와주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그 애의 마음이 우스워?
기드언은 조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넌 진 거야. 너는 내 비를 옆에 두고 망치고 싶었겠지만, 결국 네 뜻대로 되지 않았잖아.’
너는 이렇게 벌레처럼 살고 있는데 내 비의 인생과 마음은 여전히 빛난단 말이다.
네가 옆에서 노래를 하든 욕설을 하든 그 애는 거기에 신경도 안 써. 꽃 피우느라 바쁘다고.
그러니 아카데미 학자의 실험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 누구인가.
관계의 주도권은 과연 누구에게 있나.
식물인가, 식물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며 울고 웃는 자들인가.
기드언은 경비병이 대령한 독약 그릇을 집어 던졌다.
‘너 같은 놈에겐 내 비의 검에 죽을 수 있는 영광을 허락지 않겠다.’
그러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그릇에는 아주 약간의 액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죽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스민 약까지 샅샅이 핥아야만 생을 끝낼 수 있을 테고, 그게 공작이 남은 가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드언은 감옥을 나서기 전 공작에게 경고했다.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 비가 나에게 대신 처리해도 좋다고 위임한 건 세 명이거든.’
‘…….’
‘아직 자리 남았어.’
부관들은 그때 하나같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왕자와 비가 비스름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그건 대신 처리해 주겠다는 왕자 일방의 약속이었지, 진짜로 그렇게 하라거나 비밀로 해도 좋다는 비의 허락이 아니었을 텐데…….
게다가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감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는 결국 진실을 알아 버렸다.
시종은 때마침 들어와 타티아나에 대해 고했다.
“방금 친구분들이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비전하께서 나와서 직접 배웅하셨습니다.”
“음……. 기분은?”
“좋아 보이셨습니다. 모처럼 친구분들을 만나서 즐거우신 듯했습니다.”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관들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자, 이렇게 물었다.
“아내한테 혼나러 가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멍하니 듣고 있던 부관들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 전하,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혼이 나시다니요.”
그냥 보통 사람들이 표현하듯 싸우는 거라고 해 주었으면 좋겠다.
농담일지언정 왕자가 어디 가서 혼난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는 그들도 정신적 충격이 컸다.
그러나 기드언은 너무나 태연한 표정이었다.
“왜, 내가 잘못한 거니까 싸우는 게 아니라 혼나는 게 맞지.”
“…….”
“근데 좀 무서워.”
비록 기드언의 표정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그는 실제로 화난 아내가 무서웠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타티아나가 종종 하는 혼잣말과 비슷한 생각이다.
“그냥 한 대 때리고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그, 그러다 죽을 수도…….”
부관들은 무엄한 소리인 것 같아 중간에 말을 삼켰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예전에도 왕자비한테는 아무나 못 덤볐다.
검술만 할 때도 그랬는데, 이제는 마법도 쓴다고 하지 않나.
차라리 이 경우에는 두 대, 세 대, 다섯 대 때려 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끝나는 게 대부분일 테니 말이다.
한 대만 맞아도 진짜 죽을 수 있다는 거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기드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들의 무엄한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다 시종이 내민 검은 외투를 보고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치우라며 셔츠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실컷 무섭다고 늘어놓던 기드언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내를 만나러 가는 게 즐거워 보였다는 거다.
그렇다면 방금까지 한 소리는 엄살인가? 내 아내가 힘이 세다는 자랑인가?
부관들은 유부남의 화법을 따라가는 게 참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