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장. 남편과 사이가 또…… (13)
“전에요. 장인어른이 북부로 떠나기 전에…….”
“…….”
“나한테 사직을 청했어요.”
기드언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타티아나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기드언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어떤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 주었는데, 기드언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 어쩌면 잘못했다고 생각해 온 일을 고백하는데 그녀가 평소보다 더 따뜻한 게 이상해서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절 혼자 두는 게 걸리셨나 봐요.”
타티아나는 그 당시 정황을 설명했고, 기드언은 그럴 테지, 고개를 끄덕이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청을 반려했어요.”
“…….”
“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당신 아버지 같은 기사가 필요했거든요.”
기드언은 사직을 청하는 블룸 경에게 군부 요직과 공작 위를 약조했다.
블룸 경이 더 높은 직책에 관심이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그저 기드언의 개인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현재 자리가 블룸 경에게 비좁아 보였다.
그뿐일까. 기드언은 블룸 같은 기사가 백작 위에 머물러 있는 건 그릇된 처사라고 공개 석상에서 발언한 적도 있었다.
혹시 그게 빌미가 된 게 아닐까. 총애를 감췄어야 하나, 블룸 가에 너무 자주 간 것일까.
그는 타티아나가 너무 궁금했지만, 남들 눈을 생각해서 횟수를 최대한 줄인 것인데 그마저도 과했다는 건가.
“장인어른이 그렇게 된 게 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어요.”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손을 더 꽉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그녀도 뭔가 울컥해서 말이 곧장 나오지 않았다.
기드언은 그게 안쓰럽기도 하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약간은 멋쩍기도 해서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 끝에 씁쓰레함이 묻어났다.
“가끔은 되돌리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너무 헛되고 감상적인 바람이지만요.”
“…….”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더 철저한 계획을 세울 테죠. 그때보단 더 능숙하게 주변을 관리할 거예요.”
“…….”
“그렇지만 나는 블룸 경을 기사로 택하고, 임무를 맡긴 내 결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 안 해요. 난 왕자로서 내 기사들에게 내린 명에 대해 일일이 사과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타티아나는 그의 이런 부분을 두고 당신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옳다. 그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내 명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왕자로서의 입장, 판단과는 별개로…… 나는 티티에게 자주 미안했어요.”
“…….”
“미안해요, 티티. 아버지를 잃게 만들어서. 아버지 없이 살게 해서 정말로 미안해요.”
기드언은 스승을 매장하고 타티아나를 쫓아 백작 저로 향했던 그 밤을 기억한다.
무수한 말들이 머릿속을 휘저었었다. 그 생각들마저 정확히 기억한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알았다면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건 무의미한 가정이잖아,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어…….
그따위 등신 같은 변명을 떠올릴 게 아니라 그냥 사과부터 했다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좋아하는 여자가 아버지를 잃었는데, 무릎을 꿇는 게 대수인가.
아무것도 못 하겠으면 더 꽉 안아 주기라도 할 걸.
무던히도 후회했다.
정말로 되돌리고 싶은 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사과를 건네자 타티아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울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고개를 마구 휘젓기도 했지만, 그녀는 결국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기드언은 그 모습을 보며 난감한 듯 이마를 매만졌다.
그는 뮐러 가 사건과 친부의 이름 앞에서는 타티아나가 아직 덤덤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심하게 울 줄은 몰랐다.
오히려 그의 사과가 촉매제가 된 것 같았다.
사과를 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처분을 앞둔 기분이다.
그는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어떠한 말이라도 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훌쩍훌쩍 코를 들이마시다 손을 동그랗게 말며 눈가를 훔치던 타티아나는 입을 뗐다.
“전하, 나는 괜찮아요.”
눈 밑이 벌써 벌게진 게 기드언의 눈에는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에는 믿음이 갔다.
“앞으로는 더 괜찮아지려고 노력할 거예요.”
“……응.”
“그러니까 전하도 이제 그만 털어 내요. 그 생각 그만하라고. 내가 딸인데, 전하가 나보다 거기에 더 얽매여 있으면 어떡해요.”
“나는 사위니까요.”
사위도 사위 나름대로 느끼는 책임감이 있다.
한 아버지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딸을 데려오면서 아무런 다짐도 없었을까.
기드언도 블룸 가에 대해서는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정말로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남편이 너무 심각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게 싫어서, 일부러 장난스레 이야기했다.
“우리 아빠는 약한 남자는 취급 안 해.”
“검술은 그랬다는 거 인정하는데, 마음은 장인어른이 세상에서 제일 약했어요.”
“솔직히 그건 그렇지.”
타티아나가 너무 쉽게 동의해 버려서 기드언은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왕립 묘지가 있는 방향이었다.
장인어른은 어쩌다 이렇게 맹랑한 딸을 키워 낸 것일까. 비법을 알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회상하듯 덧붙였다.
“우리 아빠, 진짜 좋은 남자였어요. 모든 면이 멋있었어.”
딸이 자신의 부친에 대해 좋은 아버지를 넘어서서 좋은 남자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면 그 아버지는 어떤 기분일까.
기드언은 이게 딸 가진 아버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했다.
부녀 관계에 대한 단상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대하던 모습, 직업적 면모,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평가일 테니.
그러나 그 역시도 타티아나가 너무 아련한 기분에 젖어 있는 건 싫어서…….
기드언은 어느새 자신에게 폭 안겨 있는 타티아나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아롱아롱 맺혀 있는 눈물을 훔쳐 냈다.
그러고는 말을 돌리듯이 물었다.
“오늘 친구들이랑은 뭐하고 놀았어요. 내 욕했어요?”
“그러라고 불러 준 거 아니었어요?”
“……진짜 했어?”
기드언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해도 상관은 없지만, 타티아나가 누구 욕을 했다는 게 좀 신기해서였다.
혹시라도 기분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앞으로도 이 방법을 유용하게 써먹을 생각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곰곰이 되돌아봐도 흉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난 전하가 나한테 어떻게 행동해도 미워하진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어요.”
“…….”
“전하, 그 마음을 이용하면 안 돼요.”
“뭘 이용해.”
“내가 다 받아 준다고 만만하게 보면서 못되게 굴면 안 된다고.”
기드언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참 만만하기도 하겠다, 싶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발터에 있나?
그는 타티아나를 그대로 안아 들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만만하진 않지만 귀여운 건 사실이니까, 방에 가서 같이 좀 놀아야겠다.
타티아나는 그의 목을 얼른 휘감으며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안 무거워요?”
“전혀.”
“그래도 난 근육량이 많아서 다른 여자들보다 무거울 텐데.”
그는 타티아나가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녀가 정말로 그 부분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조금 더 성의를 들여 설명하기로 했다.
“일단 다른 여자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건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고.”
“…….”
“그리고 네가 근육 키우는 동안 나라고 논 게 아니야.”
지금의 두 배, 세 배가 되어도 그는 아무 문제 없이 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근육을 더 키울 생각이라면 남편 허리는 걱정하지 말고 맘껏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 뜻이 잘 전해졌는지 타티아나는 그의 훌륭한 삼각근을 어루만지며 키득거렸다.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팔을 베며 길게 누웠다. 타티아나가 몸을 포개듯 그 위로 올라왔고, 그는 퉁퉁 부을 기미가 보이는 눈가를 응시했다.
“또 귀여운 개구리가 됐네.”
살갗이 얇은 건지, 조금만 울어도 울긋불긋하니 부풀어 오르곤 했다.
혹시라도 쓰라릴까 봐 함부로 손댈 엄두도 안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얼굴을 찡그렸다.
“사과하세요.”
“뭘.”
“여자한테 개구리가 뭐예요?”
“너 개구리 좋아하잖아.”
타티아나는 어?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도마뱀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개구리에 대해서는 선호를 밝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기드언의 입장에선 틈만 나면 개구리 얘기를 해 놓고서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사실 이건 장인어른이 예전에 알려 준 고급 정보이기도 했다.
타티아나가 맨날 들여다보고 있더라고. 가끔 같이 놀기도 하는 눈치라고.
그는 이 정보 출처를 알려 주는 대신 그녀가 궁금해하는 모습을 즐거이 감상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골반을 은근히 움직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폴짝폴짝 뛰어 봐요.”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음흉한 마음을 읽은 타티아나는 핀잔을 주었다.
“개구리 같다면서 그럴 마음이 들어요?”
“그럼.”
어쨌든 개구리 같긴 하다는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양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울상을 지었다.
“나 지금 너무 흉하죠? 매력 없지.”
기드언은 하,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이미 웃음이 터져 버려서 그녀를 달래기엔 역부족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아니에요. 귀여워.”
“거짓말이야. 이거 놀리는 거라고. 지금 웃잖아.”
“진짜예요. 너무 귀여워서 솔직히 가끔 화나.”
“……그게 뭐야.”
“나도 몰라. 근데 솔직히 이렇게 귀여운 건 말이 안 돼요.”
타티아나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귀엽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이제껏 타티아나 이상으로 뭔가를 귀여워해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살면서 본 것 중에 그녀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