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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09)화 (100/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2)

부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케이는 품 안에서 평면도를 꺼냈다.

국왕의 침소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였는데, 타티아나는 이걸 볼 때마다 매번 감탄하고는 했다.

지도 곳곳에서 살수 특유의 매서운 눈썰미와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학을 조금이라도 배운 이라면 이 한 장의 종이에 얼마나 대단하고 위험한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호위병들의 매복 위치, 교대 시간, 은신에 도움을 주는 지형물, 오래되어 더는 사용하지 않는 배수로까지…….

종이에는 온갖 정보들로 빼곡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었다.

초점이 잠입과 무사 귀환, 딱 거기에만 맞춰져 있었다.

이보다 더 목적에 충실한 지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오늘도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얘,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케이는 성의 지리와 내부 구조에 대해 너무나 상세히 꿰고 있었다.

어쩌면 최초 설계자들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왕성이나 군사 시설 같은 건물은 한 사람이 설계하는 법이 없고, 부분 부분 영역을 나누어 공사를 진행하기 마련이다.

타티아나의 침실을 설계한 사람일지라도 기드언의 집무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을 수도 있다.

전체 구조를 극비로 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이 성은 건축 연한이 오래되어, 최초 설계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부 구조를 자세히 알고 있는 이가 정말로 드물다는 거다.

한데 일개 살수가 낡은 배수로 하나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니.

케이가 나중에 딴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골치가 아플 게 분명했다.

그러나 케이가 이와 같은 1급 정보를 알게 되었다며 뛸 듯이 기뻐하거나 음흉한 속내를 품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오산이었다.

살수들도 자기 목숨은 귀하여 너무 위험한 의뢰는 안 받는다.

무거운 비밀을 알게 된 자는 평생 도망만 다니다가 결국 그 비밀의 무게에 치여 죽는다.

케이는 이 정보를 활용하여 또 다른 계략을 꾸미다가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결코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살려 주고 실력을 인정해 준 블룸 경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1왕자 진영에 합류했을 뿐이었다.

목숨 값은 이미 충분히 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음의 빚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추호도 없었다.

주군이 왕이 되는 것을 본 뒤에는 초야에 파묻혀 조용히 살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딱 국새까지만 훔쳐보고.

그건 발터 최고의 살수라 할지라도 쉽게 쌓을 수 없는 이력이니까.

케이는 평면도의 한 지점을 검지로 짚으며 말했다.

“비전하, 저흰 이 방에서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왜?”

“환기구가 쇠창살로 막혀 있습니다. 제거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통로가 좁습니다. 아마 어린아이도 지나갈 수 없을 겁니다.”

타티아나는 탄식하며 다시금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국왕의 침실에서 네 칸 떨어진 방이다.

목표 지점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호위들과 마주쳐야 한다는 거네.”

타티아나의 침실 밖에도 늘 살수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데, 국왕의 침소라면 더 많은 이들이 배치돼 있을 것이다.

그를 대비해 기드언 측 살수들은 그날 밤, 성안에 크게 불을 지를 생각이었다.

진부한 방법이지만, 시선을 돌리고 병력을 조금이라도 분산하기 위해서는 뭐든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국왕의 침소 앞인 만큼 자리를 뜨지 않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테지.

케이가 타티아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바로 그들이었다.

그는 품에서 희한하게 생긴 쇠침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창문은 부수지 않고도 제가 조용히 열 수 있습니다. 특수한 창이라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하나 그 전에 비전하께서 병사들에게 마법을 써 주셔야 합니다. 수면 마법이 가능하시겠는지요.”

“그건 쉽지 않은데…….”

“꼭 수면 마법이 아니더라도 병사들의 눈을 속일 수만 있으면 됩니다. 저는 마법의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타티아나는 고심했다.

이게 케이의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피습 사건 때도 확인한 바 있지만, 프리즈 마법처럼 사람의 자유 의지에 반하는 마법은 성공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신과 신체가 활성화되어 있을 때는 누구든 쉽게 잠에 빠지지 않는다.

동시에 몇 명에게 마법을 걸어야 하는지도 미지수였다.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마력을 최대한 아껴 두어야 할 텐데.

“그냥 네가 수면 혈을 짚으면 안 될까?”

“거기까지 접근하는 동안 눈치채는 자가 있을 겁니다. 소란이 일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건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 놔야 합니다.”

타티아나와 케이는 의견을 교환하며 끊임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나 사건 당일, 현장 상황이 어떠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케이와 타티아나는 자기 분야에 있어서는 엄청난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뭔가 개운하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또 한 명의 완벽주의자인 기드언은 해법이라도 제시하듯 케이에게 명했다.

“마탑주 좀 불러와 봐.”

그는 작전을 시행하기에 앞서, 마탑주에게 확인을 받아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내 비가 이제 마법을 써도 괜찮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 몸 상태야 당사자인 타티아나가 제일 잘 알겠지만, 남편이 ‘괜찮아?’ 물었을 때, 사실 여하를 떠나 그렇다는 답이 돌아오리라는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마력이 안정화되었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더불어 마탑에서 나서 주기만 한다면, 이 작전은 상당히 수월해질 것이다.

고위 마법사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면 뭔들 못 훔칠까.

그러나 마법사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가서 주문이나 외우라고 협박할 생각인 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방법은 많으니까.

기드언은 마탑이 보유하고 있는 마법구의 양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탑은 그에 대해 왕실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다.

마법구는 쓰는 사람이 어떠한 의도를 가졌느냐에 따라 살상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왕실은 너무 위험하겠다 싶은 물건에 대해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수시로 들이닥쳐 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럼 보고서에 없는 물건들이 꼭 한두 개씩은 튀어나왔다.

마법사들이 마법구 앞에서 얼마나 뻔뻔하고 탐욕스러워지는지는 이미 유명하여 발터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병사들이 자기 보물을 뺏어 갈까 봐 소중히 끌어안고는 ‘잠시 외국에서 빌려 온 것이오. 연구가 끝나면 바로 반납할 거요.’ 하며 시치미를 떼곤 했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으면 왕실에 정식으로 항의할 때도 있었다.

‘이거 하나로 대체 어떻게 반란을 일으키오? 자꾸 사람을 나쁜 놈으로 의심하면 진짜 나쁜 놈이 되는 수가 있소?’

‘…….’

‘아니, 정말 그러겠다는 건 아니니까 칼 내려놓으시오. 이 마법구가 지닌 역사적 가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건방지고 웃긴 행태였으나, 기드언은 그걸 그냥 눈감아 줄 때도 많았다.

그라고 마탑 하는 짓이 전부 다 마음에 들어서 넘어가거나 편을 들어준 게 아니었다.

빚을 지워 둔 거다. 그럼 갚아야지.

기드언은 문가를 바라보았고, 곧이어 케이가 마탑주를 대동한 채 들어섰다.

한데 그들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요즘 왕자궁에서 살다시피 하는 고위 마법사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이쯤에서 깨달아야 했다.

이제 발을 빼기에는 상당히 늦었다는 걸.

왕자궁 안에 본인들의 방이 생긴 순간, 거길 자연스럽게 왔다 갔다 하며 기드언이 부르면 아, 왕자 전하께서 부르시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시점에서 남들 눈에는 이미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고위 마법사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마탑주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갈지 알 수 없어서였다.

속을 알기 어려운 왕자도 문제였지만, 그들에게 있어 더 큰 문제는 마탑주였다.

나이가 들면 성격이 좀 죽는다는 건 틀린 말이다.

사람마다 다른 게 확실하다.

마탑주는 가끔 왕족에게마저 말을 가리지 않아서 중재가 필요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마력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수면 향이든 마법 망토든 기척을 감추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 좀 내놔 보라는 거였다.

하지만 마탑주는 제아무리 상대가 왕자라 할지라도 순순히 예, 알겠사옵니다, 할 사람이 아니라서 경계심을 내비쳤다.

“그게 왜 필요한 것이오?”

1왕자와 왕후 측이 벌여 온 승계 분쟁의 역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양측의 갈등은 이제 신경전 수준을 넘어섰다.

성에는 전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왕자가 마법구를 요구하는 것은 왜일까.

마탑주가 볼 때는 목적이 너무나도 빤했다.

1왕자가 뭔가를 달란다고 냅다 갖다 바치면 승계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마탑주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나 기드언은 도리어 입매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정말 알고 싶습니까?”

앞으로의 상세한 일정이 궁금하다면, 얼마든지 공유해 줄 수 있었다.

대환영이었다.

그들의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마탑은 정말로 발을 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공범이 되는 거였다.

기드언은 진짜 그걸 원하냐는 듯 마탑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타티아나는 일순간에 분위기가 팽팽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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