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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10)화 (101/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3)

젊은 왕자와 노련한 마탑주 사이에 수 싸움이 벌어진다면 누가 승리할까.

그건 타티아나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마탑주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기드언의 말을 잘랐다.

“관두시오. 듣지 않겠소이다.”

기드언은 시시하다는 듯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리며 실소했다.

타티아나는 남편의 저 표정이 약간 사람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는 저 표정에 반응한 적이 꽤 많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첫날밤이었다.

기드언이 그녀를 배려하듯 물러나면서도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으면 타티아나는 적극적으로 변하곤 했다.

난 어린아이가 아니고, 전혀 겁먹지 않았다는 걸 남편한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그게 다 기드언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그녀는 오늘에서야 하게 됐다.

다소 늦은 자각이었지만, 거기서 이겨 봐야 또 무엇하겠는가.

첫날밤만 무한대로 미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탑주는 타티아나와 달리 기드언의 도발에 동요하지 않았다.

상대의 표정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기에는 살아온 세월이 좀 길었다.

무엇보다 그 앞에 놓인 사안이 가볍지 않았다.

마탑주는 자신들을 이 문제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치적 중립은 초대 국왕 폐하께서 보장해 주신 권리이자, 왕실과 마탑 간의 맹약이오.”

당신이 왕자라 해도 그걸 깰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는 얼마 전 네가 무슨 권리로 날 내쫓냐는 스칼렛의 발언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왕도 아니지 않냐는 거다.

타티아나는 슬그머니 기드언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거의 유일한 인생 목표가 왕좌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목표가 가문의 검술을 계승하는 것이었듯이 말이다.

아무리 무난한 성품의 소유자일지라도, 그런 부분을 건드리면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드언은 성격이 유한 사람도 아니었다.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기드언은 얼굴로는 예쁘게 웃으며 입으로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생각이 달라질 테지.”

그러자 마탑주는 아주 호탕한 웃음으로 기드언의 말을 부정했다.

“기드언 전하, 제 나이가 이제 팔십 둘입니다. 내가 이 나이에 설마 죽는 걸 두려워할 것 같으시오?”

글쎄.

기드언은 그게 나이와 절대적인 연관성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목숨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자들을 본 적이 있다.

반대로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노욕을 버리지 못한 이들을 본 적 또한 있다. 부왕이 바로 그 후자가 아닌가.

하지만 혹시라도 마탑주가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다른 부분을 자극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신 대에서 마탑이 끝나는 건 두려워하겠지요.”

그 한 마디에 분위기는 냉랭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고위 마법사들은 중재를 하기 위해 따라왔다는 것도 잊은 채 양측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타티아나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기드언이 실제로는 마탑에 위해를 가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일단 살기가 없었고 그냥 느낌이 그러했다.

이제껏 기드언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건 진짜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도리어 기드언은 이 대화를 약간 즐기는 기색마저 풍기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은 의외로 솔직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본인은 전혀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가졌으면서 말이다.

의견에 일관성이 있고 논리가 타당하면, 그는 그 의견이 자신과 다를지라도 일단 들어는 본다.

다만 이대로라면 밤을 지새워도 합의점을 찾기가 힘들 것 같아서 타티아나는 조심스레 끼어들기로 했다.

“마탑주님. 이건 좀 갑작스러운 얘기인데요.”

시선이 모이자, 그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기드언마저 갑자기 뭐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타티아나도 뜬금없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건 사실 마탑주가 가장 혹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엄마가…… 남긴 책들이 몇 권 있어요. 연구 일지 같은 거요.”

엔야 블룸 부인은 딸을 양육하며 쉬지 않고 교재를 만들어 주었다.

발터어로 쓰인 것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모녀 사이에서만 통하는 암호문으로 적혀 있었다.

타티아나는 어릴 때 무슨 발달 놀이라도 하듯 그걸 해석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마법 이론들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블룸 부인은 자신의 딸에게 땅이나 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간 셈이었다.

타티아나는 일전에 자선 경매 행사에 나서며 사람들이 과연 그 가치를 알아봐 줄까,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탑주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약 이 가치를 모른다면, 그는 마탑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었다.

타티아나가 정식으로 해임안을 건의해도 그는 변명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마탑주는 그 저서들의 가치를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말을 꺼낸 타티아나는 흠칫했다.

마탑주가 그야말로 눈을 까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분했는지 이마에는 굵은 핏대마저 서 있었다.

“그게 지금 어딨소!”

“네? 저한테 있다니까요…….”

“지금 제정신이요? 그게 얼마나 귀중한 발터의 자산인데 독식한단 말이오!”

마탑주는 그 책들이 인류 마법사의 발전에 얼마나 큰 자양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타티아나는 몹시 공감했으며 누군가가 어머니의 대단함을 알아주자 뿌듯해졌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이기적이라는 듯 몰아가는 대목에서는 조금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어머, 웃긴다. 혹시 맡겨 놨어요? 그거 내 거예요. 우리 엄마가 나한테 준 거라고요.’

마력석 목걸이는 사건 현장에서 나온 증거품이라 아무 소리 안 하고 내어 줬다.

그렇지만 블룸 부인의 모든 연구와 블룸 경의 검술이 이 나라 공공재인 건 아니었다.

‘그건 그냥 우리 엄마의 육아 교재였어요. 검만 갖고 노는 딸이 혹시라도 책을 소홀히 할까 봐, 문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는 깊은 뜻이었다고요.’

근데 내가 왜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하지?

이러다 나중에는 블룸 저에 있는 흙 한 톨, 개구리 한 마리까지 내어놓으라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몹시 억울했지만, 모친이 살아생전 따르던 어른이라 차마 따지지는 못하고 입술만 비죽였다.

사실 그녀도 그 책들을 독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능하면 어머니의 업적이 더 널리 알려지고, 좋은 쪽으로 쓰이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원래 거래 물품은 상황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손에 꽉 쥐고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안 그러면 태도를 바꾼 상대방에게 뒤통수를 맞는 불상사가 생긴다.

“근데 지금은 드려도 소용이 없어요.”

“……무슨 말이오?”

“해석이 필요하거든요. 특수 기호로 적혀 있다고 해야 하나.”

“…….”

타티아나가 나중에 커서 보니, 그 기호들은 고대 문자들과 유사한 구석이 있었다.

형태는 전혀 달랐으나, 문법 구조만큼은 거기에서 착안한 게 분명했다.

엔야 블룸 부인은 고대 비문 해석의 권위자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만약 충분한 시일이 주어진다면, 마탑의 마법사들도 그 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떠올리기만 한다면, 암호를 해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래에 앞서 자기 물건을 후려치는 바보도 있나?

타티아나는 이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자신뿐이라는 듯 말했다.

현재로서는 그게 사실이니까.

“나중에 정국이 안정되면 천천히 번역본을 써 볼까 해요.”

……그러려면 정국이 안정되어야겠지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중대 발표를 마무리하며 기드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실수한 게 없는지 남편한테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한데 기드언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또 얼굴을 찌푸린 채 벽 모퉁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드언이 그녀 앞에서 화를 다스릴 때 종종 나오는 습관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웃고 싶은데 참는 중이었다.

타티아나는 내심 안도하며 마탑주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기드언보다 훨씬 더 심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 위험한 거래에 응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려면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그 책에 관심 없소, 하는 빈말이 아무리 노력해도 나오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런 마탑주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덧붙였다.

사실 도와준다기보단, 그의 결정을 재촉하고 싶어서 책임을 축소해 준 것에 불과했다.

그래 봐야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아니, 그냥 마법구들만 좀 확인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일단 지금으로선 그래요.”

타티아나는 혹시나 해서 ‘일단’이라는 단서를 달아 놓고, 다시금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도 괜찮나요? 나 지금 너무 얄밉게 굴고 있나요? 하는 뜻이었는데, 기드언은 아까보다 더욱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웃음을 참는 게 힘들었는지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는 중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렇게 구경만 하지 말고 마무리를 좀 해 달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기드언은 아내가 시키자 순순히 거들었다.

“얼마 전 마탑이 올린 보고서에 대해 비정기적인 감사를 벌이는 것뿐입니다. ……뭐, 나도 일단은.”

마탑주는 앓는 소리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그 뒤로도 한동안 고뇌했다.

타티아나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버텼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어떤 인간들인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하는 협박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할지라도, 빠져나갈 구석까지 다 마련해 주고 새로운 마법서를 흔들면 무력해지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마탑주는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엔야 부인의 마법서가 사장되는 건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자리를 뜨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런 거라면 평소대로 마탑에 와서 확인하면 될 게 아니오. 왕실에서 잘하는 거면서 왜 나한테 묻소?”

그는 우리는 언제나처럼 왕실에서 요청한 대로 협조하고, 물품을 잠시 이관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하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마탑주를 보좌하는 고위 마법사들이 제일 잘 아는 듯했다.

그들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문지르며 마탑주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이 종잇장처럼 얄팍하고 갈대처럼 사정없이 나부끼는 신념이 너무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대마법사의 저서가 세상에 또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나 마탑주나 결국 다 똑같은 마법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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