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5)
그사이 타티아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국왕의 후원에는 병사들이 정해진 위치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타티아나와 케이는 살수들을 동원해 성 어딘가에 불을 지르거나 소요 사태를 일으키려던 최초의 계획을 수정했다.
타티아나가 내심 우려하던 부분을 기드언 또한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감각이 활성화되면 여간해선 잠들지 않는다.
만일 주변에 소란이 인다면, 그때도 수면 마법이 통할 것인가?
신경이 바싹 곤두서는 돌발 상황과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고요.
어떤 환경이 타티아나에게 더 유리할까.
불을 지르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지 모른다는 기드언의 지적은 현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타티아나는 대단위 수면 마법을 준비해야만 했다.
오늘 들어 벌써 세 번째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가슴을 토닥이는 부드러운 손길. 어머니의 자장가. 밤은 공포가 아닌 휴식이다. 받아들여라. 무의식에 몸을 맡겨라. 너는 다시 아이로 돌아가 아무런 걱정 없이 요람에서 잠이 들 수 있을지어다.”
케이는 그사이 나무 위의 병사 둘을 처리하고는 수면 침을 품 안에 갈무리하고 있었다.
주문의 효력이 다했는지 그림자처럼 희끄무레하던 망토의 윤곽이 지금은 너무나 선명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응시했다.
혹시라도 잠들지 못한 채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이가 있을까 봐서였다.
그런데 양 떼를 몰다 보면 무리를 이탈하는 어린 양이 꼭 한 마리씩은 나온다. 저기에도 있었다.
타티아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니요, 제발 좀 푹 주무세요. 자리 다 깔아 주고 자장가까지 불러 줬는데 왜 기를 쓰고 안 자지?’
케이의 미간에도 미세한 실금이 갔다. 수면 침을 날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마력은 무한대가 아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 최소한의 마력을 예비해 둘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계획은 목격자가 한 명이라도 존재하면 더 이상 진행이 불가했다.
타티아나는 이를 질끈 깨물고는 다시금 수면 마법을 걸었다.
이미 잠든 이들에게는 폭면의 밤이 되리라.
케이도 한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얇은 침을 휙, 집어 던졌다. 하품을 길게 하던 병사가 마침내 잠이 든 건 그 수면 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티아나의 마법 때문이었을까.
그것까지는 정확하지 않다.
뭐가 먼저였는지 따지고 있을 시간 또한 없었다.
케이는 아까보다 조금 더 굵고 긴 침을 꺼내 들고는 창문 잠금쇠에 꽂아 넣으며 타티아나에게 턱짓했다.
얼른 이쪽으로 건너오라는 뜻이었는데, 그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벽에 매달려 있었다.
그간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하며 흘려 온 땀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절감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침실 안으로 냉큼 몸을 밀어 넣었고, 그 즉시 바닥을 기어 다니기라도 할 것처럼 납작 엎드렸다.
창문 밖에서 내다보는 이는 없었으나, 두 사람 다 그냥 본능이었다.
타티아나는 그걸로도 모자라 이 방 또한 마법으로 폐쇄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까딱 잘못하면 그녀는 체력이 소진되어 밖에 있는 이들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그러면 케이는 국새뿐만이 아니라 성인 여성도 한 명 들쳐 메고 왕자궁까지 가야 했다.
동료에게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가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끔찍했다.
그리고 그녀가 혼자 고뇌하다 결론을 내리는 사이, 케이는 국왕의 손가락에서 알이 굵은 반지를 빼냈다.
침실 안에는 중요한 서류들을 넣어 두는 금고가 있다.
그 열쇠는 시종장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그건 사실 눈속임에 불과했다.
금고 뒷면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숨어 있고, 진짜 열쇠는 바로 이 반지였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기드언은 한때 침실 주변에 눈이 좋은 살수들을 잠복시켜 놓고, 온갖 결재 서류를 이 방으로 올려 보냈다.
그중에는 굳이 왕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안들도 많았다.
왕의 시종들은 1왕자의 판단력과 일 처리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나, 의아했겠지만 그건 사실 다 오늘을 위함이었다.
타티아나는 도둑질은 진짜 도둑에게 맡겨 놓은 채, 침대 위의 국왕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이 이토록 빤히 쳐다보는데도, 잠에 취한 건지 병세를 다스리는 약에 취한 건지 미동조차 없다.
타티아나의 마음이 복잡한 건 이 초췌한 남자가 발터의 왕인 동시에 그녀의 시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으음, 아버님……?’
왕후에게도 어머님 소리가 쉽사리 안 나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더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을 한 뒤로 몇 번 뵌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부친을 따라 병영에 드나들던 시절에 배알한 횟수가 오히려 더 많을 것이다.
국왕은 자신의 며느리가 언젠가 도둑이 되어 이 방에 숨어들리란 걸 예상했을까?
절대 못 했겠지.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겠지.
그런데 타티아나도 본인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녀 쪽에서 이 결혼을 엎…… 그래도 그녀는 결국 기드언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것 같긴 하다.
새어머니는 물론이고 친아버지도 그의 편이 아니니, 그녀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기드언이 왕이 되는 날, 그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누구보다 큰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친구가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케이는 상념에 잠겨 있는 타티아나의 눈앞에 손을 휘저었다.
타티아나가 ‘벌써?’ 하며 입으로 묻자 그는 어른 손바닥만 한 국새를 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그 표정이…… 몹시 산뜻해 보였다.
모종의 성취감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세상에. 얘 좀 봐. 지금 행복한가 보네? ……도둑들이란.’
타티아나는 눈을 흘겼고, 케이는 묵묵히 국왕의 손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왔던 길을 되짚어 그들의 중간 거점인 비품 창고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이제 환기구로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은 안심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타티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어떡해! 벌써 왔나 봐!’
딴에는 몹시 서두른 것인데, 벌써 교대 시간인 듯했다.
밖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만약 한두 명이 잠들어 있다면 병사들끼리는 그냥 혀를 차고 말 것이다.
한심하다는 듯 등허리를 걷어차거나, 들어가서 자라며 어깨를 툭, 툭 쳐 주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원의 모든 이가 잠들어 있다면 저들은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케이와 눈빛을 교환한 타티아나는 얼른 천장에 매달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서두르란 말도 사치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환기구 위로 기어 올라갔고, 다음 차례는 케이였다.
그런데 케이는 이 바쁜 와중에도 쇠창살을 원 상태로 재조립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손놀림이 여전히 침착하고 정교해서 타티아나는 혀를 내둘렀다.
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사실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다.
도토리 키 재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를 판가름 짓는 건 바로 저러한 일 처리였다.
저 사소함이 큰 차이를 낳는다.
이렇게 훌륭한 동료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타티아나는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한 마리의 네발짐승이 되어 빠르게 손발을 움직였다.
통로를 후다닥 기어가는 모양새가 이제는 너무나 그럴듯하여, 오늘 처음 해 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뒤따르는 케이도 타티아나와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저 담대함과 빠른 적응력.
왕자비란 신분만 아니었으면 대도가 되고도 남을 자질이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둘 중 어떤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터 최고의 살수와 한때는 밥 먹고 보법만 연구한 타티아나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도주했다.
어둠 속을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타티아나는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으며 등 뒤의 상황을 유추했다.
지금쯤 국왕의 침소 주변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건 모두가 인지했겠지.
하지만 정확한 사건 정황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국왕 주변에는 이제 헌신적인 기사도, 뛰어난 책사도 없으니 말이다.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지는 태양에 누가 인생을 걸겠나.
타티아나는 케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왕자궁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곧이어 익숙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 앞에 기드언이 나와 있었다.
그녀의 태양이자, 달과 별이며, 세상이었다.
검처럼 아름답고 마법처럼 신비한 한 명의 세계.
타티아나는 복면과 로브를 벗어 던지며 활짝 웃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법을 써서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얼른 따뜻한 물로 씻고 푹 자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남편의 얼굴을 보니 다시금 힘이 불끈 솟았던 것이다.
“전하!”
“하아, 티티.”
그녀가 와락 안겨 들자, 기드언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추어올렸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탓인지 타티아나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런데…… 기드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심장도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게 너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편의 탄탄한 대흉근을 잠시 만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