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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18)화 (108/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11)

* * *

새하얀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침대에 누워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달빛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었으나, 그들이 입고 있는 건 침의가 아니라 잠행복이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이 되리라는 걸 예상이라도 하듯이.

기드언 측은 초저녁, 첩보를 하나 입수했다. 수도에 군사 행동이 감지된다는 내용이었다.

첩보라는 것은 본래 들어맞을 가능성 못지않게 빗나갈 가능성 또한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각이 예리한 검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주변 공기의 변화가 있었다.

기드언은 차분한 태도로 허리춤에 검집을 차고는 타티아나에게도 검을 건넸다.

그녀는 얼결에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가 마치 이게 왕에게 기사 서임을 받는 순간 같다고 생각했다.

“전하, 제가 오늘 전하의 검이 되어…….”

“그거 하지 마.”

기드언은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이상하다며, 거기까지만 하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타티아나는 잘게 웃었고, 때맞추어 방문 밖에서 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비전하, 군사들이 성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케이 외에도 여러 명의 살수들이 몰려와 있었다.

기드언은 그들에게 명했다.

“계획한 대로 움직여라.”

“예, 전하.”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뒤를 따르려다 말고 케이의 팔뚝을 붙잡고 당부했다.

“내 시녀 좀 부탁해.”

“이미 밑에 놈이 들쳐 메고 나갔습니다.”

그녀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인사했다.

그럼 우리, 밖에서 만나자고.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왕성의 북서쪽에 위치한 사료 보관소 지붕에 앉아 있었다.

실컷 성을 휘젓고 다닌 그들은 땀을 식히며 성안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드언은 다소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으나, 타티아나의 눈빛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럴 수가. 전하와 나의 공동 명의 재산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사람이 안에 없으면 그냥 그런 줄 알 것이지, 왜 남의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일까?

그러나 기드언과 타티아나 측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되었다.

불은 살수들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을 빠져나가기 전 최대한 큰 소란을 일으켜 이 사태를 만방에 알리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양측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대충 들어 보니 왕자궁에 군홧발을 들인 수도 방위군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1왕자가 국왕을 유폐하고 왕권을 침탈하려 한다고. 폐하를 지키자고.

2왕자만으로는 명분 싸움에서 밀리니, 국왕의 존재를 앞세우는 듯했다.

그에 맞서 기드언 측 병사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폐하의 재가 없는 군사 행동은 반란이라고. 왕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한데 양측의 고함이 섞여, 내용을 대충 알고 있는 타티아나에게마저도 그 구호가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수도를 빠져나갈 때는 우리 쪽 병사들의 목소리에 확성 마법을 걸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온 수도 사람들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과 1왕자가 새어머니에게 부당하게 쫓겨났다는 걸 인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기드언이 신민들에게 동정표를 살 수 있을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차라리 빨리 북부로 가서 전공을 세우는 쪽이 평소 이미지와 잘 맞는다고, 타티아나는 자기 남편이지만 아주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것일까. 기드언은 그만 가자는 듯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턱짓했다.

하나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녀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타티아나는 수도 부근을 벗어나서 살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종종 외부 일정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기드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날 때부터 왕성이 자기 집이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몹시도 초연해 보여 타티아나는 물었다.

“아쉽지 않나요?”

“뭐가?”

“그냥. 이렇게 성을 두고 떠나는 게요. 뭐랄까, 왕좌를 목전에 두고 물러나는 것 같잖아요.”

“…….”

“전하는 이런 경험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이건 포기도 실패도 패퇴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전략적 후퇴 정도일까?

그러나 타티아나가 생각할 때 기드언은 이 정도 아쉬움에도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기드언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얘가 장인어른이랑 비슷한 소리를 하네, 싶었기 때문이다.

블룸 경은 예전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하는 늘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성공해 버린다고.

기드언은 그 말을 새겨듣기는 했으나,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잠깐의 실패나 칼을 가는 기다림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매번 한계를 체감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로는 분명히 안다는 거다.

“참 상투적인 말이 될 것 같지만, 티티의 예를 들어 볼게요.”

“……응.”

“사람들은 요즘 티티가 마법사라는 것에 열광하죠? 대부분은 당신이 역시 대마법사의 딸이었다고, 이제 와 그렇게 말합니다. 이게 필연이었다는 듯 말이에요.”

“…….”

“하지만 티티가 한순간도 마법을 놓은 적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아요.”

이건 대마법사의 딸로 태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결과가 아닌데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정진한 건 바로 그녀다.

어디엔가 잠들어 있던 마력이 깨어났을 때, 그 기회를 타티아나가 놓치지 않고 움켜쥘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좌절 속에서도 계속 염원하고 시도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외로운 노력을 남편인 자신마저 몰라준다면 누가 알아줄까.

“사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는 겁니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건 인내를 갖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걸 나도 알아요.”

“…….”

“내게는 왕좌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

타티아나는 말끔하기 짝이 없는 그의 답변을 잠시 곱씹었다. 그러다 피시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그녀는 종종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며, 그렇다면 나에게는 대체 몇 명의 어머니가 계신 거냐고 자조하고는 했다.

사실 그녀는 그 말이 의문스러울 때도, 자기 위로처럼 들릴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정말로 실패의 경험이 필요한가?

사람을 성장케 하는 건 실패보단 성공이 아닐까?

만약 살면서 영원히 성공만 누릴 수 있다면, 누가 그 우울한 실패의 경험을 하려 들 것인가?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 없이 야속하게도 한두 번쯤은 고난이 닥치기 마련이다.

실패는 그 고난을 견디는 역치를 높여 준다.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 낼 힘을 키워 주는 것이다.

한데 살면서 그리 큰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기드언은 사실 세상 누구보다 이 역치가 높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타는 성을 보면서도 저렇게나 담담하고 초연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쉬워하는 건 그녀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쉬움을 느낀 것일까?

기드언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 다시 옵시다. 봄이 오기 전에.”

“…….”

“그때 나랑 같이 꼭 왕좌로 가 줘요.”

“……응, 꼭 같이 다시 와요.”

타티아나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를 약속하는 그의 말이 너무나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지붕 위에서 일어났고, 타티아나는 도주 전, 아주 사소한 꾀를 한 가지 생각해 냈다.

그들을 찾아 헤매는 병사들에게 약간의 혼선을 주기로 한 것이다.

마법사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은 마력의 크고 작음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타티아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하나 그녀는 중요한 게 몇 가지 더 있다고 생각했다.

응용력. 순간순간의 기지.

자신이 갖고 있는 수천 가지의 주문들 중에 무엇을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판단력.

타티아나는 이 순간 환영 마법을 선택했고, 소리 내어 주문을 외쳤다.

“너의 경험이 상상으로. 상상은 다시 그림으로.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어라. 마음을 다하라. 살아서 움직이리.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건…… 전하랑 나.”

그러자 성을 샅샅이 뒤지던 병사들 사이에 일순간 소란이 일었다.

“1왕자다!”

“왕자비도 함께 있습니다!”

기드언은 좀 신기했는지 자신과 타티아나를 똑 닮은 환영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환영을 쫓던 병사들은 갑자기 멈칫거렸다.

뭔가를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들이었다.

기드언은 이내 난감한 듯 이마를 매만졌다.

웃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티티.”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요. 나도 뭐가 문제인지 잘 알 것 같으니까.”

환영은 실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잊지 않고 그림자까지 세심하게 구현해 냈다.

그러나 도주를 하는 사람들치고 저들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해맑게 웃는 타티아나의 환영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어다녔고, 기드언의 환영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피식거리다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며 사랑놀음 중인 신혼부부 같았다.

“사람은 처음 만들어 봐서 그래요.”

“…….”

“진짜예요. 다시 하면 더 잘 할 수 있어요.”

“…….”

“사실 난 전하가 조급해하는 모습이 상상이 잘 안 돼……. 불쌍한 건 더 안 돼.”

타티아나는 울상을 지었다.

기드언은 저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다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이미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온 뒤라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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