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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19)화 (109/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12)

성안의 병사들은 끝까지 환영을 뒤쫓았다.

비록 위화감을 느끼긴 했으나, 저게 가짜일 거라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1왕자의 어깨를 움켜쥐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환영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이게 무슨……. 사라졌어.”

“마법, 마법이다!”

사위는 1왕자 부부가 성 한복판에 등장했을 때보다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타티아나는 기왕 들킨 김에 몇 쌍 더 만들어 보기로 했다.

들통이 났다고는 하지만, 저들은 환영을 방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 진짜라도 섞여 있으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타티아나는 좀 전보다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주문을 읊었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기드언에 대한 생각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언제든 바깥으로 꺼내 놓을 수 있었다.

“또 나타났다!”

“도망간다, 잡아라!”

타티아나는 그 아수라장을 내려다보다가 기드언을 흘끔거렸다.

채점이라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기드언은 아주 짧게 감상을 표했다.

“훨씬 낫네.”

물론 두 번째 버전에서도 탈주하는 사람들 특유의 조급한 기색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표정들이 훨씬 심각하고 진지했다.

단점을 보완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거봐. 하니까 늘지?’

상처 입었던 자존심을 회복한 타티아나는 곧장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물량 공세를 펼치기로 한 것이다.

환영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설치고 다니면 병사들도 전열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

한 쌍, 두 쌍, 세 쌍…….

기드언은 점점 그 숫자가 불어 가는 자신과 타티아나의 모조품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마법이란 응용하기 나름이라는 걸, 본의 아니게 체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대량 생산을 하다 보면 규격을 벗어난 불량품이 꼭 하나씩은 섞이게 되는 법이다.

저기에도 있었다.

물론 불량품이라고 일컫기엔 좀 심하게 귀여웠지만.

기드언은 열 몇 살 무렵의 타티아나와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인지라, 타티아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서서히 얼굴을 찌푸렸다.

참 야속하게도 어린 시절의 환영마저 실제와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 반절만 한 키의 타티아나는 병사들 사이를 휘저으며……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현실 반영이 지나쳤다.

“요즘 문득 드는 생각인데, 제가 저 무렵에 비염을 앓았던 것 같아요.”

기드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냥 어릴 때 좀 울보였던 거지, 갑자기 무슨 비염을 들먹이나 싶어서.

그가 알기로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다시금 어린 시절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다른 환영들을 열심히 쫓으면서도 꼬마 타티아나만큼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들도 저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 해맑은 아이가 나타나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검을 들이대려니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기드언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티티, 환영 마법이 혹시…….”

“혹시 뭐요?”

“마법을 쓰는 사람의 기분 상태와도 관련이 있어요?”

“…….”

환영들은 최초 버전보다는 훨씬 상황에 걸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음울한 기색은 아니었다.

비장함이 느껴진다면 모를까.

그리고 타티아나는 움찔하더니 기드언의 질문을 못 들은 체했다. 너무나 정곡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시전자의 마음 상태 그 자체였다.

타티아나는 그 연관성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블룸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다음 날, 집에는 꼭 무슨 사건이 생기곤 했으니까.

그 대표적인 게 화재였다.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다는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하셨나 보다.

그 결과 블룸 경은 살면서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부분이 생겨도 아내한테 한마디도 못 했다.

그러다 집이 전소해 버리면 잘 곳이 없으니까.

타티아나는 차마 이런 얘기까지는 할 수 없어 딴청을 피웠으나, 기드언이 답을 알아채기에는 충분했다.

아내의 심기를 추정할 수 있는 마법이라니.

아주 좋은 팁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뜻밖의 수확을 얻은 그는 길게 웃으며 타티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가요.”

타티아나는 아직도 환영의 완성도에 미련이 남아서 머뭇거렸다.

하나 기드언은 이 정도면 정말로 충분히 했지 싶었다.

“대체 얼마나 더 만들 건데. 이러다 나랑 티티로 군대 하나 나오겠어요.”

타티아나는 그 말에 잠자코 그의 손을 잡았다.

어떤 걸출한 마법사일지라도, 그 정도 만들고 나면 영원히 못 깨어난다.

고집을 부릴 문제가 아니었다.

사료 보관소 지붕 위를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처마 끝에서 멈춰 섰다.

그는 건너편 건물로 넘어가기 전, 혹시나 해서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건물 사이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안길래요?”

“…….”

타티아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답변을 대신했고, 기드언은 뜻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이면 직접 옮겨 주고 싶었지만, 아내는 이런 배려가 전혀 필요치 않은 눈치였다.

그게 사실이기도 해서, 그는 앞장서서 허공을 뛰어넘었다.

타티아나는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평소라면 이 정도는 가뿐히 건넜을 그녀는 건물 지붕에 발을 디디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드언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소리쳤다.

“짧아!”

그 외침이 먼저였는지, 휘청거리는 팔뚝을 잡아끈 게 먼저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바닥으로 추락할 뻔한 타티아나를 간신히 낚아챈 기드언은 심장 언저리를 지그시 누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성에 어떤 난리가 나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방금 그녀 때문에 수명이 감소한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해 놓고 타티아나는 이상한 부분에 집착했다.

“뭐가 짧다는 거죠?”

“……어?”

“설마 다리?”

타티아나는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도 다급하여 헛나온 말일 게 분명하다. 그녀는 절대…… 짧지 않았다.

기드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말을 정확히 고쳤다.

“도움닫기가 좀 짧았다는 거예요.”

“그치? 오해할 뻔했잖아요. 그리고 도움닫기도 절대 짧지 않았어요.”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있나.

마법을 쓴 직후라,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것뿐이었다.

만약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무게중심을 바로잡았을 것이다.

자존심이 있지, 처마 끝이라도 부여잡고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기드언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그녀를 제대로 안아 들었다.

역시 그에게는 이쪽이 훨씬 더 안정감이 있었다.

타티아나도 어지럼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군소리 없이 몸을 맡겼고, 기드언은 그녀를 안은 채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건물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지막 지붕 위에서 또 한 번 멈추어 섰다.

그들의 시선 끝에 아담한 크기의 문이 있었다.

내성과 외성을 오가는 무수한 통로 중 하나였으나, 경계는 삼엄하지 않았다.

주로 말구종들이 이용하는 곳인 데다, 살수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왕자궁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을 지키고 있는 건 몇 명의 경비병들이 전부였다.

기드언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품 안에서 얇고 날카로운 쇠침을 꺼냈다.

케이가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타티아나가 뭐라 물을 새도 없이, 그는 연달아 쇠침을 날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어떤 부위를 노렸는지 정확히 알아보았다. 수면 혈 자리였다.

타티아나는 케이가 국왕의 경비병들에게 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뿐일까. 비슷한 걸 직접 당해 본 경험도 있다.

일전에 부부 싸움을 할 때, 기드언은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를 잠재워 버렸던 것이다.

그때는 너무나 황당하여 따져 묻지도 못했는데, 이제 보니 그녀의 남편은 살수들을 거느리며 별 희한한 기술들을 습득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왕자가 이런 것까지 잘해 버리면 어떡하나. 이러면 살수가 필요 없지 않나.

타티아나는 순식간에 혼절한 경비병들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나중에 나도 가르쳐 줘요.”

기드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두 사람은 이내 벽을 타고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잠이 든 경비병들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찾으려 할 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곧바로 검을 뽑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이칼 왕자였다.

‘어떻게…….’

타티아나는 비록 마력의 수준은 미비하나, 그 또한 마법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바이칼은 타티아나가 부린 환영 마법들을 보며, 마력의 발원지와 그들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 낸 것이다.

그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쫓아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제자에게 박수를 쳐 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눈동자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실 이 싸움은 참으로 단순하다.

여기서 바이칼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아주 쉽게 종지부를 찍어 버릴 수 있다.

기드언은 자신의 아우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만약 바이칼을 제거해야 한다면,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 일을 행할 사람은 누구인가.

어쩌면 그건 기드언이 아니라 타티아나일지도 모른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내키지 않을지라도, 왕의 검이 되어 주겠다는 건 본디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설마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바이칼은 자신의 이복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불이여, 타올라라. 나의 마법은 언제나 소임을 다할지니…….”

저건 바이칼이 불꽃을 불러일으킬 때 사용하는 시동어였다.

그런데 그간 무슨 노력을 얼마나 기울인 것일까. 그의 손에 맺히기 시작한 불씨는 예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장작 하나도 태우지 못하고 푸시시 꺼져 버리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얼핏 보아도 크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기드언을 부둥켜안았다. 함께 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불꽃이 날아가는 방향은 그들 쪽을 미묘하게 벗어나 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사전에 눈치채지 못한 건, 아마도 지금 너무나 당황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드언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지그시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불덩이는 그들을 그대로 지나쳐 출입문을 향해 날아갔다.

불길은 그 문의 잠금쇠를 뜨겁게 녹이고 있었다.

물론 한 번으론 부족했다. 바이칼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또다시 주문을 읊조렸다.

“나의 마법은 언제나 소임을 다할지니.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타오르리라. 빛과 온기가 되겠느니.”

타티아나는 복잡한 눈으로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이칼이 여기까지 그들을 쫓아온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굳이 그들을 대신하여 저 문을 없애려 나선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바이칼은 이렇게라도 본인의 의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싸우고 싶지 않다는 걸.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기드언은 쇳물이 녹아내리는 문을 발로 걷어차며 타티아나를 끌어당겼다.

“티티, 그만 갑시다.”

바이칼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타티아나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얼른 가라는 듯 손짓했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돌아서기 전 타티아나는 소리 없이 입술만을 움직여 마음을 전했다.

고마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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