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15)
* * *
타티아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이게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이라는 건 대체로 깰 때까지는 자각을 못 하지 않나.
그녀는 이게 실제가 아니라는 걸 아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눈앞에 양부, 아니, 뮐러 공작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익숙한 배경이 펼쳐졌다.
왕실 주관 무투 대회가 펼쳐지곤 했던 돔 경기장이었다.
한때 아버지와 그가 경합을 벌였던 바로 그곳.
만약 이 꿈이 조금이라도 실제에 기반해 있다면, 세상을 떠도는 뮐러 공작의 사념이 여기에 아주 약간이라도 묻어 있다면…….
그녀는 공작의 시계가 한평생 어떤 지점에 멈춰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그의 앞에 가만히 앉았고, 그는 푹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핏발이 시뻘겋게 선 눈동자를 응시하던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용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다.
그딴 걸 왜 하나? 눈앞에 또 나타나면 나타날 때마다 언제든 목을 베어 줄 테다.
그렇지만……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데 인생의 너무 많은 부분을 쓰지는 않으려고 한다.
인간의 뇌는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명령어가 몇 가지 있다지.
간혹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는 어떤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미워하고, 절대 닮지 않겠다고, 저렇게는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다가 그 인생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만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환경에 너무나 오랜 시간 노출되어서다.
미워하고 절치부심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이 그 사람을 떠올리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러니 눈앞에 나타나면 망설임 없이 단죄하되, 네가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될 내 인생의 1분 1초마다 너를 끌어들이지는 않겠다는 거다.
이 사람에게 내 인생을 할애해 주기 싫으니까. 이런 걸로는 나의 여백을 채울 수가 없으니까.
타티아나는 검을 휘두르기 전 그를 불렀다. 야, 하고.
‘넌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니.’
‘…….’
‘솔직히 너로 살고 싶지는 않지?’
무의미한 질문이다.
그가 뭘 알겠는가. 평생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정작 자신의 인생은 단 한 순간도 살아 보지 못한 너 따위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고.
살아서도 몰랐을 테고 죽어서도 모르리라.
그런데 네가 알든 모르든, 나는 너의 생각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나의 인생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너로 인해 흔들리거나 망가지지 않을 테니까.
타티아나는 미련 없이 검을 휘둘렀고 뎅겅 잘린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순간, 그녀를 가두고 있던 주변 풍경이 흩어지더니 숨 막힐 정도로 사람을 압박하던 공기가 사라졌다.
갑자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슬픔에서도 빛이 난다.
타티아나가 흐릿한 초점을 바로잡기 위해 눈꺼풀을 깜빡였을 때였다.
기드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였다.
흔들어서 깨워야 하나, 바로 직전까지도 고민한 듯했다.
어깨를 움켜쥐었던 그의 손가락은 그대로 올라오더니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는 젖은 속눈썹에서 물기를 훔쳐 내었고, 타티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망한 일이다.
‘나, 꿈에서 되게 어른스러운 척했는데 현실에서는 지질하게 훌쩍이고 있었네?’
이게 뭐람. 타티아나는 멋쩍은 마음에 시선을 피했고, 기드언은 눈가를 마저 닦아 주며 부드러이 물었다.
“티티, 꿈 꿨어요?”
“……응.”
그는 무슨 꿈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배려가 묻어 있는 그 침묵에 더욱 무안해지고 말았다.
그의 낯빛에 속상함, 염려, 그늘 같은 것들이 느껴져서 더욱 그러했다.
기드언은 뺨에 엉겨 붙어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하나하나 떼어 주었고, 타티아나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 해 보고 싶은 마음에 말을 돌렸다.
“왜 갑자기 정리해요? 나 머리숱 많아서? 솔직히 너무 많아서 심란하지?”
“그렇진 않은데……. 자다가 먹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간혹 입안으로 들어올 때도 있는 건 사실이었다.
가장 거슬리는 건 운동할 때였다.
그녀는 혀를 살짝 내밀며 장난스레 말했다.
“옆에서 하녀들이 말리지만 않았으면, 어릴 때 한 번쯤은 삭발을 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응, 요즘도 가끔 생각은 해요. 진짜 생각만. 검술 수련할 때 거추장스럽거든요.”
기드언은 그런 애로 사항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피식거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어 버려서였다.
뾰족뾰족 밤송이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타티아나가.
“정 하고 싶으면 해 봐요.”
“……진짜?”
“두상이 동글동글하니까 깎아 놔도 예쁘겠죠. 어차피 암사자도 갈기는 없잖아.”
“……암사자? 갑자기 웬 암사자.”
타티아나는 왜 가끔 나한테 그런 비유를 드냐는 듯 되물었고, 기드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설마 자기 별칭이 암사자인 걸 모르는 건가?
하긴. 시녀들도 알쏭달쏭하긴 했을 것이다.
모시는 여인에게 ‘가끔 용맹하기가 사자 같으세요’라고 솔직하게 고해도 되는지 말이다.
타티아나는 의혹 어린 눈으로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삭발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었고 가급적이면 점잖은 척하면서 살고 싶었다.
앞으로도 공식 석상에 나설 일이 허다할 텐데, 굳이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건 그저 웃자고 떠올린 옛 기억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웃자고 한 소리를 그는 예상보다도 훨씬 더 재미있게 들은 눈치였다.
실제로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참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 거슬린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단발도 아니고 삭발이라니.
발상이 너무 과감하지 않나.
기사들도 머리 모양 정도는 신경 쓰는데.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귓가에 살며시 걸어 주며 물었다.
“티티는 검이 그렇게 좋아요?”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요?”
그러게. 왜 이렇게 당연하고도 감상적인 질문을 던졌을까.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꿈을 꾸며 젖어 드는 그녀의 눈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나이이나 그녀가 겪어 온 인생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다.
그녀가 검으로 얻은 성과와 영광만큼이나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검을 들 때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라면서. 전에 그렇게 얘기했잖아.”
“…….”
그건 그들이 냉전 중일 때 타티아나가 흘렸던 말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참 아이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지 싶다.
본인이 선택한 일이니 자잘한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딘 성장 속도가 하도 야속하여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그런데 기드언은 그녀가 부끄러운 짓이었다고 생각하는 그 투정을 오랜 시간 곱씹은 눈치였다.
그건 네가 검을 너무나 좋아해서 그런 거라는 그의 답이 이미 충분한 위로가 되어 주었음에도 말이다.
“나는 사실 티티가 참 자랑스러워요.”
“…….”
“내 아내가 누구보다 뛰어난 검사라는 걸 가끔은 세상에 말하고 싶어요. 만일 내가 그러면 티티는 날 멋없다고 생각하겠지만요.”
내가 그 정도였나? 갑자기 왜 이렇게 치켜세워 주는 걸까.
타티아나는 머쓱해하면서도 칭찬이 싫지는 않아서 별수 없이 미소 지었다.
기드언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라도,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검을 드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은 순간이 오면.”
너의 고통이 너의 기쁨보다 더 크다고 판단되면. 그게 언제라도.
“그때는 정말로 그만해도 돼요. 쉬어도 됩니다.”
“…….”
“그게 없다고 해서,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난 티티를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할 거예요.”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요.”
“그냥. 네 옆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
“…….”
“뭐든 티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줄 테니까.”
그의 눈에는 자면서 끙끙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던 걸까. 본인도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 주르륵 흘러 버린 눈물이 애처로웠나.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자신의 부담감과 삶의 무게를 덜어 주고 싶어 한다는 걸 잘 알 것 같았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종종 그런 기색을 비칠 때가 있었으니까.
이건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니, 무리하는 것까지는 괜찮으나, 이제까지 달려온 게 아깝다거나 사람들의 실망을 저어하여 하기 싫어졌을 때마저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였다.
무엇을 하든, 혹여 아무것도 하지 않든 계속 편이 되어 주고 너를 응원할 테니.
원래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영광된 순간에 기뻐하는 것 이상으로 그 이면의 고독과 고통에도 가슴 아파하는 법이었다.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실은 감동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입술을 비죽인 건, 단지 울컥한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한테 검을 그만해도 좋다는 건 전하한테 왕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랑 똑같아요. 전하라면 그럴 수 있겠어요?”
기드언은 1초도 걸리지 않고 답변했다.
“아니. 난 돼야죠.”
“뭐야, 그게. 나한테 한 말이랑 다르잖아요.”
“가장의 책임감이라는 게 있어서 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힘들어도 해야죠. 뭐, 별로 힘든 적도 없었지만.”
“……우리 집 가장은 나예요.”
기드언은 ‘그렇긴 하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뭘 또 이렇게 쉽게 긍정한담, 웃다가 결국엔 먹먹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갑자기 친구들의 물음이 떠오른다. 너는 언제 결혼을 잘했다고 느끼느냐고.
진짜로 별거 없다. 별로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남편이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때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파헤치는 게 될까 봐, 캐묻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말로 위로해 주고 싶어 할 때다.
그 시간과 노력을 상대가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선명히 느껴질 때였다.
타티아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픽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전하한테 청혼을 받았을 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