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16)
기드언은 그녀가 꺼내 든 화제가 의외였는지, 한동안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뒤따를 말이 궁금하여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이.
타티아나는 피시시 웃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정말 계속해도 괜찮겠어요?’ 하고 묻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할 때, 그는 이다음 말을 틀림없이 싫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 전하한테 호감은 있었지만, 우리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없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좀 씁쓰레한 표정이었다.
예식을 준비할 때도, 결혼 초에도 그녀의 태도에서 익히 느끼고 있었던 부분이기는 하나, 이렇게 직접 듣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해명이라도 하듯 덧붙였다.
“전하한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결혼이라는 걸 대하는 제 온도가 그랬다는 거예요. 누구랑 결혼을 했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하지만 기드언은 저 말이 더 별로였다.
‘누구랑 결혼을 했더라도’라니.
아무리 가정이라 할지라도 말 참 쉽게 하지 싶었다.
그는 타티아나 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타티아나는 그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미안한 듯 웃었으나, 이건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본인이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한 인상은 때때로 그 일을 먼저 겪어 본 주변 사람들이 좌우한다.
결혼에 대한 미혼자들의 온도와 태도는 기혼자들과 부모 세대의 영향이 상당하다.
부정적인 인식이 늘어 간다는 건, 기혼자들의 삶이 그들 눈에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면이 있어, 좋아 보이고 득이 될 것 같으면 등 떠밀지 않아도 다 한다.
길가에 금은보화가 떨어져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줍지 않나.
배고프면 어떻게든 배를 채우지 않냐는 말이다.
한데 그런 면에서 타티아나는 결혼에 대한 인상이 결단코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누가 봐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다만 타티아나는 다른 부분에도 한 가지 주목했을 뿐이다.
부모님은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멋진 인생을 살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홀로 오롯이 설 수 있어야 한다고.
타티아나는 예식 전, 단꿈에 부풀어 있던 신랑 신부들이 고작 몇 달, 몇 년 새 수심 어린 얼굴로 파티에 등장하는 것을 참 많이도 보았다.
그들은 대체 결혼에 얼마나 많은 것을 걸었길래, 상대를 얼마나 대단한 존재로 상정하였길래, 저리도 현실에 실망하고 좌절하였나.
“그냥 제 안에 그런 경각심이 있었어요. 의식적으로 다짐했던 것 같아요. 결혼이라든가, 배우자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거나 의존하지 않겠다고.”
충분한 노력은 하되, 결혼과 내 자아를 동일시하지는 않겠다고.
내 자존감을 거기에 의탁하지는 않으리라고.
“그렇게 해야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좀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제 인생 자체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나 봐요.”
결혼으로 인해 행복해질 거란 그 허무맹랑한 기대 심리를 경계하면, 결혼으로 인해 불행해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무게중심을 나에게 두면 상대로 인해 무너지는 불상사 또한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담이 그녀에게 경계심과 노파심을 심어 준 거다.
누군가는 너무 계산적인 태도가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르나, 그녀는 이 마음가짐이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고 믿었다.
한데 결혼 생활은 그녀가 얄팍하게 머리를 굴리고 대비한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관계는 상호적이라, 그의 마음이 느껴질 때마다 그녀의 마음도 물결쳤다.
상처받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거나 독립적인 자아를 고수하는 게 늘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드언으로 인해 기뻐하고 때론 상심하며 일희일비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냥 싫기만 했느냐,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도리어 타티아나는…….
“참 이상하게요. 청혼을 받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란 기대가 전혀 없었는데…… 전하랑 결혼을 한 뒤로 저는 참 자주 행복하네요…….”
가끔 그의 말 한마디에 일상이 따뜻해진다.
이토록 추운 날씨임에도 견딜 만했다.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지라도, 다시금 힘이 났다.
사랑해서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가 뭘 잘못하거나, 전하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 있으면 꼭 말해 줘요.”
“왜 그런 얘기를 해. 네가 날 힘들게 하는 게 뭐가 있다고.”
“그냥. 혹시나 해서요.”
“…….”
“내가 행복한 만큼, 나랑 같이 사는 사람도 행복해야 할 거 아니에요. 전하도 나처럼 이 결혼을 잘했다고 느낄 때가 한 번씩은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요.”
기드언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마를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그리고 하, 하며 웃어 버렸다.
사랑하는 여자가 당신과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아마 남편으로서 들을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극찬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신도 나처럼 행복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똑똑한데 어딘가 바보 같다. 사실 그는…….
“티티. 나는 이미…… 너무 행복해졌어요.”
“…….”
“옆에만 있어 주면 더 안 바랍니다. 난 결혼할 때부터 쭉 그런 마음이었어요. 정말이야.”
두 사람이 지금 행복하다는 걸 과연 그 누가 믿어 줄까. 말도 안 된다며 모두가 웃겠지.
이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으리으리한 성도, 푹신한 침대도, 포근한 이불도.
그런데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이 순간, 더할 나위 없는 정신적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살면서 이보다 더 초라한 환경에 놓일지라도 서로가 있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말인즉, 이보다 훨씬 그럴싸한 장소에 가더라도, 서로가 없다면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충족감은 없으리라는 거였다.
어느새 서로가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었다.
뿌리와 줄기가 뒤엉킨 채 자라, 이제는 분리할 수 없는 나무들처럼.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뺨을 어루만지다 괜스레 콕, 하고 한 번 찔러 보았다.
타티아나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남편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더니 갑자기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오랜만에 칼춤 춰 줄까요?”
“……정말?”
남편을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나 보다.
하긴. 원래 이런 걸로는 빈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기드언은 사양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세라,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살수들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케이에게 다가가 허락이라도 구하듯 말했다.
10분만, 아니, 5분만.
케이는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그녀가 검을 뽑아 들자 곧바로 정자세를 취했다.
피습 사건 당시, 타티아나는 케이가 프리즈 마법에 걸린 채 적들을 상대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 본인이 없었다는 걸 몹시도 안타까워했다.
실은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자비가 스승의 검술을 완성했다는 걸 말로만 전해 들었지,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어느새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살수들을 바라보며 흠, 하고 미소 지었다.
개구리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웬만해선 잘 안 우는 조용한 개구리들이다.
저기 가운데에 대왕 개구리, 독개구리도 하나 있다.
그녀는 그들 보란 듯이 검으로 긴 호선을 그려 냈다.
1장, 2장, 3장.
아무런 막힘이 없었고, 그녀는 더 이상 애달프거나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처럼 검을 쥐고 있는 게 너무나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주시하던 기드언은 또 한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분명 블룸 경의 검술이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다.
뿌리는 그에게 있으나, 딸의 손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자라난 것이다.
더 아름다워졌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세계가 그 사이 더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건 이제 타티아나만의 검술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비슷한 감상은 케이도 느꼈다.
그는 고작 며칠 전에도 왕자비와 대련을 벌였는데, 그때와는 뭔가가 달랐던 것이다.
“실력이 더 느셨습니다.”
그건 케이가 본인의 평소 화법 내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찬사였다.
짧고 담담하지만, 진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러나 귀가 밝은 타티아나는 용케도 그 말을 주워듣고는 눈을 흘겼다.
‘이걸 보고도 감상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그녀는 더 깜짝 놀라게,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해 주겠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말수 적은 살수들의 입에서 경탄이 터져 나왔다.
그들 주변에서 새파란 장미들이 솟아나고 피어났다.
블룸의 상징은 타티아나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더욱더, 활짝 만개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문의 검술 마지막 장에 종지부를 찍으며 숨을 몰아쉴 때, 스칼렛은 졸린 눈을 비비며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우, 눈부셔. 야밤에 대체 뭐 하니? 파티하니?”
근데 왜 나만 빼놓고 하냐며 투덜거리던 그녀는 한겨울에 핀 꽃들을 보며 멈칫했다.
그러다 곧 ‘어머나!’ 하며 아낌없이 감동을 표출했다.
타티아나는 그렇지, 저게 올바른 감상이지,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살수들은 말없이 돌아서며 다시금 짐을 챙겼다.
모두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일행은 달빛을 벗 삼아 말을 달렸다. 그러다 희끄무레한 여명을 보았으며, 붉은 태양이 고개를 내미는 광경도 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은 끊임없이 뺨을 스쳤다.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대로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험준한 산맥을 이정표라 여기며, 척박한 대지를 얼마나 달렸을까.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저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하듯, 높고 견고한 성곽이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부 공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