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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24)화 (113/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장.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 (1)

북부의 하늘은 유독 맑고 높았다.

타티아나는 일행의 머리 위를 활공하는 겨울새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자유롭고 멋들어진 비행이다.

그간의 여독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성문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머릿속에는 조금씩 의아함이 피어났다.

‘혹시 우리가 너무 추레한가?’

그렇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여기까지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꽤 멀쩡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성곽의 경비병들은 1왕자의 얼굴을 알아본 눈치였다.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인장 하나 내보인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계심보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왜 바로 문을 열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저이들 눈에는 너무 공격적인 무리로 보이는 건가.

타티아나는 대오를 갖춘 채 서 있는 살수들을 크게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쪽이 조금 더 타당한 추측이지 싶었다.

하지만 분명 사전에 연통을 주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교감도 나누지 않고, 불쑥 쳐들어온 건 아니었다.

이러든 저러든 북부에서 끝끝내 성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곤란해진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북부를 자신의 거점으로 삼겠노라, 공공연하게 말해 왔고 이건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망명이나 다름없다.

이제 와 다른 곳에서 군사를 모아 재기를 꾀하기에는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다.

그렇게 타티아나의 마음속에 불안과 수심이 싹트려할 때였다.

갑자기 성곽 주변이 부산스러워지더니 도르래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기드언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두려움이나 긴장감 때문이라기보단 여차하면 같이 튈 생각에서였다.

기드언은 그 야무진 손아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속내가 고스란히 읽혀 피식거렸다.

지금 너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해 줘야 하는 건지, 어떤 상황에서도 남편의 목숨을 책임지겠다는 이 의리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그래서 그냥 두 가지 마음을 모두 담아 하나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는 타티아나의 손을 가볍게 털어 내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침내 성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 빈자리를 메우기라도 하듯 먼지바람이 희뿌옇게 일어났다.

타티아나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러자 여러 명의 병사들과 그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은발은 북부의 계절을 꼭 빼닮아 있었다.

차분한 태도와 풍겨 오는 기백으로 보건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중얼거림에서 사내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 나오는군.”

저이가 바로 북부 대공, 리고르였다.

그가 1왕자 일행을 잠시나마 기다리게 한 것은 공성의 끝자락,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길잡이를 자처하기 위함이다.

대리인 없이, 주군을 맞이하는 가신의 예를 다하려는 것이다.

“1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기드언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일어날 것을 권했고, 대공은 타티아나에게도 예를 표했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비전하. 이 험한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대외용 미소였다.

사실 대공과 타티아나 사이에는 다소 불편한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눈 덮인 설원은 아름답기는 하나, 블룸 경과 왕실 친위대가 목숨을 잃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리고르 대공은 그 점을 의식했는지,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하며 말했다.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으나, 북부에 머무시는 동안 조금이나마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부족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

“그리고…… 저희 북부인들을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공은 그 말을 한 뒤, 타티아나의 검과 마력석 목걸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미 타티아나에 관한 소문을 전부 다 들은 눈치였다.

타티아나는 그 은근한 속내와 기대감이 그리 부담스럽거나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아까보다 한결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이어 대공은 스칼렛 공주에게도 예를 올렸고, 기드언의 부관들과도 짧게나마 통성명을 나누었다.

날을 세우거나 꼬투리 잡는 이 하나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타티아나는 기드언에게 속삭였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요?”

“그럼 뭐, 싸우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양측은 이미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며 의견을 조율해 왔다.

기드언은 결혼 초 이곳에 며칠 머물며, 북부인들과 안면을 트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전하가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남편이 이곳에 와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대충은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드언은 이렇다 할 답변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아마 그도 타티아나의 말을 부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귀족 사교계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평가이기도 했다.

뛰어난 두뇌와 판세를 읽는 능력, 심지어 검술 실력까지 갖춘 1왕자에게서 도무지 흠잡을 데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물고 넘어지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그 성격 아닌가.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데 기드언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대공도 그리 녹록한 성품은 아니었다.

다만 두 남자 사이에는 공감대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마물 사태가 시급하다는 것과 왕실과 북부 사이에 존재하는 불신의 고리를 그들 대에서 끊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공 측은 부관들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금 기드언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행을 성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손짓하며 말했다.

“사열식을 준비했습니다, 전하.”

“그건 생략하지.”

전열을 갖춘 병사들이 기개를 펼쳐 보이는 사열 행사는 엄청난 볼거리이기는 하나, 많은 시간과 공수가 투입된다.

외유나 시찰을 온 게 아니니만큼, 번잡한 절차들은 건너뛰는 융통성이 필요했다.

하나 기드언의 부관은 급하게 다가와 간언했다.

“받아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공국이 전하의 편에 섰다는 상징적 의미로 남을 겁니다.”

고심하던 기드언은 결국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생각했다.

사열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성안에 짐부터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일행 중에는 임부가 있다. 혹시라도 탈이 나기 전에 휴식을 취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다.

타티아나가 공주 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약간 넋이 나간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세상에, 올케, 이게 무슨 일이니.”

“뭐가요?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아니. 리고르 대공 말이야.”

타티아나는 흠칫하며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공이 왜요?”

“엄청 잘생겼잖아.”

“…….”

“선대 대공이 미남이었나? 그런 소리는 전혀 못 들어 봤는데?”

스칼렛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타티아나는 이이…… 하며 눈을 흘겼다.

물론 대공이 상당히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인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 그따위 소리나 할 때인가 싶어졌다.

“브라우닝 경한테 다 일러 버릴 거예요.”

“뭘?”

“유부녀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스칼렛의 태도는 한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그녀는 도리어 타티아나의 말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듯, 이렇게 되묻기까지 했다.

“결혼하면 갑자기 눈이 마비되기라도 한다니? 유부녀는 미남을 보고 객관적으로 잘생겼다는 말도 못 하는 거냐고.”

“…….”

할 말이 없어진 타티아나는 지원군을 찾듯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을 고른 것이라면, 그녀는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기드언은 난데없이 이상한 의심이 도진 사람처럼 눈매를 가느다랗게 만들었다.

“티티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뭘요? 미남이냐고요?”

“아니. 저 사람은 전완근이 어떠냐고.”

“…….”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질문이람.

남매가 양옆에서 번갈아 가며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황당하게도 타티아나는 리고르 대공의 체격을 눈여겨보긴 했다.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검사로서의 직업병, 업계 동향 파악, 소명 의식, 뭐 이런 것 때문이다. 정말이다.

북부인들은 희한할 정도로 체격이 좋았다.

대공은 물론이거니와 일개 경비병들마저도 그러했다.

원래 외성 수비는 과시를 위해 덩치가 좋은 사람들이 도맡기 마련이나, 그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서 기드언처럼 어깨가 좋고, 흉곽이 넓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꽤 흔했다는 거다.

‘추운 지방 사람들이 골격이 크다던데, 진짜인가 보네. 그런데 수도 출신인 내 남편은 왜…….’

근육과 골격이 이렇게까지 발달해 버린 거지……?

발터 중심부에 터를 잡고 몇백 년째 꼼짝도 않고 있는 아인슬러 가문이야말로 수도 토박이 중에 토박이가 아닌가.

타티아나는 잠시 의문에 잠겼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유전과 환경의 영향이 크긴 하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영역 또한 많은 게 분명하다고.

그러나 그녀는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정작 남편의 질문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드언은 농담 삼아 꺼낸 말에 그녀가 답을 하지 않자, 괜히 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래서 대공은 전완근이 어떤 것 같은데?”

“……에잇,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다들 겨울옷 입었잖아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작되는 각이라는 게 있긴 있다.

두꺼운 옷으로 아무리 가려 봐야 몸이 좋은 건 다 티가 나는 법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답을 듣고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여름옷을 입었으면 보긴 했을 거고?

물어보려다 그냥 관두었다.

늘 심미적인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누이나 오로지 근육만 쫓는 아내나, 둘 다 참 한결같지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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