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장.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 (3)
스칼렛은 그렇게 한동안 타티아나에게 혼쭐이 났다.
솔직히 좀 억울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타티아나를 칭찬하려는 의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너처럼 씩씩하고 건강하게 컸으면 좋겠다고.
게다가 아이는 비단 부모만 닮는 게 아니었다.
대를 건너뛰어 증조할아버지도 닮고, 가끔은 삼촌과 비슷한 면을 보일 때도 있다.
스칼렛은 아인슬러 가의 가계도에 대해서는 당연히 타티아나보다 아는 게 많았다.
반박할 수 있는 사례 또한 풍부했다.
“아인슬러 중에는 훌륭한 검사도 많아.”
그리고 그들은 그 실제 사례를 그리 먼 곳에서 찾지 않아도 되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했다.
“기드언도 있잖아.”
타티아나는 그 말에 성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어느새 다시금 성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쉴 틈 없이 사방팔방을 오가는 살수들과 달리 기드언은 말에서 내린 채, 그들이 몰아오는 마물 떼를 묵묵히 도륙하고 있었다.
사냥개처럼 쫓아다니는 게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하긴. 북부인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는 게 목적이라면, 저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오랜만에 남편의 검술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기드언의 검술은 상당히 직선적이다.
평소 성격을 생각한다면, 더 섬세하고 복잡한 검로를 추구할 듯도 한데 의외로 담백하다.
사실 힘 있는 검사들에게는 그리 많은 기교가 필요치 않다. 어차피 알고도 당해 낼 수가 없으니까.
지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마물들을 상대로는 더욱 그러했다.
마물 떼는 속수무책으로 썰려 나갔다.
타티아나는 요즘도 가끔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게 한 가지 있다.
기드언의 검술 실력이 블룸 저택에서 수련할 때에 비해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안정된 듯 보였다.
아무리 재능과 감각이 중요한 분야라지만, 검술은 결국 기술의 일종이다.
기술은 갈고닦지 않으면 퇴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비법이 있다면 아내한테도 좀 공유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이런 데에 관심 많은 거 알면서…….
타티아나가 뭔가를 캐내고 싶은 사람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을 때였다.
남동생의 활약상을 함께 지켜보던 스칼렛은 뒤늦게 고백했다.
“사실 난 우리 아가가 뭐가 되어도 괜찮아. 그냥 올케나 다른 기사들처럼 씩씩하고 튼튼하게 컸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어.”
“아아.”
타티아나는 깨달음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찾은 거였다.
제가 또 건강 하나는 어디 가서 빠지질 않지요. 체력도 정신력도, 근성도 다 자신 있답니다.
서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자신의 올케를 보며 스칼렛은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북부까지 오면서 임신 얘기는 하나도 안 하길래, 조카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니구나?”
타티아나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입 밖으로 말만 꺼내지 않았을 뿐이지, 나름대로는 챙겨 주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 서운하게 만든 게 있었나?
그녀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좀 조심스러웠을 뿐이었다.
과거에 슬픈 일이 있었다고 하니, 혹시나 아픈 부분을 건드릴까 봐 더욱더 말을 아끼게 됐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이렇게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 회임을 한 건 처음이었다.
축하의 마음 못지않게 아직은 낯설고 생경한 게 많다.
스칼렛은 어느새 아랫배에 손을 올린 채였고, 타티아나는 그곳을 힐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실은 거기에 아기가 있다니까 너무 신기한데…….”
“응.”
“그렇다고 남의 몸을 빤히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스칼렛은 그 말에 한참을 웃었다.
그녀도 도주 내내 타티아나가 자신을 몹시도 챙겨 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옷 한 번이라도 더 여며 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식감이 거친 음식으로 허기를 채워야 할 때는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설마 시선 처리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이야.
“올케는 참 상냥한 구석이 있어.”
“…….”
“되게 털털할 것 같은데, 배려심이 있단 말이지.”
“……이런 건 그냥 상식이 아닐까요?”
나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리던 공주는 타티아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본인의 배 위로 끌어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임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임부의 배는 아직 납작하고 평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치 태아와 눈이라도 맞추듯 그곳을 바라보며 속살거렸다.
배는 언제쯤 불러 오는 걸까요? 글쎄. 아직 멀었을걸?
이자벨을 공국으로 데려와야 할 것 같아요. 이자벨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내 뒤치다꺼리하기 힘들어…….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잡담을 나누었고,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스칼렛 공주였다.
“근데 저기, 타티아나.”
“네?”
“저거 저대로 놔둬도 되는 거야? 너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흠칫하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언제 또 저렇게 많이 불러들였을까?
아주 우글우글한 것이 조만간 서로의 몸을 밟고 성 위로 기어오를 것 같았다.
이제는 마법을 써야 할 때라고 생각했는지 기드언도 성곽 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이 이쪽을 향한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타티아나는 열심히 두 손을 흔들었다.
기드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이렇다 할 화답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타티아나는 입을 삐죽였다.
봤으면 같이 좀 흔들어 주지.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건 경망스럽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그녀는 곧 피시시 웃었다.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 있다.
기드언은 말 위에 올라타며 분명히 미소 지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사람들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다시 파괴론자가 되어, 적들에게 마법을 난사할 때였다.
콰쾅, 쾅, 쾅-!
타티아나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마력은 하늘 위의 섬광이 되어 마물들에게 내리꽂혔다.
아까와 유사한 형태의 마법이었다.
그러나 굉음의 크기와 그 파괴력만큼은 좀 전과 사뭇 달랐다.
숨을 고르던 공국의 병사들과 살수들은 일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지금 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래야 정상이었다. 높은 성벽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지금 상당히 무시무시한 사태가 일어나 버렸다는 걸 잘 알 것 같았다.
“허어…….”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해일처럼 성곽 위로 솟아올랐다.
눈보라는 성벽을 넘어 그들의 군홧발 바로 앞까지 밀려들어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물의 사체들이 하늘 위로 퉁퉁, 튀어 오르고 있었다.
폭격 마법의 여파였다.
공국의 병사들은 그 엄청난 광경에 넋을 잃었다가 이 모든 일을 벌이고 있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왕자비의 별칭이 사자라고 했던가?
‘그런데 이걸 그냥 사자라고만 표현해도 되는 건가?’
별칭이 실제에 비해 너무 얌전하고 귀여운 게 아니냔 말이다.
마치 심판의 날이 도래한 것 같았다.
천지개벽 수준이었다.
신음하던 병사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듯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오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살수들과 타티아나는 이런 식으로도 손발을 맞출 수 있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유인술과 마법의 조화는 환상적이었고, 성 밖에는 마물의 사체가 즐비했다.
임무를 끝마친 타티아나는 공주를 데려다주는 김에 침소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러다 공주의 화술에 홀려 함께 수다를 떨었고, 반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두어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때 정신을 반만 차릴 게 아니라 완전히 차렸어야 했는데.
타티아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미적거렸고, 나중에는 아예 공주와 함께 침대에 누워 버렸다.
세안을 마친 공주의 얼굴은 말갛고 투명했다.
스칼렛은 북부에 온 이래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독한 성분이 섞여 있을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고운 피부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자, 공주도 타티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로버트가 없어서 다행이야. 난감할 뻔했어.”
“이제 그만 부군께도 민낯을 공개하세요.”
5년이면 진짜 할 만큼 했다.
어떻게 세상천지 모두가 다 보았는데, 심지어 마물들도 당신 민낯을 보았는데, 남편한테만 안 보여 줄 수가 있지?
자신이 남편이라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부부 간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서로에게 진실하라고 되지도 않는 연설을 늘어놓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타티아나의 눈에는 맨얼굴도 예뻐서였다.
자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떠들었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쪽에서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불쑥 문을 열었다.
기드언이었다.
“뭐해요. 방으로 안 오고.”
막 씻고 나왔는지 그의 머리칼은 눈썹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와 있었다.
실은 다 씻고 침대에 누워 한참을 기다리기까지 했는데도 아내가 오지 않아, 직접 찾으러 온 것이었다.
“둘이 노는 건 좋은데…….”
“…….”
“잠은 남편이랑 자야지.”
기드언은 어둑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 이불을 덮은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두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스칼렛은 아주 당당히 요구했다.
“하루만 올케를 나에게 양보해 줘. 넌 매일 같이 자잖아. 우리 아직 얘기 안 끝났단 말이야.”
기드언은 이 당당한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겠죠. 그런 떼는 본인 남편한테나 부리세요.”
“여기 내 남편이 어딨니! 네가 풀만으로 보내 버렸잖아!”
어이구, 깜짝이야.
스칼렛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타티아나는 움찔했다.
기드언도 멈칫했으며, 심지어 소리를 지른 공주 본인도 놀랐다.
타티아나와 기드언의 시선은 공주의 배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며 나란히 시선을 피했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스칼렛은 ‘어머, 놀랐지, 네 삼촌이 이상한 소리를…… 미안하다, 아가야.’ 하며 중얼거렸다.
타티아나는 안절부절못하는 공주를 바라보다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냥 큰 방에서 셋이 놀다가 같이 잘까요?”
그리고 그 농담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스칼렛은 그야말로 질색을 했다.
“올케.”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기드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짜증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바엔 그냥 혼자 자겠다는 듯 등을 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걷다 말고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 타티아나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안 따라와?”
스칼렛은 쟤 하는 짓 좀 보라며 푸하, 웃음을 터뜨렸다.
복수라도 하듯 손가락질을 하며 아주 과장되게 웃었다.
함께 키득거리던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뜨끔하며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