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장.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 (6)
타티아나는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하기에 앞서 또 다른 목격자는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물을 썰고 있는 케이에게로 다가가 팔뚝을 툭, 쳤다.
“너도 저거 보이니?”
케이는 타티아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힐긋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검으로는 계속 마물을 썰었다.
상당히 기계적인 동작이었으나, 그의 입에서는 주목할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뭔가가 느껴지긴 합니다.”
“그치? 맞지? 저거 언제부터 저랬니? 예전에도 저런 적이 있었어?”
“시기상으로는 꽤 된 것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오나, 비슷한 현상이 간혹 있었습니다.”
타티아나는 침음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분명 검기다.
살기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살기는 일반인도 얼마든지 내뿜을 수 있다.
격한 감정에 휩싸이면 누구나 눈빛부터 달라지지 않는가.
세상에는 가끔 누군가가 독기를 품고 사람을 물었더니, 죽어 버리더라는 괴담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실은 그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다만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그 살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없다.
기사들과 살수들은 그게 가능한 집단이며, 그들의 기운이 훨씬 더 정제되어 있다.
딱 그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금속성의 차가운 무기에 본인의 기운을 싣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건 오직 숙련된 검술가만이 가능한 경지였다.
그렇다고 딱히 실력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이 추구하는 검술의 결에 따라, 발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실력이 전무한 사람한테는 아예 안 일어날 일이라는 거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타티아나는 비로소 기드언의 검술 실력이 녹슬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그들이 떨어져 있던 지난 3년 사이,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경험을 이미 해 보았던 것이다.
그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한 번 발 도장을 찍고 나면 수시로 그곳을 오가게 된다.
횟수는 당연히 점점 잦아지고, 그러다 보면 실력이 그 아래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의 기술은 아직 불완전했다. 검기는 칼끝에 어렴풋이 어렸다가도 금세 흩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타티아나가 감지할 수 있었던 건, 심지어 육안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 또한 마력을 얻게 되며 전혀 다른 시야를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티아나는 남편을 한동안 유심히 관찰하다가 입을 뗐다.
“여보?”
그리 큰 음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마물들이 괴성을 지르는 와중에도 아내의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왜 그래요?”
왜 또 갑자기 여보라고 부르는 걸까.
내가 또 뭘 잘못했나?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기드언은 미심쩍은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케이는 기드언이 상대하던 마물을 대신 처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이걸 핑계 삼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할 요량이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뭐를. 알아듣게 말해야지.”
“알아들었잖아요!”
“…….”
“방금 그거 검기였잖아.”
타티아나는 어떻게 이런 얘기도 안 해 줄 수 있냐는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이런 거에 무슨 사기 결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억울한 기색이라, 기드언은 피식 웃어 버렸다.
“보다시피 완성 단계는 아니라서.”
아내한테 어설픈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남자도 있나?
뽐낼 만하다고 생각했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심지어 방금 그건 그가 의도한 상황도 아니었다.
종종 그러하듯 우연히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검사로서는 대단히 의미 깊은 순간일지 모르나, 본인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힘이라니.
그런 건 실전에서의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게 기드언의 생각이었다.
불확실한 전제를 바탕으로 전술을 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타티아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어떻게 내 남편은 검기를 써 놓고도 저렇게 심드렁할 수가 있지?’
이건 기술의 완성도를 떠나 아무나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저렇게 대수롭지 않게 반응할 일이 절대 아니라는 거다.
타티아나는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눈을 부릅떴다.
“아무튼 축하해요.”
“글쎄. 별로 축하할 일은…….”
“아이, 참. 정말 정말 축하한다고요.”
“……어, 고마워.”
타티아나가 아주 강경하게 축하하자, 기드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부인하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기이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아내는 왜 저렇게도 비장한 눈빛을 하고 있나.
뭔가에 잔뜩 자극받은 사람 같았다.
실제로 타티아나는 지금 통렬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그녀는 부친의 검술을 완성하고 마력을 얻은 뒤, 자신은 어느 정도의 목표를 이루었노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건 얼마나 안일하고 한심한 마음가짐이었나.
고수들은 재야 곳곳에 파묻혀 있고, 신예들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며, 그녀의 동료들은 이렇게나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검술가의 길에는 안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정진, 또 정진만이 있을지어다.
타티아나는 다시금 전투에 뛰어들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주문을 외쳤다.
“황혼의 길목에서 방황하는 자여! 병든 노새와 함께 걸어온 자여! 슬퍼할 시간이 없다. 인생은 본디 가혹한 것. 눈물짓는 것을 멈추고 앞으로 가라. 너의 발걸음에 모든 것을 쏟아 내라!”
순간 타티아나의 검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그녀는 그 검을 바닥에 쿵, 하고 내려찍었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그물은 대지 위로 퍼져 나가 마물들의 몸을 올가미처럼 조이며 불태웠다.
마력 반응을 보이는 상대만을 골라 공격하는 주문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마물들을 각개격파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러나 살수들은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케이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까지 고급 기술을…….”
그냥 우리끼리 검으로만 베도 충분한 것 같은데.
일정이 자꾸 지체돼서 짜증이 났나? 근데 이런 걸로 짜증을 낼 사람이 아닌데?
살수들은 혹시 자신들이 왕자비의 눈에는 꾸물대는 것처럼 보였나 싶어 무안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타티아나는 마검사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다지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오직 나만이 구현할 수 있는 기술. 내 손에서 완성되는 세계.
그녀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마법 주문은 이제 장엄하다 못해 비통할 지경이었다.
주문만 들으면, 거의 인류의 운명을 등에 짊어진 사람 같았다.
기드언은 연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공국의 병사들이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왕자 전하, 근데 저희는 정말 안전한 게 맞는 거겠지요?’
확답, 혹은 사태의 진정을 바라는 표정으로.
마물의 씨를 말리는 것은 좋으나, 자신들은 과연 괜찮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원래 결혼을 하고 나면 간혹 주변 사람들이 아내 쪽에 용건이 있을 때 남편을 바라보고, 남편 쪽에 전할 말이 있을 때 아내를 바라본다.
다소 황당할 때도 있고, 직접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아니다.
그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하는 것이다.
물론 감히 1왕자를 소통의 창구로 활용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다.
하나 공국인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현재로서는 왕자비에게 도무지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아는 사자는 저렇게까지 무서운 생물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기드언은 이런 상황이 결코 싫지 않았다. 실은 좀 흡족하기까지 했다.
타티아나에게 용건이 있을 땐…….
‘나를 통하는 게 맞지. 내 아내니까.’
기드언은 거의 각성 상태에 돌입해 있는 타티아나의 등 뒤로 다가섰다.
“티티.”
그리고 타티아나는 남편 말을 참 잘 듣는 편이었다.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언의 나직한 목소리에 바로 반응했다.
“왜요?”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
“더하면 눈사태가 나겠습니다.”
타티아나는 그 말에 우뚝 서더니 본인이 딛고 서 있는 땅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쩍쩍 갈라져 있었다.
길가의 나무들도 이 지각변동에 놀라, 가지 위에 소복이 쌓아 두었던 눈을 죄다 털어 낸 후였다.
“물론 내가 티티만 얼른 챙겨서 도망갈 수는 있겠죠.”
“…….”
“그런데 티티가 또 피를 쏟을까 봐 겁이 나요.”
이 새하얀 눈밭에 또 예전처럼 울컥하고 핏덩이를 쏟는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러니 아쉬워도 여기까지만 하자고, 아직 본거지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힘을 아껴 두어야 하지 않겠냐며, 그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얼렀다.
그러면서도 웃긴 건 어쩔 수 없어 말 중간중간 피식거렸다.
타티아나는 발끝으로 눈밭을 헤집다가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알아서 잘 조절하고 있어요.”
이제 어지간하면 기드언이 우려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이 마력에 적응한 지 오래였고, 요즘도 하루가 다르게 자기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욕이 불타오른 나머지, 방금까지 약간 과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타티아나는 검 끝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살수들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내가 이 정도 해 놓았으니 뒤처리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살수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의아해지고 말았다.
우리보고 대체 뭘 처리하라는 건지?
눈앞에 생명 반응을 보이는 마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