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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0)화 (121/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장. 실전 돌입 전 필수 예제 (6)

타티아나가 왕후궁에 다녀온 후, 시녀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밤에 있을 파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사실 이런 순간을 위해 배정된 이들이나 다름없다.

허드렛일은 이름 모를 하인들의 몫이지, 시녀들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가장 주된 임무란 결국 모시는 이의 말벗이 되어 주는 것이다.

유행과 취향을 공유하고, 요즘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문이 무엇인지 귀띔하고.

수석 시녀 이자벨은 타티아나의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습관처럼 물었다.

“기드언 전하는 오늘 어떻게 하고 오신답니까? 뭐 따로 언질하신 건…….”

그러나 이자벨은 금세 여기는 스칼렛 공주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공주궁에서는 지금쯤 전투와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나, 타티아나는 유행의 선두 주자인 스칼렛 공주와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기드언도 별로 나을 거 없었다.

왕자나 왕자비나 얼굴만 믿고 자신을 꾸미는 데에는 관심 한 톨 없었다.

“어후, 내 정신 좀 봐……. 늙으면 죽어야지…….”

이자벨은 쓸데없는 걸 물었다는 듯 자기 자신을 자책했다.

너무 무서운 그 혼잣말에 타티아나는 당혹스러워졌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더라?’ 한참이나 기억을 쥐어 짜내다가 겨우 대답을 생각해 냈다.

“아, 너무 예쁘게 하고 올 필욘 없다던데.”

“…….”

이자벨은 저절로 좁아지는 미간을 숨길 수 없었다. 다른 시녀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왜 남자들은, 특히 남편들은 외출 전에 저렇게 하나 마나 한 소리들을 내뱉는 걸까.

그렇다고 그들이 예쁘게 꾸민 아내의 모습을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이자벨의 경험상 아니올시다였다.

스칼렛 공주의 남편인 브라우닝 경만 해도 아내가 이렇게 꾸민 날엔 이래서 헤벌쭉, 저렇게 꾸민 날엔 저래서 헤벌쭉이었다.

경험 많은 수석 시녀는 잠시 고뇌하다가 기드언의 요구 사항을 이렇게 해석해 냈다.

예쁘게 하고 오되 빨리 오라고. 나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참으로 모순적인 요구 사항이 아닐 수 없으나,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는 게 바로 전문가인 것이다.

늘 인자한 표정만 짓던 이자벨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얼굴에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앞장서서 시녀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성의 시녀들은 확실히 공작가의 하녀들보다 솜씨가 좋았으며 감각이 뛰어났다.

그들은 타티아나의 체형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왕자비가 시집올 때 공작가에서 싸 짊어지고 온 드레스만 대강 훑어봐도 알아야 하는 거다.

어디를 부각하고 어디를 보완할지는 이미 오래전에 계산을 끝마친 터였다.

타티아나도 시녀들의 작업 속도에 날개를 달아 주는 데 한몫했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이다.

타티아나는 오늘만큼은 본인이 이 배의 사공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본인 몸인데도 배에 탑승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대신 그녀는 의사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는 아주 빠르게 결단을 내려 주었다.

귀부인들은 보통 손이 투박한 걸 부끄럽게 여긴다.

오랜 시간 검을 잡아 온 타티아나의 손에는 굳은살이 많았다.

혹시라도 거기에 콤플렉스가 있으려나 싶어 이자벨이 조심스레 ‘장갑을 드릴까요?’ 물었으나 타티아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안 낄래. 거추장스러워.”

“예, 비전하. 저도 이 드레스에는 안 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어우, 고민도 안 하시네, 시원시원하시다.

시녀들은 몹시 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모처럼 의욕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꼭 인형 놀이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인형을 매만지는 자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인형 놀이도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었다.

시녀들은 타티아나를 상대로 예술혼을 불태웠다.

왕자비 측에서도 서둘렀건만 타티아나가 왕실 별관에 도착했을 때 기드언은 이미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서류철을 넘기다 말고 눈을 힐끔 들어 타티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했던 예식 날에도 형식적인 찬사 한 마디 없던 남자가 아니던가.

타티아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나 기드언의 반응은 해도 너무했다.

그는 등골까지 파인 타티아나의 드레스를 보고선 물었다.

“안 추워요?”

이런. 밖에 있는 이자벨이 들었으면 무척 서운해하겠는걸.

타티아나는 자신의 드레스를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시녀들이 이런 스타일의 옷을 권할 것을 알고 있었다.

뮐러 가 하녀들도 그녀의 등을 한껏 파 놓고 보석 장식으로 꾸미는 걸 즐겨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타티아나는 그녀들이 감탄사를 흘릴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은 꽤 괜찮았다.

“전하, 전 등에 자신이 있어요.”

타티아나가 기드언 쪽으로 등골을 향해 보였으나,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물론 기드언도 자기 비 예쁜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여자 등에 대고 ‘예, 거기가 특히 예쁩니다’ 하기가 좀 뭐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오기가 생겼는지 이번에는 옷자락에 가려진 탄탄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은 복근도 꽤 괜찮은데…….”

“거긴 안 돼요.”

저러다 등에 이어 배도 파고 다닐까 봐 기드언은 말을 잘랐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실언이라고 느꼈는지 난감한 얼굴이었다.

“내 말뜻은…… 비가 입고 싶다면 뭐든 입는 거지만…….”

입는 거지만…… 거지만…… 그렇지만 거긴 곤란한데?

그곳은 아직 발터 파티 복식 문화가 개척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진취적으로 도전해 보는 방법도 있겠으나, 계속 그런 자세로 힘차게 나아가다 보면 나중에는 걸칠 게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비는 누구보다 앙증맞은 배꼽을 가졌으나…… 굳이 파티에서? 오늘?

정확한 표현을 찾기 힘들었는지 기드언은 얼굴을 찌푸렸고 타티아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파티에서 배를 까고 다니는 귀부인은 저도 아직 한 명도 못 봤네요.”

“예, 이런 것까지 처음이 되진 맙시다.”

기드언은 말이 통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자신의 곁에 끌어 앉혔다.

파티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으나, 왕족은 가장 늦게 등장하는 게 관례였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이 대기 시간마저 낭비라고 생각할 것 같아 그가 던져 놓은 서류철을 들어 보였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보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드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본격적인 감상에 돌입했다.

타티아나도 잠시간은 그를 마주 보았다.

‘전하는 뭘 특별히 안 해도 멋지네.’ 감탄하기도 했고 ‘그래도 이마를 내놓는 쪽이 훨씬 보기 좋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어깨너머에 걸린 커다랗고 장엄한 벽화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피시시 웃음을 흘렸다.

왕실 소유의 명화라고 하기엔 다소 평범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화가의 실력이 평범하다는 게 아니라, 그림의 소재가 그러했다.

마법사와 기사들을 다룬 그림은 발터 전역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저 그림이 타티아나의 시선을 잡아 둘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가 마탑과 검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림 하단의 문구를 소리 내어 읊었다.

“가장 강한 검을 얻은 자가 발터의 왕이 될지어다.”

몹시 무게감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또한 발터에서는 흔해 빠진 관용구나 다름없었다.

발터 신민이라면 꼬맹이들도 한 번씩은 다 들어 보았을 정도니까.

일종의 건국 신화라고나 할까.

발터는 실제로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활약하에 세워진 나라였고, 그 둘은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그리고 마탑과 왕실 친위대는 요즘도 저 ‘가장 강한 검’이 자신들을 의미하는 거라며 싸운다.

기사들은 ‘검이라고 하지 않소? 검. 세상에, 문자 못 읽소?’ 퉁명스레 말하고, 마법사들은 ‘저 천박한 것들은 은유를 모르나?’ 콧대를 세우고.

하지만 타티아나의 친어머니는 살아생전 그 유치한 싸움에 절대 끼고 싶지 않아 했다.

오히려 또 시작이라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치를 떨곤 했다.

대응 방식은 달랐지만 블룸 경도 발을 빼고 싶어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부부간에 괜한 자존심 싸움을 붙이려고 하면 속없는 사람처럼 허허허, 웃기만 했으니까.

딸에게만 몰래 ‘사실 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강해, 마법이 최고야, 아빠는 늘 진단다’ 말해 준 적도 있다.

타티아나에게는 여러모로 사연 많고 추억도 서려 있는 문장인 셈이다.

그녀는 비시시 웃으며 농담 삼아 기드언에게 물었다.

“전하의 가장 강한 검은 누구예요? 생각해 보셨어요?”

블룸 경이 살아만 있었다면, 누구나 그를 1왕자의 검으로 꼽았을 것이다.

비록 그는 이제 세상에 없었지만, 그 딸이 묻고 있으니 조금 더 아름답게 포장해 주어도 좋을 텐데.

기드언은 그러기에는 상당히 현실적인 성품이었다.

그는 구전설화로나 전해질 법한 저 문장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저건 각각의 이해 집단들이 대의명분으로 이용하기 딱 좋은 허상이었다.

“티티. 저 말은 전후 관계가 바뀐 겁니다.”

“……왜요?”

“가장 강한 검을 얻은 자가 왕이 되는 게 아녜요. 왕이 가지고 있는 검이 가장 강한 검이 되는 겁니다.”

“…….”

“비도 어제 말하지 않았습니까? 최고는 목검을 들고 있어도 최고라고. 마찬가지로 왕이 목검을 선택했다면…… 결국 그게 가장 강한 검인 거겠지요.”

“…….”

“물론 난 이왕이면 명검을 들 생각이긴 한데, 저런 미신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타티아나는 실제로 지난밤, 최고는 목검을 들고 있어도 최고라고 말하긴 했다.

그런데 비슷한 말을 왕이 될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상당히 떨떠름했다.

도구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필요 없고, 결국엔 자신이 최고라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지금 상당히 재수 없으셨어요’라고 알려 주지 못했다.

다소 오만하게 들릴지언정 그의 말은 사실이니까.

원래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가 왕이 되는 순간, 그를 위시한 자들은 모두 역사에 ‘강한 검’으로 기록될 것이다.

기드언은 생각에 잠겨 있는 타티아나를 보며 피식피식 웃다가 손을 내밀었다.

어느덧 연회장에 입장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말장난은 이쯤에서 끝내야 할 듯싶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타티아나도 그의 손을 잡고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흐음, 하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이번에는 다소 가볍고 장난스러운 주제로.

‘가만있어 보자. 사람들 앞에서 친한 척하자고 했지?’

짓궂은 장난을 꾸미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얼굴엔 꼭 지난밤과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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