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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8)화 (122/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장. 실전 돌입 전 필수 예제 (14)

사람은 누구나 2차 성징이라는 걸 겪는다.

무게중심이 바뀌고, 기존에는 없던 굴곡이 생기기도 한다.

봉곳한 가슴이나 잘록한 허리처럼, 타티아나의 몸 또한 어릴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신체의 성장을 두고 ‘무너졌다’라는 표현을 쓰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검술가의 관점으로 이 상황을 달리 표현하기란 어려웠다.

중심축이 바뀌었다, 어딘가 변화했다, 정도로 순화할 순 있겠지만, 그게 결과를 바꾸어 줄 수 있을까?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변성기를 마냥 달가워할 수만은 없듯이, 검술가에게 신체 변화는 고난이고 역경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적응하고 극복해야 하는 난제였다.

이에 더해 타티아나가 겪고 있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역시 힘이었다.

블룸 경의 검술은 그 기반이 근력의 월등함에 있어, 웬만한 남성들도 구사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무거운 검을 번쩍번쩍 들어 올려 기드언을 놀라게 했지만, 성별에 따른 완력의 차이는 그렇게 간단히 극복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격차는 자랄수록 벌어졌을 테지.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자면 한 마디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타티아나는 블룸의 검술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지만, 그 블룸의 검술은 그녀의 겉껍데기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거다.

‘참 아이러니하네.’

하지만 기드언의 눈에는 그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이 보였다.

무작정 검을 휘두르기만 하던 소녀는 이제 신중해졌다. 가끔은 검 끝을 떨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으며 이 방향이 맞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그녀의 검술에선 치열하게 고심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느껴진다.

블룸 경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걸음걸이.

기드언은 저 보법을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조금 신기했을 뿐이지만, 타티아나는 저걸 연구하면서 꽤나 절박했을지도 모르겠다.

급격하게 자세를 바꿀 때마다 소진되는 체력이 그녀에겐 큰 부담이라서.

그 단점을 메꿔 보려고 궁리하고 또 궁리한 것이다.

게다가…….

‘분명 오른손잡이였는데.’

타티아나는 어느새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왼손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왼손잡이나 양손잡이로 태어났다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웠으나, 기드언은 저게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완벽한 천재는 하늘이 내리는 거고, 노력만으로 모든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 않겠나.

타티아나는 블룸 경의 검술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연무장에 우두커니 멈춰 서고 말았다.

이를 악문 그녀의 눈동자에는 억울함과 익숙한 체념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검술을 전승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저 손가락으로 검술서를 끝장까지 넘길 수는 있었겠지만, 본인의 신체로 구현하는 것만큼은 죽었다 깨어도 불가능해서.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저만치에 가 있을 텐데도.

기드언은 어떤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도리어 그를 보며 먼저 웃어 준 건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후련해 보이기도, 씁쓸해 보이기도 하는 그 미소로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때요. 역시 좀 실망했으려나?’

사람이 그토록 열망하고 꿈꿔 오던 분야에서 ‘넌 이 이상은 가지 못할 거야’라고 땅, 땅, 땅, 선고받는 순간.

그 상황은 누구에게나 절망스럽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언제부턴가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 왕실 친위대를 꿈꾸던 순수한 소년들.

그들은 자신이 끝내는 마을 자경단원밖에는 되지 못할 줄 알았더라면, 그래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검을 잡을까.

결과가 초라할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했을까.

기드언은 뒤늦게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 상당히 애달파져 버린 칼춤을 관람한 소감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는지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배배 꼬며 멀어지려 했다.

“이거 놔요. 나, 땀 냄새 나요.”

“……안 나.”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블룸의 검술이 좀 과격한가?

그녀는 지금 물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나온 사람 같은 차림이었다. 그게 다 땀이었다.

이 정도면 후각이 마비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뭔가가 약간은 느껴지지 않을까?

그녀가 계속 미심쩍어하자, 기드언은 웃으며 말했다.

“땀 냄새라면 어제도 실컷 맡았잖아요. 좋기만 했습니다.”

“…….”

그리고 땀은 뭐 혼자 났나? 그도 어제는 많이 흘렸다.

게다가 그는 지난밤 땀 냄새만 맡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온갖 곳을 짓씹으며 체향을 들이마셨고, 은밀한 곳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다.

다시금 민망한 기억이 치고 올라오자 타티아나는 하늘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기드언은 별로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빙긋 웃으며 검술을 관람한 소감을 이어 갔다.

“왼손도 쓰는 줄은 몰랐는데요. 좀 놀랐습니다.”

“제 비밀 무기니까 절대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세요. 아는 사람은 전하뿐이니까 이거 소문나면 범인은 전하예요.”

사실 어디 가서 뽐낼 데가 없을 뿐이지, 타티아나는 오른손으로 식사를 하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글자를 적을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명필이었다.

기드언에게 얘기하면 칭찬을 해 줄 것 같긴 한데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지금 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타티아나는 그에게 진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다.

“……어땠어요, 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타티아나 본인의 귀에도 좀 형편없게 들렸다.

거리낄 것도, 겁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부끄러웠나 보다.

그녀를 어릴 때부터 봐 온 그가 어떤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하다.

“음.”

“…….”

“솔직히 말하자면 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이 떠오르진 않아요.”

“…….”

“그새 참 멀리 갔네요.”

그런데 넌 지금 서 있는 그 자리보다 더 먼 곳을 꿈꾸나 봐. 그렇지?

기드언의 눈에 타티아나는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고 대단했다.

그는 그녀보다 실력이 나은 기사의 이름을 몇 명밖에는 꼽을 수 없었다.

그녀보다 더 노력하는 기사를 찾으라면 그런 이름은 더더욱 떠오르지 않았다.

기드언이 투명한 눈으로 칭찬에 가까운 말을 건넸지만 타티아나는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속상해할까 봐 비관적인 얘기는 접어 두려는 건가, 그래도 남편은 남편인가 보네,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게 약간은 그녀의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서 타티아나는 내친 김에 또 물어보았다.

“……전하, 지금도 제 검 끝에서 아빠가 보이나요?”

기드언은 그 질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네가 블룸인데.’

하지만 이 블룸이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엄청난 명예인 동시에 막중한 무게감이자 책임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반드시 넘어야 할 목표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린 시절 내뱉었던 열없는 감상을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런데 누가 너한테 그 이름을 꼭 넘어서라고 시킨 건…….’

아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래 왔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거기에 기대를 걸고 아쉬워하고.

결국엔 그녀가 저 목표와 그림자 아래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기드언은 그 무게감을 조금쯤은 덜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건 현실적으로는 딱히 방법이 없지.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이것저것 귀엽고 하찮은 이름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게를 다른 곳에 분산하려고.

그녀가 본인 스스로 짊어진 중압감에 질식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타티아나 블룸으로 보여요. 가끔은 소녀 장사로도 보이고.”

“…….”

“할퀴는 거 보면 영락없는 고양이인데, 지금 보니까 사람들 말처럼 진짜 사자인 것 같기도 하네요.”

“……일부러 할퀸 건 아니에요.”

타티아나는 그 부분만큼은 정확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말꼬리를 잡으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기드언은 낮게 웃다가 입을 촉 맞추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주먹 휘두르고 그럴 땐 나도 좀 무섭다고. 뭐, 그래도 나한테는 내 아내예요.”

“…….”

“그만 무서워하려고 귀여운 이름도 하나 지어 줬어요. 티티라고.”

어때, 이 이름. 솔직히 너도 들을수록 괜찮지?

그의 뜻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타티아나는 결국 끝에 가서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렸다.

기드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잔디밭에 나란히 앉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땀을 식혀 주었다.

타티아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역시 뭔가가 한순간에 변하거나 세상이 뒤엎어지지는 않는다고.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비슷한 지점에 멈춰 서 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직면한 순간, 옆에서 그걸 누군가가 같이 보고 있고, 그게 자신을 절대 비웃지 않을 남편이라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기드언은 섣불리 답을 제시해 주지 않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도 않았다.

너무 호들갑스러운 찬사도, 공허한 위로도 없다.

아주 일상적인 일을 마주하는 사람처럼 ‘아, 너 그랬군?’ 고개를 몇 번 끄덕였을 뿐인 거다. 실없는 장난과 함께.

그건 생각보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감정의 진폭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날뛰려 할 때, 수평선을 그리라며 누가 옆에서 중심추를 잡아 주고 있는 것 같다.

타티아나는 어느 순간 ‘아, 나 그랬군? 근데 그게 뭐?’ 하는 마음이 됐다.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도 지나친 울적함에 빠지지 않고, 담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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