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4)화 (123/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6)

* * *

대공과 회담을 마친 뒤 기드언이 공국에 머문 시간은 며칠에 불과했다.

북부 가신들 중에는 그를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려는 이들도 존재했다.

왕자가 이번 방문을 계기로 공국 사정을 보다 세심히 살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드언의 태도는 칼 같았다.

원래 볼일이 다 끝났다 싶으면 시간 낭비는 절대 안 하는 성격이었다.

기드언은 수행원들과 따로 떨어져 마탑의 게이트를 통해 이동했고, 성 부근에서 마중을 나온 참모들과 합류했다.

호위병들을 이끌고 온 참모는 기드언을 힐긋거렸다.

왕자는 낯선 펜던트를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건……. 아, 마력석이군요.”

“어. 비에게 주려고.”

“선물입니까?”

글쎄. 이걸 과연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원래 타티아나의 물건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모친이 늘 지니고 다니던 마력석이었고, 블룸 경의 시신에서 발견된 유품이기도 했다.

대마법사가 일평생 사용한 마력석은 그 자체로 큰 가치가 있다.

마탑은 연구를 목적으로 마력석의 이관을 요청해 왔고, 기드언도 그를 윤허한 바 있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 때문이었는데, 그게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기드언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마법사들에게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이제 그만 가져올 때도 되지 않았냐고.

‘송구합니다만, 전하.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뭘 했는데. 난 충분한 시간을 줬다. 너흰 나에게 아무런 결과물도 가져오지 않았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게 없으면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 거다.’

‘…….’

‘너희가 알아낼 능력이 안 되거나.’

꼭 그렇게 무능하단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려?

마탑에서 욕받이로 내세운 고위급 마법사는 왕자의 신랄한 비난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마 여든 넘은 마탑주가 절대 안 된다고 바지 끝자락을 붙잡고 매달렸어도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기드언은 블룸 부인의 마력이 깃들어 새파란 빛깔을 띠는 펜던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이걸 보면 좋아할까, 슬퍼할까.

조금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결과를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혹시 후자일까 봐.

울적해한다면 달랠 재주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런데 기드언은 이것 외에도 타티아나의 마력석을 한 개 더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는 열 몇 살 무렵에는 지금보다 훨씬 자기감정에 솔직해서, 아침마다 코를 훌쩍이며 마력석들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 마력석 하나가 평민들의 몇 년 치 생계 비용에 육박한다는 걸, 그때는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기드언은 블룸 경과 대련을 할 때마다 발에 걸리는 마력석 때문에 짜증을 느끼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보다 먼저 수련장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타티아나는 여느 때처럼 응답 없는 마력석을 집어 던졌는데, 그녀는 어릴 때도 힘이 셌다.

힘차게 잔디밭을 굴러오던 마력석은 그만 기드언의 구두코에 탁, 하며 부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잘못한 건 과연 누구였을까?

남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기드언이었을까, 아니면 감히 왕자한테 돌멩이를 맞춰 놓고 사과 한마디 없는 타티아나였을까.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괜히 기드언을 쏘아보다가 자리를 황급히 떠 버렸다.

어찌나 멀리 돌아가는지, 기드언은 자신이 전염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대체 내가 뭘 어쨌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 기드언은 아무런 빛도 뿜지 못하는 그 마력석을 조용히 챙겨 성까지 가져왔었다.

그때는 타티아나가 참 이상한 여자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더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건 그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펜던트 하나가 몰고 온 과거의 단상.

그에게는 추억이 분명하나, 타티아나에게는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겠지.

기드언은 수하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체인은 갈아. 가벼운 걸로.”

금줄의 무게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목걸이에는 그날의 참화가 묻어 있었다.

피살 사건 직후 현장에서 방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드언은 이걸 원형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아주 약간 손을 보기로 했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 괴로운 부분은 최대한 줄이고, 좋은 것들만 남기기 위함이었다.

타티아나는 왕자가 성문을 통과했다는 전갈을 받고, 시녀들과 함께 밖에 나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늠름한 군마를 탄 사내 무리가 왕자궁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흑마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타티아나 앞에 멈춰 서더니 푸르릉거리며 거칠게 투레질했다.

타티아나는 말의 콧등과 새카만 갈기를 한 번 쓰다듬으며 기드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회담이 잘 끝나셨나 봐요.”

“뭐, 그보다는 올 때 게이트를 이용했으니까요. 시일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타티아나는 호오, 하며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이번 출장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녀는 이제 마력석 하나가 평민들의 몇 년 치 생활비에 육박한다는 걸 안다.

사람 한 명을 게이트로 이동시키는 데에는 마력석이 몇십 개나 갈려 나간다는 것도 안다.

물론 발터의 1왕자가 그걸 걱정해야 한다면, 그 통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름 가까이 떨어져 있던 신혼부부의 첫 인사가 너무 건조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왕자한테서 격정적인 장면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비도 담담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마치 어젯밤에 헤어졌다가 오늘 다시 만난 이들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타티아나는 지금 속으로 꽤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딘가 뭉클했던 것이다.

일이 그럭저럭 잘 끝난 듯하니 다행스럽고,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고.

그의 표정이 좋아 보이니 그것도 좋다.

타티아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평소에는 떨어져 지낸다는 부부들이 왜 그토록 애틋한지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일상의 한 조각처럼 당연했던 상대의 존재가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 잠깐의 헤어짐이 외도로 이어지는 사례도 보고 들었으나, 그들은 논외로 칠 생각이다.

그자들은 이미 사고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보고 싶을 때는 어떻게든 배우자를 만나러 갈 방법을 강구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겠지?

만약 그걸 외도의 빌미로 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마치 본인만의 것인 양, 방패로 내세우는 나약하고 병든 자다.

얽히면 같이 병드니 빨리 갖다 버리자.

그런데 기드언도 타티아나를 보며 낯설고 생경한 기분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보면 볼수록 뭔가가 이상했는지 눈을 가늘게 접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을 타티아나에게로 가까이하며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얼굴에 뭐…….”

“…….”

“화장한 겁니까?”

사이가 아무리 나빴던 부부일지라도 오랜만에 만나면 잠깐은 애틋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애틋함이 5분을 못 가는 경우도 참 많다.

뭉클해하던 타티아나의 표정도 조금씩 떨떠름해지고 있었다.

원래 방금 씻고 나온 사람한테 ‘씻으러 가니?’ 묻는 것만큼 나쁜 건 없다.

그녀는 비단 오늘만 화장을 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기드언의 말도 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오늘 치장은 시녀들이 해 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칼렛 전하께서 인형 놀이가 하고 싶으셨나 봐요.”

“…….”

“심심하다고 아침에 와서 해 주셨어요.”

기드언은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본 거다.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까지는 짚어 내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아내에게 늘 예쁘단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공주의 남편보다는 훨씬 탁월한 눈썰미였다.

“시녀들한테는 미안한 얘기이지만, 공주 전하께서 시녀들보다도 손이 빠르시더라고요.”

“…….”

“저는 마음에 드는데 별로인가요?”

“…….”

“……아니, 그렇게 별로예요?”

그러나 기드언은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제는 눈썹마저 찌푸리며 표정까지 심각해지는 중이었다.

타티아나는 무안한 나머지 이제는 좀 언짢아지려 했다.

평소와 달라 위화감이 드는 건 알겠는데, 괜찮다는 소리 한 번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싶었다.

결혼식 때도 신부에게 예쁘단 소리 한 번 안 해 준 남자는 역시 모든 게 만만치 않았다.

기드언은 계속 인상을 쓰고 있다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참모들을 향해 건성으로 손짓했다. 이제 그만 가 보라는 뜻이었다.

하나 그는 이것도 아니다 싶었는지 타티아나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타티아나는 얼결에 사람들을 피해 건물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왜 이러냐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자 기드언은 물었다.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네?”

“누가 인형이라고. 네가 인형이라고?”

타티아나는 이건 무슨 참신한 헛소리일까 싶어서 되물었고, 기드언은 갑자기 피식피식 웃었다.

본인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밖에서 하는 말 하나도 못 들었어.”

“……네?”

“정신 사나워.”

“뭐가요?”

“입술이 자꾸 오물오물 움직여서 다른 데 집중이 안 된다고. 뭘 이렇게 바른 거예요?”

평소랑 다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더 바르진 않았는데.

기드언은 죄 없는 화장을 탓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던 도톰한 살덩이를 삼켜 버렸다.

타티아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 황당해서 웃었다. 그리고 입맞춤이 깊어지자 기드언의 단단한 허리를 슬그머니 감쌌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몸을 바싹 끌어왔다.

허리를 맞댄 채 입안에서 서로의 살덩이를 나누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내가 굉장히 농염한 사람이 된 것 같고, 한없이 야해지고 싶은 기분.

상대와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싶기도 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오르고 싶기도 하다.

이 남자가 다감할 때도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얼음장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은 따뜻할 때도 있다고.

그렇지만 달군 쇠처럼 뜨거울 때도 있다는 것만큼은 절대로 알려 주고 싶지 않다.

‘그건 나만 알 거야.’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잠시 떨어졌고, 서로의 입술을 연결하는 은색 실을 보고는 같이 웃었다.

타티아나는 한쪽 눈을 찌푸린 채 짓는 그의 미소가 몹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기드언이 물어 왔다.

“이제 징크스는 깨졌어요?”

그가 북부로 떠나기 전,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질문이었다.

“음, 아마도?”

타티아나는 대충 그런 것도 같다며 장난스레 긍정했는데 기드언은 픽 웃으며 물었다.

“그럼 또 가도 돼?”

이 뻔뻔한 질문에 타티아나는 혀를 내두르며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또 가도 되냐니, 저게 오자마자 할 소리인가 싶어서.

덩달아 속으로만 간직했어야 할 마음의 소리도 여과 없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와. 진상이다, 진짜.”

기드언은 그게 너무 황당하면서도 재미있게 들렸는지 이마를 감싼 채 큭큭거렸다. 그리고 이내 눈을 찌푸리며 협박하듯 으르렁거렸다.

“나한테 뭐라고 했어, 지금.”

타티아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는 또 듣고 싶었는지 다시 말해 보라고 끊임없이 채근하다가 입술을 겹쳐 왔다.

그에 기꺼이 응하며 타티아나는 생각했다.

그가 돌아옴으로써 잃어버렸던 일상의 한 조각을 찾은 것 같다고.

고로 오늘은 완벽한 하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