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4)
* * *
발터 왕실이 주관하는 정기 국무 회의는 월에 두 차례 열린다.
현안에 따라 별도의 회의가 수시로 소집되긴 하나, 주요 정책 방향은 모두 정례 회의를 거치게끔 되어 있었다.
기근은 없고 민생은 안정적이다.
국가 간 자잘한 분쟁은 있으나, 나라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의 전쟁은 20여 년 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 정도면 가히 태평성대라 할 수 있으나, 정례 회의에서는 때때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펼쳐지곤 했다.
왕후와 1왕자 사이의 신경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외에도 한 가지 특이 사항이 있었다.
기드언은 왕후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 도중 안으로 들어오는 부왕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석 달 만인가.’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아인슬러 가에 정신적인 병력 같은 것은 없노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게 자랑거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에게는 또 한 가지 내세울 만한 특징이 있었다.
대체로 장수한다는 것이다.
한데 아직 예순도 채 되지 않은 발터의 국왕은 당장 관에 누워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안색이다.
국왕의 건강이 이다지도 급속도로 나빠졌을 때, 사실 기드언은 왕후를 의심했었다.
뚜렷한 근거가 있어서는 아니고 무슨 사건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습관적으로 하는 의심이었다.
이러한 사고 회로는 블룸 백작이 피살당했을 때도 작동했고, 그는 아직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국왕의 건강 문제만큼은 기드언도 왕후가 그 배후에 있다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지금 바로 국왕이 숨을 거둔다 해도 왕후에게 크게 득이 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라리 죽어 주는 게 나를 도와주는 거겠지.’
국왕이 승하하면 특별한 지목 절차가 없어도 기드언은 계승 서열에 따라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국왕은 건강이 악화된 이후부터 자신의 부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게 귀족들에게 어떤 신호로 읽힐까?
그의 태도는 명확했던 승계 구도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때 기드언은 고심해 본 적이 있다. 부왕의 의중이 대체 무엇일까에 대하여.
바이칼 왕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일까? 자신을 곁에서 보살피는 부인이 어여뻐서?
아니. 그는 불안한 거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노인들은 때때로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놓고 자식들을 상대로 저울질을 한다.
자식 간에 이간질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까지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는 기분은 누구에게나 초라하겠지만, 왕족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기드언은 혀를 쯧, 차고는 회의를 다시금 재개했다.
“북부를 이대로 방치하면 이번 겨울,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 금번 시찰을 통해서 확인한 바, 그들에겐 군사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수도의 귀족들에겐 크게 와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국경이 외적에게 침공당한다 해도 그 위기감이 중심부까지 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고로 기드언은 반대 의견이 나오리란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이 안이 오늘 통과하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대로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나서야 이렇게 얘기하며 전권을 가져올 수 있겠지. ‘그러게 내가 미리 경고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왕후는 기드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발언권을 뺏어 왔다.
“왕자, 공국이 마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괜히 군사와 신민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기만 합니다. 수도 방위군 대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기드언은 비식 코웃음을 쳤다.
왕후의 오라비이자, 바이칼의 외숙부인 수도 방위군 대장이 뭐라고 말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그걸 예상하지 못하는 자는 이 회의장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었다.
“전하, 아직 추수가 한창이고 대규모 공사들도 즐비합니다. 현재는 가용 병력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국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면 수도에도 치안 공백이 생기고 말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 반론을 제기한 것은 북부군 대장이었다.
“외람되오나 우리가 지금 추수와 공사를 논할 수 있는 이유는 북부 국경이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공국이 이제껏 그 방파제 역할을 해 왔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들이 무너지면 마물 떼가 서식 범위를 넓힐 테고, 신민들은 반드시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또 다른 기드언파 귀족도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북부 병력을 진군하고 방어선을 위로 올립시다. 이러다 공국이 무너지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 아닙니까? 원래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정무 회의란 결국 머릿수 싸움이다.
1왕자파와 왕후파가 목소리를 높여 싸우고, 중도파를 많이 흡수한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포섭 작업이 이루어지지만, 적어도 회의에서만큼은 논리와 근거로 승부를 보아야 했다.
이때 왕실 친위대 대장, 뮐러 공작이 입을 열었다.
기드언은 그를 몹시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는 어쩐지 시선을 회피하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북부는 3년 전 내 대원들이 참변을 당한 땅입니다. 리고르 대공은 그에 대해 책임을 진 적이 없고, 범인을 색출하는 데도 내내 소극적이었습니다. 기사들을 파견하기 전에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을 받는 게 먼접니다.”
기드언은 피식 웃으며 눈을 접었다.
그는 공작의 의견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실제로 저 비슷한 말을 대공의 면전에 내뱉고 오지 않았나.
그러나 기드언은 공작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그 사안을 굳이 이 자리에서 다시 꺼내는 저의가 뭔데?’
공작의 발언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 당장 북부에 군사를 파견하자는 기드언에게 불리했다.
그는 지금 회의석상에서 기드언의 반대편에 선 것이다. 공식적으로.
‘아. 그렇게 결정하셨다? 근데 왜?’
사람들은 기드언이 친위대를 홀대했다 여길지 모르나, 이제껏 모호한 태도를 취해 왔던 건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무작정 신뢰를 갖고 회유하기에도 껄끄러운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시기의 문제일 뿐 공작이 언젠가는 왕후 쪽으로 붙어 설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하니 기분이 더러운 건 별수 없었다.
기드언은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뗐다.
“고(故) 블룸 백작은 내 비의 친부이고 나의 스승입니다. 여기서 나만큼 그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죠.”
기드언은 그 말을 하며 왕후를 힐긋 한 번 바라보았다.
착각일까. 세월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얼굴은 희미한 조소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 표정을 세밀히 관찰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일로 신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다들 잊고 있나 본데 공국도 엄밀히 말하면 발터의 영토입니다.”
“…….”
“공국을 발터에 완전히 복속하자는 주장은 꾸준히 있어 왔고 나도 그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나 그 전에 먼저 무너지면, 나눠 먹을 게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기드언의 발언을 끝으로 회의장은 적막에 잠겼다.
평소라면 시간을 더 끌고 형식상의 거수라도 붙여 귀족들이 어디에 줄을 대려 하는지 가늠해 보았을 테지만, 오늘은 국왕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국왕은 기드언의 예상처럼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드언, 아직 대공이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해 온 것도 아니지 않느냐.”
“폐하, 이번 시찰 때 그 뜻을 충분히 확인했습니다.”
“나는 정식으로 서한을 받지 못하였느니.”
기드언은 말을 아꼈으나 속으로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바로 국왕이 실권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고.
파티는 물론이고 정례 회의에조차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왕에게 누가 정무를 진심으로 논하겠는가.
귀족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면 국왕은 강해야만 했다. 아파서도 안 됐다.
하지만 국왕은 이 잠깐의 회의조차 피로하게 느껴졌는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군사 파견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자꾸나. 지금으로선 왕실이 먼저 조급한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는 듯하구나. 결국, 그들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이 아니냐.”
“…….”
“그럼 여기서 마무리하지. 다들 수고하였소.”
국왕이 일어서자 왕후는 곧바로 따라 일어나 팔을 부축했다.
귀족들은 회장을 나서는 국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이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기드언은 귀족들이 듬성듬성 빠져나가 휑해진 원탁 앞을 지키며 뮐러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자신의 오늘 발언이 왕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그는 창백한 낯빛이었고 기드언은 철회할 기회를 줄 생각도 없으면서 의사를 재확인하듯 물었다.
“오늘 경이 보인 태도가, 지난번 식사 자리에 대한 대답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전하.”
“왕후 폐하가 뭘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보십시오.”
왕후는 자신의 혈육을 군부에 어렵잖게 꽂아 넣을 수 있는 사람이니, 공작을 더 위로 끌어 올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쉽지만은 않을 거야.’
왕후는 그 능력에 비해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이러한 상황을 꽤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준비했거든.
기드언은 차가운 눈으로 조소를 흘리며 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뒤따르는 부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공작과 관련해서 얘기했던 거 말이야.”
“…….”
“세 번째 방안.”
“……예, 전하.”
“진행해 봐. 일단은 경고 정도로만.”
수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어둡고 긴 복도에는 사내들의 구둣발 소리만이 저벅저벅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