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5)
* * *
기드언은 팔을 벤 채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옆에는 타티아나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여느 때와 비슷한 밤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오늘따라 오가는 대화가 없었다.
사실 기드언은 지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낮에 있던 회의가 그의 신경을 몹시도 예민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늦은 밤이었고 이곳은 침실이었으나 그는 이제껏 일에 있어서만큼은 시간과 장소의 구분 없이 살아왔다.
매일같이 머리를 굴리고, 정보원들에게 수시로 보고받고,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궁리하고.
그러나 그는 얼마 전 결혼이란 걸 했다. 머리 아픈 이야기를 부부 침실로까지 끌고 오고 싶지 않았다.
타티아나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심각한 분위기를 끼얹기 싫었다는 쪽이 더 옳을 것이다.
나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 해서 상대의 침대를 일터로 만들 수는 없으니.
하루 중 휴식 시간은 이처럼 결혼과 함께 의도치 않게 찾아왔다.
다만 쉴 새 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을 비우는 데에도 일종의 노력이란 게 필요했다.
기드언은 이게 아직 익숙지 않아서 가끔은 의문스럽기도 했다.
‘억지로 쉬려고 노력하는 것도 휴식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데 지금 보니 그녀는 그보다 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밤이 꽤 깊었는데도 그 표정은 오랜 시간 그대로라 기드언은 의아해졌다.
‘네가 이렇게 길게 고민하는 사람이 아닐 텐데.’
정작 본인은 밖에서 있던 일을 입도 뻥끗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면서. 타티아나에게 들키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뮐러 공작을 보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기드언은 그녀의 속이 알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너는 굳이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지만, 나는 다 알아야겠다니.
이것은 불공평한 발상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전에 한 말처럼 자신은 성격이 정말로 못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뭐. 못됐는데 뭐.’
기드언은 비식거리며 타티아나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심술궂은 속내와 다르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해요?”
타티아나는 스르륵 고개를 돌리더니 기드언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이렇게 물어와 주기를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팔뚝에 매달리는 손끝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내 앞으로 나오는 내탕금,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민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야.”
아아. 그걸 아직도 결정 못 했어?
기드언은 정말 별것도 아닌 고민이었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꼭 뭐 안 해도 된다니까. 그냥 용돈으로 써요. 옷이나 사 입든가.”
“옷?”
“예쁜 갑옷.”
“……그 돈으로 갑옷을 사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군대도 만들 수 있겠네요.”
그렇게 개인적으로 운용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돈으로 안분지족한 사례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타티아나는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예 안 하면 모를까, 기왕 하기로 결심했다면 제대로 하자는 게 타티아나의 평소 신념이었다.
운동할 때도 투덜투덜하면서 건성으로 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하는 둥 마는 둥 할 거면 차라리 근육에게 쉴 시간을 주는 게 낫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며칠째 골치가 아팠다.
전혀 해 본 적 없는 분야인지라 이제는 숫제 머리가 빠개지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왕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평생 안 해도 좋을 고민이었다.
비단 타티아나만 겪는 일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제아무리 행복하더라도 무수한 의무가 수반되기 마련이니까.
원래 좋은 것과 싫은 것은 어느 하나만 오는 법이 없다.
시간차 공격일 뿐, 같이 온다.
타티아나가 수심 어린 얼굴로 계속 한숨을 쉬자 기드언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이게 설령 그에게는 별 게 아닌 문제일지라도, 그녀가 자신과 결혼을 함으로써 새롭게 지게 된 의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여기서 ‘이겨 내! 별거 아니잖아. 남들도 그 정도는 다 하잖아?’라고 말하면 멀쩡했던 분위기가 아주 삭막해지는 것이다.
기드언은 비록 초혼이었지만 그 정도로 눈치가 바닥은 아니었다.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할 줄도 알았다.
사실 이건 눈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상대를 향한 마음의 크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혹여 당연한 의무일지라도,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크면 내 배우자만큼은 안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기드언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티티도 기록을 봐서 알겠지만, 다들 내역은 비슷합니다. 의료 시설, 빈민 구휼이 대부분이에요. 사실 이런 일에 창의성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거예요.”
“뭐, 그렇겠죠. 공주 전하는 보육 시설을 설립하셨더라고요?”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예전부터 아이를 좋아했어요.”
“……그래요?”
“예쁘고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그게 사람이든 보석이든.”
타티아나는 뭔지 알 것 같아 푸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이 꼬마들을 향해 꺄아거리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좋아한다는 사람치고 스칼렛 부부는 아직 슬하에 자녀 소식이 없었다.
이건 또 남이 함부로 말하거나 넘겨짚으면 안 되는 문제였기에 타티아나는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티티가 사업 분야만 정해 주면 나머지는 밑에서 다 알아서 할 겁니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나중에 예산안에 남길 서명 연습이나 해요.”
“서명?”
“결혼식 때 보니까 바로 못 하던데.”
타티아나는 눈을 흘겼다.
그게 서명을 할 줄 몰라서였나?
중간 이름으로 블룸을 써야 하는지 뮐러까지 써야 하는지 잠시 고민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녀는 피식거리는 기드언이 얄미워 팔뚝을 꼬집어 주려다가 오늘도 ‘폭력 금지’라는 소리를 들었다.
타티아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고,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사실 생각해 본 게 있긴 한데.”
“응, 뭐?”
“비웃으면 안 돼요.”
“뭘 비웃어. 자기 돈 자기 맘대로 쓰겠다는데.”
실제론 내 돈이 아니니까 그렇지.
타티아나는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
“학교 어때요. 왕립 학교는 잘 되어 있으니까 빈민촌 쪽에요.”
빈민촌이라면 결국 그 대상이 평민 혹은 천민에까지 이른다는 뜻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하여 일터로 내몰리는 아이들에게 이런 시설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타티아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타티아나는 평민 출신임에도 출세하신 부모님 덕에 자신까지 큰 혜택을 입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꼈던 건 재능이었지, 재물이나 기회가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반대의 경우가 존재한다면 그건 너무 서러운 일일 것 같다.
이제 와서 거기에 무슨 소명 의식이나 거창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한테 주어진 예산이라면 이렇게 써도 괜찮지 않을까.
블룸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일 아닐까.
기드언은 자신의 아내가 몇 날 며칠 머리를 쥐어 짜낸 결과를 듣고 웃음을 흘렸다.
나쁘지 않았다. 의도하는 바도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그는 예상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일단 블룸 가의 출신이 다시 한번 거론될 것이다.
그거야 뭐,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이니 그렇다 치고.
문제는 평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 사업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귀족들이 있다는 거였다.
“티티.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
“귀족들은 평민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타티아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말을 귀족들의 위에 있는 왕족이 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지그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밑에 있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어느 순간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나를 넘어서면…… 돌아 버리는 사람들이 꼭 있거든.”
그는 타티아나 주변에는 이제껏 그런 사람이 없었는지 참 궁금했다.
나는 잘 모르겠으니 너라도 한번 잘 생각해 보라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어둡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기드언은 다른 말을 꺼내는 대신 당장의 짐부터 덜어 주기로 했다.
“어쨌든 난 비의 계획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명할 준비도 되어 있어요.”
“정말?”
“네. 그렇지만 그 전에 누이랑 한 번쯤 의논해 봐요.”
“스칼렛 전하랑요?”
“누이는 의전이나 행사 쪽엔 나보다 훨씬 밝으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법을 너무나 잘 압니다.”
평상시에는 엄청 헐뜯다가도, 이럴 때는 또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타티아나가 훈훈하네, 생각하려던 찰나 기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근데 솔직히 너무 시끄러워. 그게 문제야.”
그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귀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능력은 있는데 너무 화려하고 요란해서 가끔 그 내실이 안 보인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혈육에게 너무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서로를 흉볼 때만큼은 진실하다 못해 가차 없는 오누이 때문에 그녀는 밤새 키득거리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