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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74)화 (127/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장.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2)

* * *

기드언은 오전 내내 서류를 검토하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약식으로 열린 군사 회의의 속기록이었다.

왕후가 주춤하는 틈을 타, 기드언은 다시금 북부 마물 정벌론을 꺼내 들었다.

설득의 미학이 정치에도 늘 통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다수의 군주들은 그보다 훨씬 빠르고 편한 길이 있다는 걸 안다.

공포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뮐러 공작의 숙청 과정에서 1왕자 측이 보여 준 행동력과 정보력은 놀라웠다.

그들이 수집해 놓은 자료는 어디까지일까.

저 칼날은 최종적으로 바이칼과 왕후의 목을 향할 것이나, 그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이가 딱 그 둘뿐일까?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 결과 기드언은 마물 정벌 건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귀족 대다수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국왕의 재가뿐이었다.

그러나 왕이 최종적으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지는 알 수 없다.

‘몸은 병들어도 권력욕은 영원히 쇠하지 않는 것인가 보지.’

어쩌면 부왕은 그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독살당한 어머니 때문에 설움을 삼키던 맏이 스칼렛.

왕이 자신의 첩을 왕후로 봉하던 날, 그 예식의 증인이 되어야 했던 기드언.

이복 오누이와 친모의 기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온 바이칼.

그들 중 진심으로 국왕을 봉양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이제 와서 누구 책임으로 돌릴 텐가. 본인이 살아온 대가를 늘그막에 그대로 되돌려 받는 것이지.

기드언은 조소하듯 입을 비틀고는 회의록을 덮었다. 그러고는 의자를 돌려 창가를, 정확히는 연무장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티아나가 오랜만에 검을 들고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시종은 때맞추어 뜨거운 차를 한 잔 우려 왔다.

사람들은 이게 1왕자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자 휴식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좀 음험한 것 같기는 하나, 잘 생각해 보면 그는 그냥 자기 아내를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기드언의 이마에는 실금이 하나둘씩 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가 웬 도마뱀 한 마리를 사이에 둔 채 케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크기가 거의 아이 팔뚝만 했다.

부관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 대해 말을 올렸다.

“요즘 저걸 보면서 그렇게 즐거워하신답니다.”

“……저것도 키우나.”

“예?”

부관은 왕자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혹시 괜한 이야기를 한 건가 싶어 눈치를 살폈지만, 기드언은 계속하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했다.

“그, 비전하께서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하던 종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왜, 눈을 잘 안 감는대?”

“……허,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관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부연했다.

“잘 때도 눈을 안 감는다고……. 그런데 그게 눈을 뜨고 자는 게 아니라 눈꺼풀이 얇은 비닐처럼 생겨서…… 마치 보호색처럼 적들의…….”

“그런 것까진 안 궁금해.”

부관은 입을 딱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죠. 사실 저희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즐거워하시길래 열심히 들어 주고, 혹시나 해서 받아 적은 것뿐입니다…….

기드언은 뚱해진 부관을 보며 피식피식 웃다가 창가에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간혹 눈에 띄는 생물체들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이 사는 곳에는 원래 이상 기후나 생태 변화가 종종 목격되곤 한다.

어떤 마력 특성을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다지만, 블룸 부인이 사는 저택도 그러했다.

사실 기드언은 그와 관련해 블룸 경에게 하소연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아마 대련을 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저놈의 개구리들 때문에 세상 시끄러워서 못 자겠습니다. 제가 하루 날 잡고 싹 다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했는데, 뭐.’

‘타냐가 가끔씩 같이 노는 눈치더라고요.’

‘…….’

‘그럼 그냥 놔둬야죠, 뭐. 어쩌겠습니까.’

‘누가 뭐랬나.’

왜 예년에는 안 보이던 생물들이 갑자기 눈에 띌까.

기드언은 의심이 가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바이칼 때문인가.’

그는 몇 년 전, 2왕자의 손에서 마력석이 반응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탑에 한번 확인해 보라, 정보를 흘린 것도 기드언이었다.

이참에 바이칼을 마탑으로 보내 버릴 순 없을까, 궁리했던 것이다.

한창때의 왕족에게 마탑행은 귀양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칼이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로 성장하여 세를 모으면 곤란한 일이나, 그건 절대로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 보내 놓고, 목숨은 그다음에 거두면 된다.

방법이야 많았다.

그러나 온갖 정보들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바이칼의 마력이 위협적이긴커녕 무의미한 패라는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왕후 또한 자신의 아들을 그리 쉽게 놓아줄 리 없는 사람이었다.

바이칼은 왕후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왕후의 비호가 없으면 바이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바이칼이 없으면 왕후는 그보다 더 아무것도 아니었다.

승계 싸움에 끼어들 명분 자체가 없으니까.

한데 기드언이 몇 년 전, 아무 의미 없다 여겨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던 그 가능성을 당사자는 계속 붙잡고 있었나 보다.

뭐, 그것까진 상관없었다.

기드언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왜 그 진로 상담을 남의 아내한테 하냐는 거다.

‘진짜 가지가지로 거슬리게 하는군.’

그런데 다시 창가를 바라보니, 눈앞에는 그보다 더 심상치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케이와 담소를 주고받던 타티아나는 어느새 그와 검을 겨루는 중이었다.

기드언이 눈살을 찌푸린 건 그녀의 검이 평소보다 훨씬 과격하게 느껴져서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기술들의 향연이었다.

기드언은 거기에서 타티아나의 의지를 읽었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꼭 케이와 승부를 보고, 승자를 가리고 싶은 것이다.

그 모습이 가히 한 마리의 암사자 같았다.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도…….

‘검만 들면 너무 용맹해진단 말이지.’

검사로서는 엄청난 자질이나, 기드언은 가서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그때 타티아나가 바닥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검에 체중을 싣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그녀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본래 상대의 공격을 피한 뒤, 그 빈 공간을 노리는 걸 장기로 삼는 검사였다.

그래서였을까. 케이의 얼굴에도 얼핏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평소라면 저 일격을 요령껏 흘려보냈을 것이나, 케이는 정면으로 검을 맞받아쳤다.

타티아나가 띄운 승부수. 힘과 힘의 대결.

비록 그녀가 높이와 체중을 활용했으나, 케이는 결국 그녀의 검을 막아 냈다.

그러나 전에 없이 격렬했던 탓인가. 갑자기 케이의 검 끝이 부러지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칼날 조각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그녀를 향해 날아갔고, 타티아나가 얼른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썹 끝을 스치고 말았다.

“저, 전하……!”

깜짝 놀란 부관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드언을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전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창가에서 뛰어내린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 뒤로 왕자궁 분위기가 얼마나 끔찍해졌는지, 부관들은 굳이 회상하고 싶지 않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왕자비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칼날은 그녀의 눈썹을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출혈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지 알 수 없어 새파래진 얼굴로 절절맸다.

그런 가운데 왕자비는 오직 혼자서만 여유로웠다.

민망해하면서도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설명까지 해 주었다.

‘원래 눈썹 주변이 찢어지면 피 철철 나요. 피부가 얇아서. 근데 이건 진짜 큰 상처가 아닌데.’

왕자는 그때 딱 한 마디 했다.

‘그 입, 다물어요.’

그러자 비는 정말로 조용해졌다.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듯했다.

그러나 의원이 도착한 뒤로는 정말로 왕자비가 말한 그대로였다.

피를 모두 닦아 내고 나니, 상처는 허무하리만큼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딱 손톱 절반만 한 크기였다.

의원은 실금처럼 하얀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나, 그 또한 눈썹에 가려질 것이라 말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왕자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막 집무실로 돌아온 차였다.

하지만 부관들은 아직 이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드언은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는 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기드언의 입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결혼하고 성격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부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랑곳 않고 기드언은 마저 말을 이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 한 번쯤 더 생각을 해 보게 돼.”

혹시나, 했던 부관들은 역시나 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드언은 정말로 케이를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케이 또한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듯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기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케이에게 거칠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퍽, 둔탁한 타격음에서는 조금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관들은 오히려 안도했다. 이건 목까진 베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수위의 처벌로 마무리할 생각인 것이다.

“진심이 될 것 같으면 네가 먼저 중단하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송구합니다, 전하.”

“넌 오늘부로 비의 호위에서 제외다.”

“……예, 전하.”

기드언은 사죄하는 케이를 노려보며 거칠게 손목을 털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 뜻밖의 명을 내렸다.

“대신 부왕이 국새를 두는 곳을 알아 와. 빨리 알아내야 할 거야.”

그때까지 네 목숨은 보류라는 뜻이었다.

케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으나, 부관들의 표정에는 의문이 깃들었다.

왕자는 왜 국새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걸까. 혹시 정상적인 승계 절차가 어렵다고 보는 걸까.

그 속내까지는 알 수 없으나, 국새의 위치라면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부관 하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침실 어딘가가 아니겠습니까. 몸져누우신 뒤로는 대부분의 서류가 그곳을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 다녀가셨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끊겼습니다.”

그러자 기드언은 턱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케이에게 또다시 지시를 내렸다.

“잠입할 계획도 같이 세워 와.”

집무실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국의 왕의 침실에 어떻게 몰래 들어간단 말인가.

아무리 실세에서 밀려났다 한들, 왕은 왕이었고 그 앞을 지키는 호위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건 솔직히 너무나 무리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토를 달려는 사람은 없었다.

케이도 그러했다.

감히 왕족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는데, 목숨을 구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단은 감지덕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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