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1)
세 사람은 원탁을 가운데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배석자는 명령권자인 기드언, 행동 대장인 케이, 그리고 명령권자의 부인이자 이제는 행동 대장의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는 타티아나였다.
그들은 향후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고, 기드언은 케이에게 진척 사항을 확인했다.
“리고르 대공한테 준비하라고 했어?”
“엊그제 북부로 부하들을 보냈습니다.”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일을 가늠했다.
발이 빠른 이들이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기드언과 부관들은 조만간 수도에 내란이 일어나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확률은 거의 100프로에 가까웠다.
국왕이 침실에 누워 있는 시간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피습 사건을 전후해서는 거동하는 모습을 본 자가 거의 없었다.
이대로라면 왕좌는 자연히 기드언에게 굴러 들어올 테지만, 왕후는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는 수도 방위군이 있고, 정변은 무조건 일어날 것이다.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사실 아주 거창한 계획은 없다.
그들은 도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 기드언이 이 계획을 밝혔을 때, 타티아나는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왕좌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성을 버리면 어떡하자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왕성이 가진 상징성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주변인들이 난색을 표하는데도 기드언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상징성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정통성이라면 차고 넘칠 만큼 있었다.
그간 양성해 온 살수 집단과 예전부터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북부군을 불러들여 제압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예상되는 피해 규모가 너무 컸다.
기드언은 약간 돌아가는 김에 산재해 있는 다른 문제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방법을 꾀했다.
골머리를 앓아 온 북부 마물 사태를 이참에 해결하고, 공국의 지지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발터 대중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사실…… 난 성에서 퇴각하면서 좀 불쌍해 보이고 싶어요.’
남편이 너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해서, 타티아나는 한때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누구요?’
‘나 말이야, 나. 신민들한테 동정표를 받고 싶다고.’
‘……어머나, 세상에.’
타티아나의 입에서 쉽게 안 나오는 감탄사였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로 놀랐다.
결혼 초에는 만성 빈혈이 어쩌고 하더니, 내 남편은 똑똑한 사람이면서 왜 한 번씩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까 싶었다.
‘전하, 저는 이 말에 온몸으로 반대하면서 살아오긴 했지만, 세상에는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요. 전하가 어떻게 남들한테 불쌍해 보여요?’
거지 옷을 입고 길바닥에서 비렁뱅이처럼 구걸해도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자세가 꼿꼿할 테고, 그러다 지겨워지면 비딱하게 앉아서 턱을 괼 테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눈빛이 불손한데 대체 어떻게 가엾어 보이려고.
기드언도 사실 안 되는 건 알고 있었고, 그 목적이 다는 아니라서 피식 웃으며 부연했다.
‘현재 전력으로 맞서 싸우는 건 상호 간에 피해가 너무 큽니다. 즉위하면 다 내 군사가 될 거예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방향은 원치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내가 원하는 건 무혈입성이에요. 투항을 받아 내려면 압도적인 군사가 필요해요.’
그의 계획은 마물 사태를 마무리 짓고 살수들, 북부군, 중앙군, 공국의 군대와 함께 수도에 재입성하는 것이었다.
마탑과 풀만 왕국의 지지 성명이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풀만 왕실이 어느 정도 선까지 협조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기드언 부부에게 빚을 진 게 있으니 무엇으로든 갚아야 했다.
그 부분을 조율하는 건 공주의 남편인 브라우닝 경의 역량에 달려 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남편은 수도를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요란하게 떠나고 싶다는 거였다.
마치 이복 아우와 새어머니에게 쫓겨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소문을 내면서.
그리고 그렇게 요란하게 도망친 다음에는 화려하게 재입성하고 싶다는 거였다.
마물 사태 해결의 주역이라는 위명도 필요한가 보다.
그녀는 연신 한숨을 쉬었다.
내 남편이지만 너무 음흉한 것 같아서였다.
오늘 그들이 모인 건 이 계획의 연장선상이었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새 때문이었다.
기드언은 케이에게 국새를 가져오라 명한 적이 있으나, 결론만 말하자면 그 시도는 실패했다.
물론 케이는 국새의 위치를 확보했고, 작전을 위한 경로도 짜 두었다.
가져오라면 지금 당장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나 그 과정에서 남들 눈에 띄거나 격투를 벌일 각오 정도는 해야 했다.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할 텐가. 이건 양측 다 이판사판일 때나 시도할 수 있는 일이라고, 케이는 그렇게 보고를 올린 바 있으나…….
그사이 새로운 요원이 등장하고 말았다.
왕자비는 마법사였고, 케이가 알기로 세상에는 수면 마법이라는 게 존재했다.
살수나 도둑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능력이다.
게다가 왕자비는 다른 남성 살수들에 비해 체구도 작았고, 유연성도 월등히 뛰어났다.
환기구로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케이가 처음 이 같은 의견을 제시했을 때, 기드언은 눈을 부라렸다.
‘지금 누구 아내보고 어디로 들어가라고? 내 비가 왜 그런 험한 일을 해야 하지? 그건 너희 살수들의 임무다.’
‘전하. 이제 발터에서 비전하보다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비전하를 작전에 활용하지 않으면 어떡하시자는 겁니까.’
기드언도 타티아나가 우리 진영의 가장 강한 전력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다만…….
‘너, 지금 그 활용이라는 단어가 몹시 거슬린다.’
‘죄송합니다.’
케이는 곧바로 사죄했지만, 본인의 의견을 굽히지는 않았다.
타티아나는 이 계획이 마음에 쏙 들었기에 케이가 이기기를 바랐고, 기드언은 그녀의 내심을 고스란히 읽고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기드언은 국새가 필요하지 않다.
누차 말했지만 정통성은 이미 차고 넘치니까.
그가 이삿짐을 쌀 때 국새를 함께 가져가려고 하는 건, 상대편에게 넘겨주기 싫어서다.
국새가 있으면 국왕의 뜻이나 유언장을 위조할 수 있고, 왕후는 그걸 놓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기드언은 결국 이 계획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타티아나와 케이는 머리를 맞댄 채 이동 경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건물 외벽에 달라붙었다가 창문을 통해 잠입하여 나중에는 환기구마저 지나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기드언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둘만 가려고?”
인원이 적어 위험한 건 둘째 치고,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기드언은 약간 심술을 담아 덧붙였다.
“나도 가는 건 어때?”
케이는 생각 외로 그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눈치였다.
그는 다른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이 계획의 성공에만 관심이 있었다.
국새를 훔치기만 한다면, 암살 길드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이었다.
왕자도 함께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인재였다.
그러나 케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타티아나가 대신 설명했다.
“제가 시험 삼아 왕자궁 환기구에 들어가 봤는데요. 전하는 거기 지나가려면 어깨 잘라야 돼요.”
기드언은 그 말에 케이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다니는데.”
“저는 일단 전하보다는 체격이 작고, 어깨를 뺏다 맞출 때도 있고…… 제 나름대로는 노하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도 잠깐 뺏다가 끼우면 되겠네.”
기드언은 이미 안 될 일이라는 걸 알고는 심드렁하게 내뱉었으나, 타티아나는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전하, 그러다 습관성 탈골 와요. 한 번 빠지면 아무 때나 계속 빠진다고.”
타티아나는 그로 인해 고충을 겪고 있는 기사를 한두 명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상담은 받았는데,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기드언은 갑자기 의아해져서 케이와 타티아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럼 쟤는 어떻게 사는데? 묻는 눈이었다.
“전하랑 케이가 같아요? 케이는 저게 직업이잖아요. 숙련자들은 원래 직업병이 하나씩은 다 있어요. 감수하고 살아야죠.”
타티아나의 말은 그럴듯했다.
기드언도 잘 이해했다. 꼭 같이 가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았는데…… 왜 티티가 이렇게 신이 났죠?”
타티아나는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서 입술을 오물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 지금 의욕에 차 있었다. 사실은 심장이 막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타티아나는 최근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아버지의 검술, 그 마지막 장을 구현했으며 마력마저 손에 얻었다.
그 순간에는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자는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공허함에도 대비해야 한다.
후련함과 성취감, 그 이면에 뒤따르는 허전함을 잠시나마 있는 그대로 느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으나, 사람 성격에 따라서는 그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대다수는 불가능하다.
삶의 목표를 성취한 자들은 대체로 부지런한 편이라서, 현상을 관조하거나 우두커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공허감에 대항하는 그럴듯한 방법은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거였다. 그러니까…….
“우리 계획 망칠 생각하지 말고 전하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명령이나 내려요.”
방해하면 바로 그 남편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가를 가린 채 웃고 말았다.
아내가 너무 의욕적이라서 그도 더 이상 딴지를 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