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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11)화 (129/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4)

* * *

결전의 날이었다.

오늘 밤, 타티아나와 케이는 한 조가 되어 국왕의 침실을 털 예정이었다.

그녀는 이제껏 타인의 신체 조건을 부러워한 적은 많으나, 남의 물건을 탐해 본 적은 없다.

맹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좀도둑이 아니라 대도라니, 블룸으로 사는 건 역시 녹록지 않았다.

아니, 이 경우엔 왕자의 부인으로 사는 게 쉽지 않다고 해야 할까.

기드언은 잔뜩 기합이 들어 있는 타티아나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짧은 인사도 건네지 않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 했으나, 기드언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고는 당부했다.

“무턱대고 마법부터 쓰지 말아요. 마탑주가 하는 말 잘 들었죠?”

“알아들었어요. 마력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응, 그러니까 무슨 일 생기면 케이 시켜요. 몸으로 때우는 거 잘합니다.”

타티아나는 그 몸으로 때운다는 표현이 그답지 않게 너무 투박하여 키득거렸다.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던 케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더 웃겼다.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한 타티아나는 다시금 어둠의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디디려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달무리 진 밤이 지나기 전에 임무를 끝내야만 했다.

그러나 기드언은 오늘따라 말이 길었다.

그녀의 손목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당부를 계속 이어 나갔다.

“혹시라도 일이 어그러지면, 무리하지 말고 도망쳐요.”

“네, 네. 알았어요.”

“그마저도 안 될 것 같으면 전부 다 사살하세요.”

“……그럼 뒷수습은 어떻게 하시게요? 곤란한 정도가 아닐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몰래 훔쳐 오는 것보다 전부 다 제압한 뒤에 유유히 가져오는 쪽이 쉽기는 했다.

살수인 케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마검사인 타티아나의 입장에선 그러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방식을 택할 거라면 그들은 왜 지난 며칠간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계획을 세웠나?

기드언의 말은 그들의 작전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드언의 발언이 한 치의 오점도 없는 성공보다는 타티아나의 안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케이에게 이렇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남편이 생각보다 잔소리가 좀 있는 것 같아.”

기드언은 그 말을 듣고 몹시 어이없어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부연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호소한 부관은 있었으나, 말이 많다고 불평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기드언도 자신이 지금 다소 과도한 걱정을 늘어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아내가 비밀 작전의 핵심 요원으로 나서는데 이 정도 말도 못 하나?

여기서 잠자코 있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기드언은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흑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색이 기드언에게 어떤 잔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만약 여기서 트라우마가 하나라도 더 생긴다면 그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몰랐다.

타티아나는 남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는 잘게 웃었다.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흔들며 ‘갔다 올게요’ 인사도 했다.

그러나 왠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기드언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타티아나는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짧은 입맞춤 뒤 곧바로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주군의 오묘한 표정을 본 건 케이 뿐이었다.

봐선 안 될 걸 엿본 듯한 난감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케이는 뒤처지지 않겠다는 듯, 타티아나를 따라 창밖을 향해 몸을 던졌다.

차가운 겨울 공기 탓에 타티아나의 입에서는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것마저 감추고 싶어 복면을 끌어 올렸다.

국왕의 침소 주변에는 예상처럼 많은 호위 인력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중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건물 근처로 접근할 수 있었다.

철저한 사전 조사 덕분이었고, 타티아나의 곁에 발터 최고의 살수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건물의 후미로 돌아가 암벽을 등반하듯 외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케이는 어젯밤 미리 와서 따 놓은 창문을 열었고, 자재 창고에 들어선 두 사람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환기구로 들어갈 차례였다.

케이는 굵은 쇠창살을 분리한 뒤, 타티아나의 앞에 엎드렸다. 밟고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

솔직히 말해서 타티아나는 이런 배려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제까지 해 온 턱걸이가 몇만 개이며 근력을 키운답시고 오르락내리락한 나무가 몇백 그루인데, 고작 이 정도도 혼자 못 올라갈까.

하나 그녀는 잠자코 케이의 등을 디딤돌 삼기로 했다.

원래 선임이 시키면 그냥 하는 거다.

여기서 군소리하기 시작하면, 시간만 지체될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케이의 등을 턱, 밟고는 환기구 안으로 쏙 파고들었고, 케이는 그녀를 뒤따라 올라오더니 쇠창살을 다시금 끼워 넣었다.

감쪽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환기구에 잠입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타티아나는 이걸 약간 만만하게 생각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병사들처럼 포복 훈련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케이가 지나다니는 통로를 내가 못 지나갈 리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키, 어깨는 물론이거니와 머리통까지도 케이보다 작았다.

물론 가슴이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나……. 글쎄. 그걸 걱정해야 할 정도로 볼륨과 존재감이 그렇게 엄청나진 않다.

아마 신체 조건뿐만이 아니라 유연성 면에서도 그녀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타티아나는 근력 운동도 좋아했지만, 스트레칭에도 취미가 있었다.

아침마다 빼먹지 않았다.

무희들이 하는 자세도 웬만한 건 다 가능했다.

그런데 막상 환기구 안에 들어와서 10여 분쯤, 포복을 해 보니 체구와 유연성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공간에서 몸을 잔뜩 구긴 채로 이동하는 건 예상보다 어려웠다.

일단 속도가 마음먹은 만큼 나지 않았다.

사지가 결박된 것과 비슷한데,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청각과 촉각만 잔뜩 곤두서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몰리는 기분이네.’

왠지 초조해져서 뒤를 힐끔 돌아보면, 케이의 눈동자는 너무나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른 안 가고 뭐 하냐고 묻는 것 같아, 타티아나는 이따금 눈치가 보였다.

그녀도 빨리 가기 싫어서 미적거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엘리트 검술만 익혀 온 검사와 험한 곳을 전전해 온 살수가 가진 경험치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눈이 마주치기를 몇 차례, 제풀에 찔린 타티아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하아, 갈 땐 네가 앞장서. 되게 눈치 주네.”

케이는 눈치 준 적 없었다.

오히려 그는 왕자비가 예상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몹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 그 점부터 지적했다.

“비전하, 좁은 통로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울립니다.”

“…….”

그는 이 아래 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눈을 내리깔았고, 타티아나는 그 뒤로 입을 꾹 다물고 꾸역꾸역 전진했다.

이런 것도 경험이라고, 시간이 좀 지나니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좀이 쑤셔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은 살수로는 절대 못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 통로를 다 때려 부수면 부쉈지, 이렇게 가슴 졸이며 숨어 다니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전진했을까. 통로 안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새어들었다.

견고한 쇠창살이 바닥 면과 맞은편에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건너편 통로는 얼핏 보아도 비좁아서, 더 이상은 진입이 불가능했다.

케이가 미리 언질을 주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타티아나는 쇠창살을 넘어 반대편으로 기어갔고, 곧이어 케이가 품에서 꼬챙이를 꺼내 환기구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비품 창고나 다름없는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후우…….”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심장이 떨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도둑질은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그녀를 뒤따라 내려온 케이는 담담해 보였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옷에 묻은 먼지나 툭툭 털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약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타티아나는 곧 자기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이 방은 그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다.

국왕의 방에 잠입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타티아나는 방문을 주시하다가 준비해 온 주문을 읊었다.

“당신은 나그네. 아무리 두드려도 그 문을 열 수는 없으리.”

이 방의 주인은 나. 내 마음은 나의 것. 무례한 손길을 거두시오. 초대장이 없는 자는 돌아가시오. 나는 오늘 밤, 내 마음을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겠소.

방을 폐쇄한 타티아나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현재 똑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탑에서 상납한 망토로, 사람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를 최소화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시적으로 시야에서 감추어 줄 수도 있었다.

하나 이도 결국에는 일종의 매개일 뿐이었다.

시동어가 필요했고, 그 시동어를 외치는 자의 마력 수준에 따라 결과와 지속 시간은 달라진다.

그녀는 솔직히 이 마법이 얼마나 갈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케이가 경비병을 처리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으리라는 것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아까보다 더욱 집중하며 주문을 읊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창을 넘어 외벽을 타고 국왕의 침실로 접근했다.

1차 목표는 나무에 걸터앉아 있는 호위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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