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13)
* * *
기드언 측 사람들은 성 주변에 기거하는 모든 이들의 잠을 깨우며 요란스럽게 수도를 탈출했다.
타티아나도 거기에 일조했다.
그녀는 환영을 만드느라 소진했던 마력이 회복되기 무섭게, 곧바로 확성 마법에 돌입했다.
그러나 첫 시도에는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기드언은 아내가 하는 일에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늘어놓는 짓을 그만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해야만 했다.
‘티티, 이러다 귀가 멀겠습니다.’
청각이 예민한 살수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차마 내색은 못 했지만 눈가가 다 조금씩 일그러져 있었다.
‘미안해요. 확성 마법도 처음이라 그래요.’
‘…….’
‘이것도 하다 보면 늘 거예요.’
어떻게 첫술에 배가 부를 수 있나.
물론 실전은 연습을 위한 장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마력을 얻게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충분한 수련 기간 없이 실전에 투입되었으니, 모든 게 다 매끄럽지는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 뒤로도 사람들의 목소리를 개미 발소리만 하게 만드는 우를 범했다.
그러나 총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아주 적절한 음량을 찾아냈다.
본인이 자신한 대로 단기간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민가를 휘저었고, 성에서 추적대를 보내기 직전 수도를 떠났다.
그 뒤로는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드언 일행은 약속된 장소에서 부관들과 조우했다.
한발 앞서 대피한 코니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반가운 사람이 한 명 더 눈에 띄었다. 스칼렛이었다.
“타티아나!”
“공주 전하.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몸은 괜찮으신 거죠?”
“응, 난 늘 괜찮지!”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안부를 나누었다.
공주는 타티아나가 어지간히 반가웠는지 싱글벙글댔다. 그때까지는.
‘뭐야, 설마 우는 거야? 이렇게 갑자기?’
타티아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던 스칼렛의 눈이 그렁그렁해지자 몹시 당황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서로의 안위만 확인했을 뿐, 별다른 대화를 주고받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마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타티아나는 스칼렛과 함께 온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 내 시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의심스러워하며 캐묻는 눈이었다.
마법사들은 자기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일단 고개부터 젓고 보았다.
그러다 아주 살짝 억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공주는 마탑에서 지나칠 정도로 잘 지냈다.
여기서 굳이 힘들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공주가 아니라 왕족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마법사들일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공주를 무사히 인계하기 위해 허약한 신체를 이끌고 이 자리까지 왔다.
딴에는 할 만큼 했다는 거다.
‘근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잘하라는 건지……?’
다행히 스칼렛은 양측의 불화가 생기기 전에 해명에 나섰다.
그녀는 아주 우아한 손놀림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콕콕 닦으며 말했다.
“그냥 오랜만에 타티아나 얼굴을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 그래.”
아, 난 또.
“……근데 저희 사나흘 전에 보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말이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
“……이러다 나중에 부군께서 돌아오시면 대성통곡하시겠어요.”
스칼렛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계속 눈 끝을 콕콕 찍어 닦았다.
그러다 급기야 타티아나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타티아나는 자그마한 공주에게 안긴 채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러지 마요. 나는 남편이 있는 여자란 말이야.’
지금 바로 옆에서 보고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끌어안으면…… 나도 설레요.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가며 물었다.
‘당신 누나가 지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기드언도 소리 없이 되물었다.
‘뭐가.’
타티아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물결 모양을 그렸다.
웃었다, 울었다, 다시 웃었다, 난리도 아니지 않냐고.
이게 이렇게까지 반가울 일인가? 혹시 임신 영향인가?
기드언도 아이를 가져 본 적은 없기에 그것까지는 잘 모른다. 다만 누이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놀라울 것도 없다는 기색이었다.
“거봐, 내가 늘 뭔가 조금씩 과하다고 했잖아.”
기드언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자, 스칼렛은 그 등에 대고 눈을 홉뜨며 말했다.
“어후, 쟤는 감수성이 너무 메말랐어.”
타티아나는 ‘그렇지는 않던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스칼렛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함께 고생했을 마탑의 마법사들에게도 눈인사를 보냈다.
이제 그만 가 봐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데 마법사들은 말에 오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미적거리기만 했다.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 눈치였다.
“저…….”
“왜 그러시죠?”
타티아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는 마법사들과 북부까지 동행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저들은 이동속도를 단축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발목이나 붙잡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나 기드언 일행에는 이미 스칼렛과 코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비전투 인원이 둘이든 넷이든 그들 입장에서는 별반 차이 없었다.
대신 며칠 간의 혹독한 여정을 견디고 나면, 마법사들은 마물 사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줄 테지.
마물은 마력 그 자체이니 말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더 얻어 낼 것은 없나, 궁리하는 건 타티아나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은 ‘외람된 말씀이오나…….’ 하며 운을 띄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탑주께서 엔야 블룸 부인의 마법서는 언제쯤 공유하실 예정인지, 비전하께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타티아나의 표정은 조금씩 떨떠름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싸늘해졌다.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마법사들이 어떤 특수성을 가진 집단인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 순간 비난을 금할 수 없었다.
“마법사님, 저희 집이 불탔어요.”
“……예?”
못 알아들었나? 전하와 나의 공동 명의 건물이 불에 타 버렸다고.
이봐요, 나는 여행을 나온 게 아니라 길바닥에 나앉은 거야.
그런데 지금 나한테 뭘 달라고? 그럴 때야?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타티아나는 이런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인간들을 보았나,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드언은 가려다 말고 멈추어 서서 입가를 어루만졌다.
그는 아내의 비난이 어딘가 작위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저 마법서를 빌미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고 싶을 뿐인 거였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타티아나의 비난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 무안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들도 말을 꺼내며 내심 찔렸던 것이다.
“아니, 지금 달라는 게 아니라…… 언제가 될지 그 시점만 가늠하려 한 것입니다.”
“일단 북부에 가서 상황을 좀 보고요.”
“…….”
“마물 사태가 심각하면 그때 가서 도움을 청할게요.”
그리고 도와주는 김에, 1왕자 전하에 대한 지지 성명도 하나 내어 주면 아주 고맙겠군요.
그렇다고 아무 때나 무턱대고 발표하면 안 돼요. 아직은 우리가 한패가 되었다는 인상을 심어 주면 안 된다고요.
모든 일엔 다 적절한 시점이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 연락, 꼭 받아요.”
혹시라도 씹으면 마법서는 물론이거니와 국물도 없다는 듯 타티아나는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게 가장된 단호함인 건 사실이라서, 그녀는 곧 슬그머니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이렇게 해도 괜찮나요?’, ‘나 지금 너무 세게 말하고 있어요?’ 묻는 눈이었다.
기드언은 그런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다 얘기해 놓고 이제 와서 뭘 또 굳이 묻는 건가, 싶어서였다.
그것도 혼자서 아주 잘해 놓고.
마법사들과 대화할 때는 아내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
그는 지겨울 정도로 마탑 측과 대면해 보았으나, 아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상당히 컸다.
타티아나는 본인이 마법사이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보고 자란 덕에 저들에 대한 이해도가 몹시 높았다.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머릿속을 거의 읽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마법사들이란 본디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왕자인 기드언을 대할 때보다 같은 마법사인 타티아나에게 훨씬 더 우호적이라는 게 순간순간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대답은 하지 않고 딴청만 피우자, 팔을 잡고 슬그머니 흔들었다.
기드언은 뭘 자꾸 묻냐고, 그냥 다 네 맘대로 하라며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여 주었다.
타티아나는 그 신호를 확인하고는 냉큼 ‘봤지요? 남편이 연락 준대요. 그러니까 늦기 전에 얼른 가 봐요.’ 하며 마법사들의 등을 떠밀었다.
마법사들은 그래서 책은 진짜 언제 준다는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말에 올라탔다.
마탑에 돌아간 뒤로는 오매불망 1왕자 측의 연락만 기다려야 할 팔자였다.
* * *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일행은 이틀 밤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는 동안 시시각각 기온이 떨어지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한기가 옷깃을 뚫고 엄습했다.
그만큼 북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박차를 가하지 못하고, 중도에 말을 멈춰 세워야만 했다.
이미 한 끼를 말 위에서 때웠고, 그보다 더 많은 끼니를 건너뛰었다.
잠은 당연히 자지 못했다.
추적대가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 더욱 서두르는 것이 마땅하나, 임부에게는 다소 가혹한 여정이었다.
사실 살수들은 일반인의 수준을 뛰어넘은 지 오래라,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일단 1, 2시간만이라도 제대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살수들은 불을 피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모아 왔고, 케이는 냉기가 올라오는 흙바닥을 바라보다가 기드언에게 고했다.
“임시 막사를 1, 2개 정도는 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꽤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준비해 왔기에, 아예 빈손으로 성을 나오지는 않았다.
정말 쓰게 될 일이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쫑긋 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왜인지 본인의 출중한 검술 실력보다, 야전 막사 설치 쪽에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타티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