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로스트 월드 -합방(2)
온갖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로스트 월드의 드넓은 평야.
방사선 보호복을 입고.
활 한 자루를 든 채 열심히 그곳을 가로지르던 지호가 입을 열었다.
“아까 혼자 할 때도 느꼈는데, 맵이 진짜 넓긴 넓네요.”
달리기 시작한 지 어언 10여 분.
이제야 저 멀리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게…….
-아니 ㅋㅋㅋ 무슨 팀원들이랑 만나러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15분 ㅋㅋㅋㅋ
-이래서 로스트 월드는 시작하면 기본 10시간이라는 거구나;;; 맵 크기가 무슨;;;;
서버마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로스트 월드의 맵은 대체로 넓다.
가장 작은 맵의 경우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달려가는데 최소 3~40분.
지금처럼 큰 맵의 경우에는 1시간도 넘게 걸릴 정도니까.
심지어 저건 순전히 뛰어갔을 때의 기준이다.
한데, 지호는 스타팅 위치가 집결지인 K7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그만큼 많이 싸우기도 했지ㅠㅠ
-ㅇㅈ ㅋㅋㅋㅋ 방복 어그로 성능 확실하더라 ㅋㅋㅋㅋㅋㅋ
-지금 킬뎃 몇임?
-11킬 0데스 ㅋㅋㅋㅋㅋ 오는 길에 11명 죽임 ㅋㅋㅋㅋ
“남들 발가벗고 다닐 때 혼자 멀쩡한 옷 입고 다니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뭐, 불만은 없다.
방호복을 얻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툭하면 전투가 벌어지는 게임이다.
특히,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인 초반엔 더더욱.
한데 그런 무법지대를.
누더기 같은 천 옷도 아닌, 방호복을 입고 혼자 돌아다닌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당연히 벌써 몇 차례나 적들이 지호를 습격했고.
결과는 모두 그의 승리였다.
“덕분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빵빵하게 자원 얻었으니 된 거 아닐까요?”
지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그의 아이템창에는 돌, 나무, 철 등 기초 자원이 각각 몇 뭉치씩 쟁여져 있었다.
여태껏 덤벼온 적들이 짜잘하게 파밍한 것들을 모았을 뿐인데, 11명이나 되니 꽤나 쏠쏠했던 것.
-이러다가 죽으면 걍 황금고블린행 아님……?
방사선 보호복에, 작은 집 한 채는 짓고도 남을 정도의 자원까지.
누군가는 걱정하기도 했지만.
-??? 미다스가????
-저어어어얼대 안 죽을 듯 ㅋㅋ
-ㅇㅇ;;;; 총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지금 다들 원시인인데 이 괴물을 누가 잡아;;;
-보니까, 게임 초반 활 든 미다스는 걍 재앙임 ㅋㅋㅋㅋㅋ
여태껏 방송을 보던 이들의 관점에선 오히려 그게 더 현실성 없는 걱정이었다.
달랑 활 한 자루만 가지고 총을 든 이들까지 제압한 전적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쿠누누 님… 미아님…. 거기 말고 이쪽으로 가볼게요…….
“넹! 잘 따라갈게요!”
“어? 디티 님! SW방향, 아이스링크 건너에 네이키드 있어요!”
“어…?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따라붙을게요. 나머지 분들도 K9쪽으로 와주세요…….”
그 사이.
집결지에서 합류한 팀원들이 정착할 자리를 찾는지 계속해서 대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K9이면, 가깝네.’
슬쩍 지도를 보니 거의 근처였다.
지도상으로 대략 두 칸 정도?
“확인했습니다. 지금 I10이니까 바로 K9방향으로 합류할게요.”
지호는 팀원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브리핑하며 다시 설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대략 수십 미터 앞에서 설산 방향으로 뛰어가는 세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또 싸워야겠네요.”
여기까지 오면서 시청자들에게 대강 들었기 때문에.
그도 설산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광물이 많이 나오고, 파밍지도 야무진 지역. 그래서 다들 설산에 자리 잡으려 하고, 초반 싸움도 치열하다고 했었지.’
아마 저들도 비슷한 목적일 터.
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엄폐하며 활을 당겼다.
한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
-뭐지? 그냥 가네??
-급한 일 있나본데 ㅋㅋㅋ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상대가 그대로 갈 길을 재촉한 것이다.
“눈 마주치면 무조건 싸우는 게임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요.”
-이제 슬슬 자리 잡아야 할 타이밍이라 그런 듯 ㅋㅋㅋㅋ
-하긴 그것도 그렇네…….
“일단 무시하고 빠르게 이동할게요.”
어차피 그도 팀원들과 최대한 빠르게 합류해야 한다.
지호는 굳이 상대를 자극하는 대신, 얌전히 목표한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쟤네 왜 계속 보이냐 ㅋㅋㅋㅋ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거 같은데?
-설마 ㅋㅋㅋㅋㅋㅋ
설산 입구에서 마주쳤던 이들이 계속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그간 몇 번이나 시선이 부딪쳤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K9, 7번 패드…. 적 있어요! 저랑 쿠누누 님, 그리고 미아 님 셋이서 적이랑 교전 중……!”
디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7번 패드?”
처음 들어보는 듯한 용어에 지호는 고개를 갸웃했고.
그에 대한 답은 채팅창에서 돌아왔다.
-K9을 키보드 숫자패드처럼 9칸으로 나눈 다음에, 그 중에 7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ㅋㅋㅋ
“아, 감사합니다.”
대답하며 빠르게 지도를 확인하니, 바로 언덕 너머였다.
정확히는.
설산 입구에서 마주친 이들이 향하고 있는 그 방향.
이쯤 되니 지호도 확신이 들었다.
“저 사람들 가는 방향이랑 똑같은데 적이겠죠?”
-ㅇㅇ 방향 같으면 백퍼.
-아까부터 님 봤는데도 무시하고 뛰갔잖슴 ㅋㅋㅋ 자리싸움 백업 가나보네 ㅋㅋㅋㅋ
-선빵 ㄱㄱ?
넓고 넓은 로스트 월드에서 하필이면 설산, 그것도 정확히 같은 방향이라니.
우연일 수도 있으나.
그 가능성은 극히 낮겠지.
“아뇨, 그러기엔 거리가 애매하니까 조심스럽게 따라붙어 볼게요.”
지호는 차분히 말하며 디티가 지원을 요청한 지점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대치하고 있는 두 개의 무리가 보였다.
-저기 있네 ㅋㅋㅋㅋ
-3:5?
-이제 저쪽에 3명 더 추가되니까 3:8이네 ;;;;;;
-미다스는 왜 안 추가하냐 ㅋㅋ
세 명의 팀원. 디티와 쿠누누 그리고 미아가, 적 다섯 명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고.
설산 입구에서 마주한 세 명은.
양각을 잡으려는지 아군의 뒤쪽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저 도착했습니다. 뒤에서 지원할게요.”
적들도 계속 따라붙던 지호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명과 한 명.
우선순위는 비교적 수가 많은 저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겠지.
그들이 자신을 경계하기 전에.
지호는 활을 당겼다.
* * *
-형, 이거 맞아?
-여기 쿠누누 방송 맞나요 ㅋㅋㅋㅋㅋㅋ 이걸 싸우네 ㅋㅋㅋㅋ
-지금이라도 ㅌㅌㅌㅌㅌㅌ
-절대 못 이김;;;;
“그러게요. 여기서 싸우면 안 될 거 같은데…….”
종합 게임 스트리머, 쿠누누.
그의 시선이 채팅창을 잠깐 스쳤다가 다시 정면으로 이동했다.
평소 그가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하는 스타일은, 안전제일주의.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니라.
전투는 다른 팀원들에게 주로 맡기는 편이었다.
‘3대 5는 진짜 오반데…….’
촥! 차악!
저 멀리,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대는 다섯 명의 적이 보인다.
반면 그들은 자신과 미아, 디티까지 셋.
평소였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도 없다.
“음…. 여기 자리가 너무 좋은데…. 좀만 더 해볼게요…….”
기리릭-
소심한 목소리와 달리 날카롭게 화살을 쏘고 있는 디티가 빠질 생각을 안 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ㅋㅋㅋ 이걸 포기하면 고인물이 아니지 ㅋㅋㅋ
-자리가 워낙 좋긴 해.
-그치……. 바로 옆에 설산 관측소도 있고. 아까 오는 길에 과학기지도 있더만.
왕눈이를 비롯한 동료 스트리머들과 워낙 자주 플레이했기 때문에.
그의 시청자들도 로스트 월드라면 빠삭하다.
오더를 맡은 디티와 시청자들의 말처럼 확실히 포기하기는 아까운 자리였다.
게다가 영 가망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고인물인 디티가 있었으니까.
콰직!
-캬! 샷 날카로운 거 봐라 ㅋㅋ
-진짜 고인물 짬바는 무시 못 하네 ㅋㅋㅋㅋㅋㅋㅋ
-ㅇㅇ 특히 로스트 월드가 고이면 고일수록 미쳐지는 게임이라….
괜히 고인물이라 불리는 게 아닌지.
그녀의 활은 매서웠다.
오죽하면 수적으로 밀리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7명이었던 적을 2명이나 쓰러뜨렸을 정도겠는가.
“나머지 분들도… 곧 도착하실 테니까… 조금만 힘내봐요…….”
“왕눈이 오빠, 언제 와! 우리 죽어!”
심지어 그처럼 전투에 약한 미아까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혼자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에이, 몰라! 가즈아!”
쿠누누는 크게 외치며 다시 전투에 가세했다.
촥! 쐐애액! 차악!
저들도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닌지 정확성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날아오는 화살.
“왼쪽…. 조심!”
“애들아! 디티 님! 아직 살아있죠? 나 거의 도착했어!”
“일단 빨리 왕!”
디티와 미아,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왕눈이의 목소리까지.
말 그대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인 모양이다.
“쿠누누 님, 미아 님…. 우리 뒤쪽에 3명…….”
후방에서 적들의 일행일 무리가 접근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쟤네 달려오는데???
-판단 잘했네 ㅋㅋㅋㅋㅋㅋㅋ
-??? 8:3이면 그냥 원거리에서 조지는 게 낫지 않나?
-아니지 ㅋㅋ 이 게임 활 다루기가 워낙 어려워서, 고인물 아니면 제대로 맞추기도 힘들거든.
-ㅇㅇ 방금 전까지도 보면 5명이서 쏴대는데 막상 맞는 건 거의 없었잖아 ㅋㅋㅋㅋ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적들.
좌우로 움직이며 달려오는 터라 화살을 맞히기도 쉽지 않았다.
“어, 어떡해?!”
“일단 계속 쏴야 하지 않을까!”
미아도 쿠누누도 당황해서 눈동자가 흔들리는 와중.
유일하게 대응한 건, 로스트 월드에 잔뼈가 굵은 디티였다.
“괜찮아요…. 우리가 더 위쪽에 있으니까. 다들 당황하지 마시고, 나무창 꺼내세요….”
콰직!
마지막으로 쏜 화살까지 적중시킨 후, 바로 나무창으로 무기를 교체한 디티.
가장 먼저 근접하는 적을 찌르기 위함이었는데….
생각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 도착했습니다. 뒤에서 지원할게요.”
이내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콰직!
매섭게 날아온 화살이 나무창을 들고 달려들던 적의 머리, 정확히는 미간 정중앙에 박혔으니까.
-미다슨가???
-ㅇㅇ 목소리가 미다스였음.
-등장 타이밍 뭔데 ㅋㅋㅋ 주인공이네 ㅋㅋㅋㅋ
-이제 8:4!!!! 해볼 만하다!!!
“아직 안 쓰러졌어요!”
머리에 맞았다 한들 화살 한 발로 체력이 바닥나지는 않는다.
스윽-
갑작스러운 화살에 놀란 듯 몸을 움찔하던 적은 또다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쐐애액!
또다시 날아온 화살이, 같은 이의 머리에 박혔다.
그것도 정확히 같은 위치에.
“어?”
-???????
-저건 뭔;;;;;;
-뽀록 오지네 ㅋㅋㅋㅋㅋ
뽀록, 운.
쿠누누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정지된 표적도 아니고.
사력을 다해 달려오는 적의 미간을 정확히 노려서 꿰뚫는 게 말이나 되는가.
“미다스 님, 감사합니다! 디티 님! 가까이 오는 놈들은 제가 맡을게요! 활로 견제 부탁드려요!”
신기하지만, 일단 전투가 우선.
쿠누누는 재빨리 나무창을 들고 다가오는 적을 찔렀다.
그리고 그 순간.
촤악!
무언가 쿠누누의 어깨 위를 지나가더니.
상대에게 박혔다.
‘화살?’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의 화살인지는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미다스겠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번에도 미간에 적중했다는 것.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콰직!
또다시 화살이 날아들더니, 같은 위치에 박힌 것이다.
-????????
-두 번 연속으로 이게 된다고??
-버그임????
-진짜 미친놈이네…….
-아니;;; 이게 뭐냐;;;;;
쿵!
연속된 헤드샷에 쓰러지는 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적인 광경에.
순간 전장에 정적이 흘렀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런데, 반복되면 그걸 우연이라 할 수 있는 걸까?
쿠누누도, 미아도, 적들도.
심지어는 고인물인 디티까지도.
모두 멍한 표정으로 화살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실제 전쟁이었다면 어림없을 일.
그러나, 아무리 현실성 높다지만 이건 게임이다.
말도 안 되는 묘기를 부린 이의 정체가 더 궁금했던 것.
그리고 당사자를 발견한 순간.
“어?!”
모두가 의아한 소리를 흘렸다.
-미친;;;;;
-저 정도면 사거리 끝일 거 같은데…….
-와 ㅋㅋㅋㅋㅋㅋ
화살의 주인일 미다스.
그가 사거리가 간신히 닿을 정도로 먼 곳에서 활을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