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에리카의 질문 세례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된 테르반은 흘긋거리는 시선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테르반 역시도 레이첼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과 행동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를 수가 없을 터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착각이 아닌가 싶었지만, 해가 갈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테르반이 레이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호감 이상인지 묻는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레이첼에게 느끼는 건 친구로서의 호감, 딱 그 정도였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레이첼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듯이 보이는 레이첼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쭙잖은 마음으로 레이첼을 받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레이첼은 테르반이 비올라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말았다.
과거의 테르반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레이첼이 그렇게 오해함으로써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가 깨지지 않고 유지되었으니 그로서는 레이첼이 마음을 접는 게 아닌 이상 줄곧 그녀가 오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첼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세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던 테르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능하면 레이첼이 자신을 포기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레이첼이 마음을 접었다고 하면 편해져야 옳을 텐데, 그는 좀처럼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체 왜?’
테르반은 좀처럼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테르반은 스스로에게 회의적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레이첼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복잡한 감정 때문에 테르반이 연신 레이첼을 흘긋거렸다.
레이첼은 테르반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확인한 레이첼이 에리카와 비올라를 돌아보았다.
비올라와 에리카는 서로 재잘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에리카가 아카데미에 있을 때 겪은 일들에 관한 대화였다.
레이첼은 재미있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희미하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에리카, 이제 돌아가야지.”
“뭐? 벌써?”
에리카가 화들짝 놀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저녁이야? 시간 왜 이렇게 빨라? 아직 비올라 언니랑 더 놀고 싶은데.”
아쉬워하는 말투로 투덜거린 에리카가 불쌍한 척하며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언니, 여기서 좀 더 놀면 안 돼? 모처럼 비올라 언니랑 테르반 오빠를 만났는걸.”
“맞아, 레이첼. 이렇게 찾아온 김에 저녁 같이 먹고 가지 그래?”
비올라가 에리카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
“아냐. 늦었는데 이만 돌아가야지. 에리카, 다음에 또 놀러 오면 되잖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알았어.”
에리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다가왔다.
레이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에리카의 손을 잡았다.
“아쉽다. 좀 더 있어도 되는데.”
“다음에.”
“알았어. 대신 마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줄게.”
“응. 고마워.”
레이첼은 삐친 에리카를 달래며 헤스테인 저택의 1층으로 향했다.
“그럼 다음에 봐.”
“응. 레이첼 너도, 에리카도 언제든 또 놀러 와. 환영이니까.”
“응! 또 올게!”
아직 키가 작은 에리카가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하인이 도움을 주었다. 이어서 레이첼이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하여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테르반이 짧게 숨을 뱉어냈다.
“그럼 나도 가 볼게, 비올라.”
비올라가 몸을 돌려 테르반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기다려.”
비올라가 붙잡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테르반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아까 들었지?”
“…….”
테르반은 비올라가 어떤 걸 묻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비올라는 도저히 테르반을 이해할 수 없어 머뭇거렸다.
“하지만 너도 내심 레이첼을 마음에 둔 거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테르반의 반문에 비올라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비올라는 줄곧 테르반 역시 레이첼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르반의 반응을 보아하니 전부 자신의 착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난…… 너도 레이첼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그야 네가 나를 대할 때랑 레이첼을 대할 때가 다르니까.”
“내가 레이첼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겉으로는 그랬지. 하지만 마음은 아니었잖아. 네가 나를 보는 시선이랑 레이첼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랐는지 알아?”
“…….”
테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비올라는 그의 침묵을 제 나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난 네가 레이첼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구나.”
자책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비올라가 중얼거렸다.
레이첼을 향한 미안함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제 딴에는 호의로 했던 행동으로 인해 레이첼이 더 괴로웠을 것을 생각하니 숨쉬기 버거웠다.
테르반은 감정을 삼키는 비올라를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에드워드와 마주하게 되었다.
언제나 다정한 에드워드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에드워드의 눈빛이 싸늘했다.
잠시 멈춘 테르반이 에드워드를 향해 묵례한 후 그대로 걸음을 이어 갔다.
* * *
플러렛 백작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창 너머를 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레이첼이 고개를 돌려 에리카를 확인했다.
마차에 오르기까지 쌩쌩했던 에리카는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어 버렸다.
레이첼은 마차 한쪽에 놓여 있는 담요를 펼쳐 들어 감기 들지 않도록 에리카의 몸에 꼼꼼히 덮어 주었다.
한 번 깰 법도 하건만 에리카는 잠깐 옹알이만 할 뿐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때 문득 크레온이 레이첼을 향해 질문했다.
‘갑자기? 회귀라면 지긋지긋해. 너도 알잖아?’
크레온의 새삼스러운 질문에 레이첼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래, 넌 이미 수차례 시간을 역행했으니까. 근데 내가 말하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그런 방식이 아니야.]
‘그럼?’
레이첼이 자리에 앉으며 크레온을 향해 반문했다.
[지금의 힘과 성취를 지닌 채로 예전과 같은 감정을 다시 갖게 된다면 어떨까 해서.]
레이첼은 헤스테인 백작가 후원에서 테르반과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테르반의 반응은 평소와 확실히 달랐다. 마치 레이첼의 말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레이첼로서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기는 해?’
[글쎄. 모를 일이지.]
크레온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들렸다.
지금의 그녀는 여러 차례 이어진 회귀로 인해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하게 된 것이었다. 레이첼은 이미 마모되어 버린 감정을 예전처럼 돌릴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에 된다고 해도 돌아갈 생각 없어.’
[정말?]
크레온은 의외라는 듯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보통은 돌아가고 싶어 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그랬지, 참.’
나는 뒤늦게 크레온이 만난 수많은 계약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어 회귀를 거듭했을 텐데도, 그들은 점점 지치고 메말라 죽음을 선택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아마도 크레온의 말처럼 모든 것을 달성한 후에도 처음과 같을 수 있는 마음일 터였다.
‘되돌릴 수 있기는 한가?’
레이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제 레이첼에게는 그들에게 섞여들고 싶은 마음조차 흐려져 있었다.
‘역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속 시원해. 난 그동안 테르반을 놓지 못했거든. 이렇게라도 테르반을 놓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지.’
레이첼의 말에는 많은 감정이 녹아 있었다. 크레온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더 레이첼에게 묻지 않았다.
마차가 플러렛 백작가의 주랑현관에 멈추어 섰다. 레이첼이 직접 에리카를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그녀에게서 에리카를 넘겨받았다.